• mirimlee

[SCI-FI] 중요하지 않은 별의 주민들 / 20.1 크로스로드

이신주 / 작가


태양계에는 소행성 띠가 있다. 화성과 목성 사이를 수놓은 그것을 혹자는 오래전 산산조각 난 천체의 메아리라고 주장했다. 이름을 붙여줄 사람이 태어나기 족히 수백만 년은 더 전에 사라진 태양계의 다섯째. 그러나 그곳을 떠도는 돌덩이를 죄 그러모은다 한들 온전한 행성을 이루기에는 양이 너무 적었다. 그렇게 이론은 힘을 잃었다. 멸망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지원 작가) 그 진정성과는 무관하게 징조는 이곳저곳에서 모습을 비췄다. 심해어가 수면에서 꾸역꾸역 내장을 쏟는가 하면 새들은 고개를 곧추세운 채 고층빌딩으로 돌진했다. 해변은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비린내를 풍겼다. 계곡을 가득 채운 상아와 함께 코끼리의 무덤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한편으론 어마어마한 개미 떼가 세계 곳곳에서 이목을 끌었다. 이 모든 것이 전자파 때문이라는 말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자연재해를 감지한다는 속설과 관련 있을지 모른다는 말도 나왔다. 분명한 것은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이미 일상이 된 위협들도 건재했다. 가령 빙하가 녹으며 내뱉는 메탄. 톤당 20달러에 투기되어 전 세계를 떠도는 폐기물. 하수도를 따라 흘러내리는 화학물질. 혈뇌장벽의 방호력이나 간의 해독작용이 미치지 않을 만큼 독창적이고 섬세한 인공 분자들. 미세 플라스틱. 한편 비과학적이고 성급하지만 그래서 더 강렬한 징조들도 여럿 있었다. 강이 거꾸로 흐르고 땅울림이 솟고 바위에서 피가 흘렀다. 우물 바닥에선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가 풍겼다. 높은음자리표처럼 배배 꼬인 모양으로 별들의 운행이 일그러졌다. 무수한 천문학자들이 이를 보고 제각기 무언갈 알거나 알았다고 믿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정해진 결말을 향해 질주하는 시곗바늘은 이전처럼 어중이떠중이 싱크탱크에 돈 몇 푼 쥐여주고 고개를 돌리기에는 너무 분명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각기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준비를 끝마쳤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끝내 오지 않길 바라는 일이 비로소 닥쳐야만 보상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실로 반어적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역사를 그래프로 생각했다. 바늘은 아직 0과 먼 곳에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선의 기울기만 잘 지켜보고 있으면 바닥을 부딪기 전에 조치를 취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멸망이 얼마 남지 않은 날, 죽음은 모든 징조의 바깥에서 찾아왔다. 지구는 0을 가리키는 바늘이 아니라 허리가 끊어진 그래프로 종말을 맞이했다. 초공간 주목하세요, 영속자들이여! 건강한 창발성의 시공간 독립체라면 누구나 한 번쯤 4차원 휴양계에서 좋은 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을 겁니다―아, 그 고정될 수 없는 제4축의 흐름이여! 저도 가족들과 함께 자주 찾는 곳인데요, 그에 비해 3차원 우주의 경우 나이를 헤아리는 다소 불쾌한 용도 말고는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죠. 최근 한 사업가가 이러한 경향을 뒤집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듣기로는 3차원의 질량·에너지를 길들이는 방법을 고안했다는데요―그 주인공을 소개하죠, 흐싹시끌루트 씨입니다! (방청객 환호) 흐싹시끌루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행자 자, 흐싹시끌루트 씨. 제작진이 균일관점을 고정하느라 애를 먹었다던데요. 정말 열심히 연구를 하고 계셨는가 봅니다. 바쁘실 테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3차원의 질량·에너지를 사업화하는 방법이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흐싹시끌루트 우선 3차원 우주가 필연적으로 갖는,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특성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군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스튜디오에는 실제로 제가 와 있지 않습니다. 사실은 스튜디오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죠. 어찌 보면 저도 없습니다! 초지성으로의 문을 열어젖히며 특정 현실이나 대사(代謝)의 종속에서 벗어난 이래로는 이런 것이 당연해졌죠. 그러나 3차원 우주의 질량·에너지는 항상 이런저런 법칙에 얽매여, 그 엄격한 조건 아래 지리멸렬한 해체와 재조립을 반복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핵심이었죠. 진행자 매력적인 요약이네요. 제 아이도 학교 과학박람회 시즌이 되자 비슷한 말을 하더군요. 박람회는 즐거웠어요. 며칠 뒤 선생님과 진지한 대화를 좀 나눠야 했지만. (방청객 웃음) 흐싹시끌루트 하하. 안타깝게도 3차원 우주 질량·에너지의 가능성을 주목하는 많은 연구가 그런 식으로 끝납니다. 차이를 이해하기보다는 어떻게든 꺾고 부러뜨리려다가, 펑! 부끄러운 흔적을 남겨 놓죠. 중력특이점 장난을 유행시킨 친구들은 반성 좀 해야 할 겁니다. 아무튼, 저는 오히려 그 규칙성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가령 3차원 우주의 질량·에너지는 반드시 일정한 방향성 내지 운동성을 갖는데요, 저는 이를 응용하여 단순한 입자 구름 이상으로 크고 복잡한 구조체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진행자 멋진 발상이네요. 흐싹시끌루트 감사합니다. 곧 간단한 실험을 통해 계의 안정성을 확보했습니다. 다종다양한 구조체가 곧 서로를 당기고 밀어내면서 상호작용하기 시작했죠. 본래의 물성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도 제가 의도한 형상과 관계를 맺도록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 가지런한 규칙성이란. 그렇게 구조체들이 공손하게 서로 저물고 부풀며 시간을 떠도는 모습을 보다가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지구 “네? 어디라고요?” 대답은 스피커 출력 특유의 각진 모서리로 돌아왔다. 휴대폰을 굳이 멀리 떨어뜨린 채 통화하는 습관은 없었지만, 전등을 켜지 않으면 한 발 내딛기도 힘든 곳이었다. 언덕은 완만했지만 허풍이라도 떠는지 돌부리와 죽은 나무, 무성한 덤불 따위로 단단히 무장했다. 풀벌레 소리가 손에 잡힐 듯 울리다가도 근처로 다가가면 자취를 감추었다. 사방에서 잎사귀가 버스럭거렸지만 생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해 여름은 유달리 꽃이 피지 않았다. 발목에 겨우 닿는 잡초가 짐승을 잡는 쇠덫처럼 턱턱 휘감길 때가 되어서야 시야가 좀 트였다. 찢어진 부채처럼 드문드문 펼쳐진 숲은 크고 작은 공터를 많이 품고 있었다. 그런 곳 중 하나에서 남자는 태연자약하게 손을 흔들었다. 여자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는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돗자리까지 펼쳐놓았다. 그녀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게 무슨…. 영화 본다고 하지 않았어요?” “생각해보니까 지루해졌어. 나중에 보자.” 그녀는 별말 없이 다가갔다. 화내기에는 너무 늦었다. 밤이라는 시간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에서부터 늦어버렸다. 욱신거리는 다리를 달래려 궁둥짝부터 붙였다. 대번에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맨땅 자갈과 흙덩이 모양이 떡살처럼 피부에 새겨질 것만 같은 이 생생함. 그렇다고 장승처럼 멀거니 서 있기도 뭣했다. 여자는 더 깊숙이 자릴 잡았다. 고개를 돌린 남자가 같은 높이에서 캔 맥주를 내밀었다. 밤공기를 머금은 눈매는 쉬이 구부러졌다. “조금만 더 늦게 오면 그냥 마셔버리려다가 참았어.” “네…, 네…. 감개무량합니다.” 알루미늄 고리를 뜯는 소리가 풀벌레 메아리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거품 섞인 액이 몇 차례 여자의 목구멍을 어루만졌다. 씨근거리는 숨이 차차 잦아들었다. 그녀는 남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똑바른 직각이 되어 하늘로 곧장 빨려들었다. 적지 않은 시간을 봐왔지만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캔과의 입맞춤에만 몰두했다. “뭘 그렇게 봐요?” “너도 좀 봐. 여기 예뻐.” 무심코 고개를 쳐드는데, 별안간 세상의 천장이 일백 배는 더 높아진 기분이 되었다. 이런 작은 일에 탄성을 내뱉는 스스로가 쑥스러웠다. 그렇지만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분명 아니었다. 그물 가득 잡힌 물고기처럼 하늘을 횡으로 종으로 뒤덮은 하얀 비늘들. 금세 쏟아질 것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작은 반짝임. 더욱이 그 뒤편에 흐린 젖빛으로 펼쳐진 것은 모두의 마음속에서 닳아빠진 비유로만 남아버린 진짜 은하수였다. 하나하나가 각기 빛나되 경쟁하는 대신 한데 얼싸안아 빚는 느긋한 별하늘. 아마추어인 그녀라도 당장 황도 십이궁을 찾게끔 만드는 밤이었다. 탄성이 잦아들자 서늘한 밤공기가 가슴팍에 스몄다. 별로 물든 캔버스를 들이마시는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이 깨끗하게 사라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태양이 은하를 한 바퀴 도는 데 얼마가 걸리는지 알아? 2억 4000만 년이야.” 김이 빠진다. 맥이 풀린다. 분위기가 깨진다. 어떤 말이라도 여자는 달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녀는 때문에 무언가 대답하기보다는 맥주를 재차 들이붓는 편을 택했다. 남자와 있다 보면 굳이 뭘 더하거나 빼려고 하는 것보다는 그냥 원래 그러려니 생각하는 게 편했다. 가끔 참을 수 없이 답답해지면 이야기가 달라졌지만. “사실 말이야, 달이 지구를 도는 것도 그렇고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도 그렇고 엄밀히 따지면 원 모양이 아니야. 깔끔하게 한 바퀴 도는 그런 모양이 안 나오지. 왜 그런 줄 알아? 달이 도는 지구는 결국 태양을 돌고 또 태양은 결국 은하를 도니까. 은하는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빛의 속도로 달려가도 10만 년은 걸리거든. 태양보다 훨씬 크지. 그거에 비하면 달이나 지구가 움직이는 건 제자리에서 움찔거리는 수준이거든. 우리가 보는 것들은 전부 거스러미 같은 거야….” 그가 주관하는 천문학방송의 유일한 청취자가 될 때마다 시간의 많고 적음이 문제는 아니었다. 차라리 그 처참한 말주변이라면 모를까, 어쨌든 제일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애초 부족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물론 둘이서 잘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목성의 가스 폭풍은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느니, 금성이 지금처럼 황화 가스의 지옥이 되기 전에는 지구와 비슷했는데 왜 그렇게 변했는지 아무도 모른다느니 말을 꺼내는 것이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습관이라는 게 다 그렇듯 몸보단 먼저 마음이 물들었고, 무엇보다 진짜 답답해질 때는 따로 있었다. “…근데 그래도 그 안에 특별한 게 있거든. 지구랑 달이 그래. 달 자전이 지구랑 꼭 맞아서 항상 우리한테는 똑같은 면만 보인단 말이야. 엄청난 우연이라고들 그래. 희한하지 참….” 돗자리가 부스럭거렸다. 내려다보니 남자의 손이 가냘픈 아치를 그리고 있었다. 연필을 잡느라 중지 첫마디에 보기 싫게 박인 굳은살이 흠이었다. 그래도 나머지는 딱히 빠진 곳 없이 매끄러운 선이 이어졌다. 역시 공부를 잘하니 손도 참 예쁘다고 문득 생각했다가, 둘이 아무 상관도 없는 걸 여잔 뒤늦게 깨달았다. 산자락을 타넘은 바람이 둘을 훑고 지나갔다. 술로 데워진 몸이 살짝 곤두섰다. 그녀의 팔이 슬몃 움직였다. “…그래서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커다란 세상에 달라붙은 거라도 다 그 안에 특별함이 있는 거거든. 사실 그래서 더 특별한 거지….” 어느 책이던가 머리와 마음만큼 먼 것도 없다고 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손과 손 사이의 거리도 그쯤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떤 명찰도 붙지 않는 정서가 온몸을 내달렸다.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허우적거렸다. 뭐든지 제자리를 찾도록 보송보송하게 경계가 정리되도록, 희디흰 비누로 하늘과 땅과 나와 너를 박박 씻어버리고 싶었다. 이렇듯 온갖 잡생각이 제 머릿속을 채우는 와중 정작 남자의 호흡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질질 늘어지는 말줄임표가 틈새를 채웠다. “너랑 내가 만나는 것도 그런 거겠지… 조금 떨어지면 아무것도 아니게 보일지 몰라도 그래서 더 특별한 거야. 그러니까… 지금까지 고마워. 표현은 좀 못해도 항상 생각하고 있다고.” 불똥처럼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의 것은 머지않아 다시 하늘로 도망쳤다. 남자의 손이 움츠러들며 돗자리를 긁었다. 위로 좀 더 작지만 따스한 손길이 포개졌다. 초공간 아, 영속자의 삶이란! 유한한 현실의 무한한 변화를 읽어내는 데 지치셨나요? 눅눅해진 인식망에 약간의 휴식이 필요한가요?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관측 가능한 모든 현실 최초로 3차원 질량·에너지 구조체의 독점이용 권리를 취득한, 나선택배의 정성스러운 서비스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고를 송출하던 4차원 입방체 단말기가 불안정한 개연으로 분해되었다. 상담에서는 차분한 분위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는 28우주수명의 영업사원, 퀴그울문즈하는 의자를 살짝 빼주었다. 손님은 알아들을 수 없는 가벼운 투정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나이를 헤아리기조차 오래전에 포기한 손님은 유명한 과학관의 기원 존재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 더 유명한 것은 한때 황색언론의 마수에 걸려들어 홍역을 치른 일이었다. 그녀에 비하면 부스러기나 다름없는 하층민과의 염문설이 이는가 하면 최초의 우주가 눈을 뜨기도 전 스스로를 깨달았느니 하는 질 나쁜 루머의 희생양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퀴그울문즈하가 막상 그녀를 마주하니 그럴 만도 한 것이, 당장 상담센터에 들르며 걸친 옷가지만 하더라도 무너지던 우주를 통째 벗겨낸 물건이었다. 호사스러운 것이 죄악은 아니지만 온갖 가십거리에 탐닉하는 기자들이라면 달려들지 않고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나선택배 고객접수창구입니다. 특별히 찾으시는 서비스가 있으신가요?」 「아유, 선생. 그 나선택밴가 뭔가, 난 그냥 뭔가 좋다길래 왔구먼. 근데 아무리 읽어봐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알아서 설명해주시구랴.」 요약하자면 나선택배는 질량·에너지 구조체의 견고한 규칙성을 통해 현실의 변질을 억제하고, 이를 통해 고객의 물건을 안전하게 옮길 수 있는 수단이다. 퀴그울문즈하는 누차 친절하게 자세하게 그리고 간결하게 이 뜻을 전달하려 노력했다. 「선생 그러니까, 내가 지금 물건을 저기 우리 피기원존재네에 보내고 싶은데, 이걸 3차원에 던져 넣으면 그대로 흘러간다는 건감?」 「아뇨아뇨, 고객님. 그게 아닙니다.」 서비스를 차별화할 좋은 기회로군. 그는 생각했다. 「저희는 고객님의 물건을 중력특이점에 던져놓고 꼭 올바른 시간에서 재조립되기를 기다리는 사기꾼들과는 격이 달라요. 먼저 고객님의 물건이 3차원 우주에서 취할 물성과 요구되는 지표를 세심하게 계산한 뒤, 30만 분의 1 광속 단위까지 정교하게 훑는 포장을 통해 안전을 보장합니다. 그….」 「선생, 천천히 좀 해요. 난 하나도 못 알아듣겠구먼.」 잠시 의지를 가다듬는 퀴그울문즈하. 막혀버린 말문을 대신하여 돌파구를 제시한 것은 그의 인식망이었다. 운 좋게도 책상 한쪽에 밀어놓은 접수 서식을 발견한 것이다. 소수점 단위까지 정확한 2차원을 도려내어 만든 문서는 수천수만 장을 쌓아 올린들 표가 나지 않았다. 퀴그울문즈하는 속엣말을 뇌까리며 푸르스름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 대표인 흐싹시끌루트는 전형적으로 잇속에만 밝은 영속자였다. 그에게 있어 모든 비용은 죄악이었고 이는 사무실 비품을 채우는 일에까지 눈치를 보게끔 만들었다.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대외실적을 발표할 때뿐이었고, 온갖 자질구레한 소모품비까지 죄다 무형자산으로 산입해버리는 그의 좀생이 같은 회계는 많은 구설수를 낳았다. 퀴그울문즈하는 형식적인 미소와 함께 한 손으로 접수 서식을, 또 다른 손 중 하나론 두꺼운 찻잔을 그녀에게로 내밀었다. 싸구려 역설로 마감하여 비가향 곡면 느낌이나 겨우 내는 잔은 자유전자를 넣어 우린 초중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차를 건네는 것이야말로 손님이 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인데, 워낙 의욕에 앞서다 보니 놓친 부분이었다. 「일단 빈칸을 채워주시고 궁금한 점은 그때그때 질문해주시겠어요?」 그럼세.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아직 정정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는지 인식기관을 부릅떴지만, 이내 파우치에서 두꺼운 보조기기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날씬한 초구 모양의 돋보기는 기능적이라기보다는 심미적인, 그것도 과시용으로 맞춘 것 같았다. 「선생, 여기 안정기라는 건 무슨 물건인감?」 퀴그울문즈하는 그녀가 나머지는 과연 다 이해했을지 미심쩍었다. 「그건 선택사항입니다. 화물 옆에 초소형 구조체를 딸려 보내 궤도 안정도 되고요. 무엇보다 구조체는 늘 화물을 관측하도록 설정됩니다. 덕분에 실시간으로 화물의 위치와 운동량을 확인할 수 있지요. 쉽게 말해 배송 추적이 된단 말입니다.」 그녀는 소맷귀에서 막 일어난 진공 거품을 매만지며 큰 체크 표시를 남겼다. 감염되듯 붕괴가 번지는 모습이 거슬렸지만 어쨌든 퀴그울문즈하는 방금 옵션을 하나 팔아먹었다. ‘궤도 안정’ 같은 두루뭉술한 발화에 대뜸 넘어오는 경우는 흔치 않았지만, 실시간 추적이라는 말을 듣고도 버티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아무 소용도 없을지라도 내 택배가 어디까지 왔는지 어딜 헤매는지 생각만 하더라도 그들은 애틋한 기분이 되기에. 한 가지 분명한 선택을 하니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시시한 눈길로 문서를 대충 훑었다. 이윽고 서식은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하긴 처음부터 서비스를 이용하러 온 사람에게 시시콜콜한 사정을 이해시킬 이유가 있겠는가. 이렇게 쉬운 것을. 「그밖에 변경하고 싶으신 사항이 있나요?」 「선생도 참. 젊은 사람이 매번 꼬박꼬박 싹싹하구먼. 그대로만 해주구랴.」 퀴그울문즈하는 서식을 봉하고 화물과 함께 물류팀으로 올려보냈다. 지구 “명준아, 천천히 가야지.” 전시관에는 사람도 얼마 없었다. 사방이 한적한 가운데 명준이라는 아이만 뭐가 그리 바쁜지 오두방정을 떨었다. 운동화가 잰걸음으로 바닥을 뭉갤 때마다 아직 젖살로 토실토실한 팔다리가 바람 소리를 뱉었다. 당찬 걸음이 복도를 가로지르면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씩 아이에게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명준이의 걸음이 어딘가에서 멈췄다. ‘어딘가’인 것은 그곳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굳이 멈출 곳으로 보이지 않는 까닭이었다. 뭔가 굉장한 전시품도 하다못해 박물관의 약도나 화장실, 자판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리관에는 기껏해야 어른 팔뚝만 한 돌이 뻘쭘한 검은빛을 띤 채 놓여 있었다. 제주도 바닷가에 던져놓으면 누군가 심심풀이로 박살내고 물에 빠뜨릴 법한 그런 돌멩이였다. “명준아, 그러다가 길 잃으면 어쩌려고 그래?” 한발 늦게 도착한 엄마가 남들 들으라는 듯 점잖게 예의를 차렸다. “다음부터 조심조심 다닐게요.” 말은 잘해요. 라는 말이 그렇게 또 어울릴 수 없었다. “여기 뭐 그렇게 볼 게 있다고?” 명준이는 시커먼 돌덩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명판에는 그것이 러시아의 ‘시베리아 트랩’이라는 지형에서 나온 ‘현무암’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실제로도 제주도에 잔뜩 굴러다니는 돌이 맞았다. 화산지형 특유의 산출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지구야 어차피 한 껍질 벗기면 죄다 들끓는 암석 아닌가? 엄마는 아들내미가 대체 어떤 자연과학적 탐구열을 품고 그렇게 달려나갔을까 내심 기대하던 것을 살포시 접어두었다. 천재를 기대하기엔 너무 머리가 커졌지만, 그래도 영재 정도는 아직 가망성이 있는데. “명준아, 이거 보려고 온 거야?” “당연하죠! 엄마 페름기 알아요?” 명준은 그 또래 남자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뒤에 무슨무슨 사우루스가 붙는 것에 푹 빠져 살았다. 15세 이상 관람가를 중학생 이상 관람가로 쓰던 시절부터 시작된 대중문화의 공룡 사랑은 현대에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명준 엄마도 울며 겨자 먹기로 공룡시대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았다. 그런데 해당 시기를 삼분하여 칭하는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 중 어느 것도 아닌 페름기라?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페름기는요, 공룡이 태어나기도 전에 있던 시댄데요, 이때 엄청 큰 화산이 터져서 그때 살던 애들이 다 죽었어요. 공룡시대보다 더 큰 멸종이었대요.” 그것만으로 명준 엄마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공룡에 빠져 사는 자식이 있다면 당연히 백악기 말 운석 충돌에 대해 알 수밖에 없고, 그것을 뛰어넘는 대멸종이라면 흥미가 일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더욱이 전시관의 연표를 보니 페름기의 바로 다음 시대가 곧 중생대, 즉 공룡시대라고 나와 있지 않은가? 조금 전까진 이름조차 모르던 페름기와 좀 더 친해진 기분으로, 명준 엄마는 가까이 다가섰다. ‘시베리아 트랩은 페름기 대멸종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화산이 빚어낸 지형으로서, 러시아 북부 현무암 지대를 통틀어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의 유일한 대륙에 거대한 상처를 입힐 정도의 충격과 더불어 오스트레일리아의 절반이 넘는 면적을 뒤덮은 분화는 막대한 유독성 가스를 방출하여 대기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페름기 말 육상생물종의 70%, 해양생물종의 90% 이상이 멸종했고 이는 모든 지질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멸종입니다. 학자들은 아직도 그 뚜렷한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고, 더불어 당시의 지구가 그렇게 큰 재난으로부터 어떻게 그토록 빨리 회복하여 복잡다양한 생태계 질서를 되찾을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대체 이런 팻말은 누가 만드는 걸까. 아이들도 읽는 만큼 좀 더 짧게 쉽게 쓰면 좋을 텐데. 끔찍한 길이의 복문을 꾸역꾸역 삼키자 그 뒤로는 화산 하나가 좀 투정을 부린 탓에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당한 생물들이 적혀 있었다. 그녀의 비고생물학적 식견으로 알아볼 수 있는 이름이란 ‘삼엽충’뿐이었고 때문에 읽는 속도를 빨리했다. ‘한편 최근 부쩍 늘어난 동물들의 이상행동이 인류의 영향으로 인한 6번째 대멸종의 징후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는 인류세 대멸종으로 불리며, 학자들은 무분별한 환경파괴 등의 원인으로 현 생물권이 회복 불능의 피해를 입는 상황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가벼운 교양 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글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읽은 페름기 대멸종의 무시무시한 설명과 겹쳐 보니 마음이 살짝 무거워졌다. 내 한 몸만 본다면 아무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 아이, 그 아이의 아이. 우리가 미래로 알고 지내던 망가진 현재를 제 두 손에 받아들 세대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명준이 그녀의 옆구릴 콕콕 찔렀다. “엄마, 나도 커서 이런 박물관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 “응? 글쎄… 일단 공부 열심히 해야 할 텐데? 너 어제도 학습지 다 안 풀고 잤지?” 으악! 명준은 짧게 빼문 혀를 내보이고 달음박질쳤다. 길이 덜 든 빳빳한 고무창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명준 엄마는 다시 전시물로 눈을 돌렸지만 이미 대멸종 운운하는 말은 머릿속을 떠난 뒤였다. 명준은 아직 암산보다 손가락이라는 정교한 도구를 활용한 꼬무락계산을 선호했다. 학교 미술 시간엔 ‘박물관장’이라는 말풍선을 단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명준은 커서 박물관을 짓고 그 뒤편에 집을 지어 엄마 아빠 동생이 모두 같이 사는 그림을 그리는 그런 아이였다. 그녀는 입체 영상관을 향해 질주하는 명준의 뒷모습을 보면서, 인류세 멸종이니 뭐니 하는 흉악한 말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렸다. 3차원 우주 「빌어먹을. 맨날 이런 식이야. 이래놓고 또 뭐 잘못되면 내 탓할 거잖아? 여긴 왜 이렇게 됐어요 여긴 또 왜 이렇게 안 됐어요 쫑알쫑알….」 우비츠틀리는 19우주수명이 되자마자 나선택배의 직원 계급 맨 아래로 사회생활의 출발을 끊었다. 고정된 직함도 아직 없는 그는 공식적으로는 직접 손대는 일 없이 이것저것을 배워 나가야 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 정말 윗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척척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오만 잡일을 죄다 전담하는 만능역군이 되어 있었다. 초중핵 자판기 보수나 이차원 출장에 이르기까지 일을 손볼 자격은커녕 어떤 배경 지식도 없는 임무가 그에게 떨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가령 지금 그가 부유하는 가짜 진공의 바다만 하더라도 그랬다. 우비츠틀리는 퀴그울문즈하와의 사내 메신저를 확인했다. - 우비츠틀리씨 바빠요? 읽음                                                                                          읽음 아닙니다 - - 화물알림떴는데 가능하죠? 읽음 - 상대방이 좌표를 보냈습니다 읽음

읽음 넵 - - 수고해요~ 읽음 1 넵! - 「가능하죠?」 알림이 뜬 건 뜬 거고 그래서 뭘 하란 건가. 두루뭉술한 말이다. 행간에 감춰진 맥락을 알기 쉽게 풀면 다음과 같았다. ‘화물에 문제가 생겼으니 가서 살펴보고 적당히 손 좀 봐라.’ 굳이 두루뭉술하게, 그리고 중립적으로 표현한 이유는 혹시라도 소송이 걸릴 때 불리한 증거를 남겨 놓지 않기 위한 회사 방침이었다. 특정한 표현을 사용하는 순간 사측이 문제의 자세한 양태를 이미 파악했단 게 되어버리니. 수많은 질점과 노드를 따라 아로새겨진 물류의 흐름이 우비츠틀리의 인지망을 메웠다. 그 선을 지나는 수많은 화물 중 하나에 불이 들어왔다. 알림 표시였다. 목적지까지의 경로를 다듬던 우비츠틀리는 가뜩이나 좁아터진 길목을 이런저런 구조체의 궤적이 어지럽히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몸을 화물과 비슷한 크기까지 줄인 뒤 출발했다. 장애물 중 가장 큰 중력장을 뿜어내는 것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느긋한 가스 덩어리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어린 영속자의 번뇌로 가득 찬 얼굴이 비쳐 보였다. 어설프게 굳어진 금속성 수소와 가벼운 대기, 그 사이를 메운 편안한 고요가 우비츠틀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우비츠틀리의 무수한 손끝이 구조체 내부로 파고들었다. 무미건조한 가스층 틈새로 자그마한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장난기가 동한 우비츠틀리는 팔을 여럿 뻗어 핵을 붙잡고 통째로 돌렸다. 멍청하게 부유하던 액체 수소는 이제 축을 따라 회전하며 무수한 잔금을 그렸다. 조금 더 기다리자 구를 한 바퀴 아우르는 불그죽죽한 무늬들이 몇 나타났다. 한가운데에는 그 너비가 족히 수분의 일 광속에 달하는 커다란 소용돌이가 생겼다. 흡족한 표정으로 모퉁이를 돌던 차, 바로 안쪽 궤도의 바윗덩이가 대뜸 우비츠틀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현실의 껍질이 구부러지며 불쾌한 반향을 빚었다. 짧은 신음이 울렸다. 우비츠틀리는 회사 자산 등록표를 띄워 눈앞 구조체의 물성을 입력했다. 결괏값 없음. 그렇단 말이지. 넋두리는 모종의 선고처럼 들렸다. 그의 수많은 팔 중 하나가 낭창낭창 내저어졌다. 금세 그는 돌덩이의 단말마를 뒤로 한 채 나아갔다. 그 잔해는 대부분이 바로 옆 가스 덩어리로 빨려 들어갔다. 종래에는 하나의 구조체라기엔 너무 적은 찌꺼기만 남아 얕은 띠가 될 것들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우비츠틀리는 화물을 살폈다. 머지않아 발화기관에서 창백한 입자선이 쏟아져 나왔다. 「빌어먹을! 여기도 또 탄소복합체잖아.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나선택배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질량·에너지를 엮어 이런저런 구조체를 만든 것까지는 잘 되었으나 예기치 못한 오류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중에서도 별도의 ‘자주 나오는 질문’이 배정될 정도로 핫한 건이 탄소복합물이었다. 그저 입자들을 가르고 붙였을 뿐인데 다시 달라붙으니 괴상한 법칙에 따라 접히고 꼬이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중나선 형태의 단백질결합까지는 차라리 나았다. 회사는 그것이 주변의 일부를 끌어다 제 육신으로 삼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더욱이 그것들이 미숙한 자기복제 기전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더더욱 생각지 못했다. 그렇게 탄소를 엮은 몸을 가지고 있으니 ‘탄소복합물’로 명명된 기이한 존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창궐했다. 자연 바깥의 알 수 없는 지향점을 향한 3차원 질량‧에너지의 자각적(自覺的) 몸부림. 물론 이것은 시인들이나 쓰는 표현이었고 고객들이 볼 때는 그냥 끔찍한 사태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었다. 흉측하게 변형된 화물의 사례가 속속들이 대중의식망에서 공유되었다. 각계각층의 비난이 쇄도했고 주가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대중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탄소복합물 전용의 제품을 다루는 회사 중 업계 1, 2위를 다투는 곳이 있었다. 직원들에게 나눠준 지분을 통해 운영되는 비상장기업이었는데, 대외적으론 그네들이 스스로 설립한 위원회가 그 모든 권리행사를 도맡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위원회의 멤버나 구조 등 자세한 면모는 베일에 감춰져 있었고 물론 그 수뇌부에 뻗친 손아귀는 나선택배의 창립자, 흐싹시끌루트의 입맛을 진하게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양편의 모가지를 모두 틀어쥔 그만 좋을 뿐, 실질적으로 이리저리 구르는 것은 그 아래의 직원들이었다. 아니 그 밑으로 한 번 더 내려가야 겨우 볼 수 있는, 우비츠틀리 같이 어리고 힘없는 영속자였다. 이번 화물은 보통 심하게 오염된 것이 아니었다. 등록표에 따르면 분명 제일 바깥 포장은 이산화유황과 메탄 위주의 느슨한 유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극도로 반응성이 높은 산소 화합물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초점을 표층으로 돌리면 더욱 가관이었다. 액체 바다에서 시도 때도 없이 크고 작은 탄소복합물들이 기어 나왔다. 그들이 제각기 다른 인식망과 시간 상대적이지 못한 흔적으로 화물을 덧칠해둔 모습은 혐오감마저 불러일으켰다. 우비츠틀리는 화물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때마침 표면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겉껍질이 갈라지며 포장이 죽 찢어졌다. 분화가 무르익자 눅눅한 마그마가 샘솟기 시작했다. 균열을 따라 고집스런 진동이 퍼져나갔다. 우비츠틀리가 진정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달은 것은 이미 갈 데까지 간 뒤였다. 불그스름한 유체의 양이 자연 활동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았다. 균열이 대륙을 통째 집어삼키기 직전이 되어서야 우비츠틀리는 자신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을 깨달았다. 크기를 줄이면서 거기에 적합한 질량·에너지값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포장이 상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비정상적으로 강한 인력을 가진 그의 몸에 반응하여 화물이 송두리째 짜개지고 있었다. 실수를 깨달은 그의 몸에서 막대한 물리량이 쫓겨나듯 배출되었다. 그러나 균열은 기세만 조금 누그러졌을 뿐 멈추지 않았다. 그 운동성과 열이라니. 어떻게 해서든 평형 상태로 돌려놔야만 했다. 수많은 팔이 은하수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 수소 구름을 모았다. 우비츠틀리는 그를 주물러 뼛속까지 시린 액체 일산화―이수소로 바꿔놓았다. 이윽고 그것이 일제히 화물로 쏟아져 내렸다. 유체는 헛디딘 발처럼 쇄도하여 구조체를 두들겨 패다시피 덮쳤다. 온도를 낮춰 분화를 막는 대신 더 타오를 것이 없게 잘근잘근 밟아버리는 것에 더 가까웠다. 급한 불은, 말 그대로 껐다. 그러나 분화의 잔여물도 제대로 처리해야 했다. 우비츠틀리는 조심스레 변질된 포장을 건져 올렸다. 역한 냄새가 그만 인식망의 일부를 마비시켰다. 손 틈새로 막대한 양의 황화 가스와 이산화탄소를 질질 흘리며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바로 안쪽 궤도에 화물과 비슷한 크기의 구조체가 있었다. 그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곧장 힘을 실었다. 선명한 이차곡선을 그리며 덩어리가 내던져졌다. 두꺼운 가스층이 새로운 보금자리에 속속들이 스미는 것을 확인한 뒤, 우비츠틀리는 다시 소중한 화물로 주의를 돌렸다. 포장이 다소 손상되었으나 망가진 것은 고치면 될 일. 그 밖에 달리 심각한 문제는 없었다. 바짝 긴장한 채 전자기 펄스를 뿜던 우비츠틀리의 인식기관이 안도의 빛을 띠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찰나, 화물을 중심으로 찌그러진 궤도를 돌던 돌멩이가 하나 튀어나왔다. 회사가 배송 추적용으로 달아놓은 초소형 구조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비츠틀리는 피곤했다. 벌어지는 일 때문에 피곤하다기보다는 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제 처지가 무엇보다도 피곤했다. 그래서 초소형 구조체의 앞뒤를 비틀어버렸다. 이는 그것의 관측망이 항상 화물의 반대편을 향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즉 회사가 더 이상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없다는 거다. 가벼운 정복감이 우비츠틀리의 인식망을 간지럽혔다. 일을 끝마치기 위해 다시 화물로 다가서던 그는 얼마 안 가 그 이상의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는 이제 화물의 상태를 알 수 없었다. 어린 영속자의 생각에 잠긴 얼굴이 재앙으로부터 회복 중인 화물을 굽어보았다. 표토의 세계는 서서히 시련을 떨쳐내고 있었다. 다채로운 계통의 탄소복합물들이 빛과 어둠을 따라 피어나고 이지러졌다. 잠시 주춤하던 질량‧에너지의 순환도 곧 전에 없이 활발해졌다. 어쩌면 일산화―이수소의 구름을 부어주지 않았더라도 이들은 이겨내지 않았을까. 탄소복합물의 길은 과연 어디로 뻗어있는 걸까? 우비츠틀리는 자신이 단 한 번도 그들의 미래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탄소복합물은 화물 손상 중에서도 심각한 경우였지만 그만큼의 연구가 따라붙지 못했다. 연구고 뭐고 발견하자마자 죄다 지워 버렸으므로 애초 관찰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기에 충분히 오랜 시간 지속된 탄소복합계가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지금까지는. 우비츠틀리는 배송예정시각 즉, 그곳의 탄소복합물에게 허락된 유예를 확인했다. 촉박했지만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우비츠틀리는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수많은 탄소복합물의 덧없는 삶이 모여 그치지 않는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을 확인했다. 훌쩍 떠나며 그는 입맛을 다셨다. 지나치게 뚜렷한 정서를 품어버리면 곧장 중력특이점을 뚫어버릴 수도 있기에 처신을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 그렇기에 어쩌면, 무엇이든 확실해질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상상이었다. 초공간 웁소탐트라는 조금 있으면 결속 1우주수명의 기념시를 맞이할 평범한 영속자였다. 그의 매일은 비록 흥미롭지도 신기하지도 않았지만 행복이라고 이름 붙이기에 부족하지 않은 것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어느 날 도착한 작은 택배가 그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화물에 탄소복합물이 묻었다는 정도로 일단락될 일이 아니었다. 그곳은 기존의 탄소복합계라는 용어로 포괄할 수 없을 만큼 오염되어 있었다. 웁소탐트라가 아는 한 이렇게까지 심한 사례는 여태껏 없었다. 보상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논조로 기자회견을 소집할 것이냐의 문제였고, 마땅히 만사를 제쳐두고 제일 먼저 처리해야 할 사안이었다. 내동댕이쳐진 택배를 요리조리 살피던 결속관계상대의 말만 아니었다면. 「잠깐만 있어봐. 우리 이거 그냥 없애버리면 안 될 것 같아.」 「말이라고 해? 그럼 당연히 완전히 다 지워버려야지. 어디 연구소에라도 맡겨야겠어. 시장 물건으로는 택도 없을 거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 얘네 잠깐만 좀 이대로 두자.」 웁소탐트라는 결속 상대의 의지와 제 인식망 사이에서 정보오염이 일어났다고 믿었다. 「무슨 소리야?」 「좀 살펴보니까 특이한 부류가 있어. 그냥 탄소복합물하고는 뭔가 달라.」 「그래. 훨씬 많고 더럽긴 하지.」 「그거야 그렇지만… 아무튼 일단은 둬 봐. 좀 진득하게 들여다봐야겠어.」 그리곤 택배를 껴안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두문불출. 이따금 분명히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새어 나왔지만 그 외에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렇게 결속 상대가 세상 바깥으로 나온 것이 조금 전이었다. 당연히 뭔가 말하겠거니 싶어 수없이 많은 팔짱을 낀 채 쳐다보던 웁소탐트라. 그러나 와 닿은 것은 결속관계상대의 엉망으로 헝클린 현실이었다. 혼자서 그렇게까지 깊은 의미 요란을 풍기는 영속자를 웁소탐트라는 본 적이 없었다. 결속 상대는 의지를 발하는 법을 잊어버린 듯 한참을 있더니, 자기가 올 때까지 그걸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그리곤 집을 나갔다. 그 모든 것을 겪은 뒤의 웁소탐트라가 지금에 있었다. 그의 낯이 불편한 빛을 띠자 소파가 확정되지 못한 만듦새로 이리저리 요동쳤다. 소파는 둘이 제일 먼저 함께 고른 가구로, 질 좋은 초끈을 엮어 언제나 가장 편안한 상태를 띠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지금 웁소탐트라의 성미에 그런 것이 들어올 리 없었다. 결속 상대의 방으로 인식기관을 기울이자 택배가 슬쩍 드러나 있었다. 가깝진 않았지만 영속자에게는 무의미한 거리였다. 웁소탐트라는 초인종이 울리기 전까지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대문을 열자 안 그래도 심란하기 그지없는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핵력을 얼마나 먹였는지 프랙털처럼 흐릿한 옷차림의 영업사원이었다. 다른 손 중 하나에 걸린 서류 가방은 가장 간단한 공리조차 못 들어가리만치 매끈했다. 그는 꾸벅 고개를 숙여왔다. 누가 보더라도 기계적 작용의 부산물로 직조된 미소를 띤 채.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좋은 하루 보내고 계시는가요?」 그의 발화에서는 방금 막 뿌린 듯 역한 플라즈마의 자취가 풍겨 나왔다. 약간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제가 그만큼 신경이 곤두서 있든지. 「살 거 없어요.」 「대부분의 고객님들이 거기에서 출발하십니다마는, 이 작고, 귀엽지만 답잖게 믿음직한 녀석을 본 뒤에는 말씀을 달리하시더군요.」 꺼낸 것은 쥐기 좋은 크기의 실린드론 용기로, 속이 비었는지 가볍게 튕기는 소리가 났다. 측면에는 크고 믿음직한 복고풍 서체로 ‘내 손 안의 대량살상병기! 울트라 이성질핵―선택적 증류방사식 방사광파형 공인인증모델 X-3000’이라고 쓰여 있었다. 웁소탐트라는 다소 호기심이 동했지만 여전히 뭔가 살 생각은 없었고, 실제로도 그런 태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요즘 방문상은 무기도 파나요?」 「아, 이걸로 누구를 죽이려면 현실이 한 보따리는 있어야 할 겁니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놈이죠. 탄소복합물을 일컬어 ‘생명’이라고 노랠 불러대는 치들이 좀 있지 않습니까? 회사에서도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지 이걸 갖고 무기라고 하라더군요.」 웁소탐트라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시중에 풀린 대부분의 제품은 단순히 개별 탄소복합물의 질량‧에너지 대사를 방해하는 식으로 작동합니다. 열교환이나 미립자의 상호작용을 막는 식이죠. 간단하지만, 그만큼 게으른 방법입니다. 제가 소개해드릴 이 제품은 모든 탄소복합물의 근간이 되는 미시구조를 공략하여 수량과 양식에 불문곡직, 제아무리 복잡한 오염물이라도 단번에 중화합니다.」 웁소탐트라의 인식망이 집 안쪽으로 확장되었다. 그것을 놓칠 정도로 순진한 영업사원이 아니었다. 탄소복합물에게 점령당한 화물의 존재감은 현관까지 미치고도 남았다. 화들짝 놀란 그의 몸이 잠시 여러 갈래의 가능성으로 흩어졌다가 재조립되었다. 「이런 세상에, 선생님. 집에 엄청난… 물건을 갖고 계시는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연유를 여쭙고 싶습니다만.」 「아뇨, 저건 그냥… 뭐 사정이 있어요. 조만간 치워야죠. 그보다 설명이나 마저 해줄래요?」 사원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말은 청산유수로 흘러나왔다. 「고객님께서 알아야 할 것은, 이 ‘매뉴얼’이라고 불리는 컴팩트한 친구가 모두 품고 있습니다. 이것만 있다면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지요.」 별생각 없이 대화를 이어나가던 웁소탐트라의 손에는 어느새 날카로운 2차원 책자가 들려 있었다. 문득 눈앞의 그가 말동무가 되어주려고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뇨, 안 살 거예요. 산다고 한 적도 없는….」 「선생님, 그런 섭섭한 말씀은 필요치 않습니다. 영업사원에게도 시연품을 마음대로 처리하는 권한은 있지요. 그렇기에 저 물건을 봐버릴 수밖에 없던 저는, 이 흠 하나 나지 않은, 완전무결한 제품을 아무런 조건이나 대금계약 없이 무상으로 드리기로 했습니다.」 어느새 울트라 이성질핵인가 뭐라나 하는 물건이 품에 들려 있었다. 젊고 싹싹한 외관과는 다르게 제법 수완 있는 장사치 아니, 사기꾼이나 위상치기범의 기질이 엿보였다. 품질보증서는 매뉴얼에 동봉되어 있습니다. 각인된 제조시 기준 15우주수명까지의 무상수리가 보장됩니다. 촘촘히 조직된 발화가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웁소탐트라는 뭐라고 의견을 표할 새도 없었다. 영업사원은 제 스스로 문을 닫고 떠났다. 은은한 자유전자만 얼마간 현관을 떠돌았다. 웁소탐트라는 그대로 있는 것도 뭐하여 일단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책자를 펼쳤다. 사용설명이 제일 먼저 나왔다. 용기를 흔들어 내부의 중성자쌈을 충돌시키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마선을 목표에 골고루 끼얹는다. 반응이 끝나면 중력특이점이 발생하니, 동봉된 팩에 이를 담아 처리한다…. 다음 장부터는 분리수거 방법이니 기술번호니 하는 지루한 부분이 이어졌다. 웁소탐트라는 매뉴얼을 덮었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탄소복합계가 유독 거슬렸다. 결속 상대가 돌아온 것은 극적인 부분이 다 지난 뒤였다. 지구 지구 최후의 날이었다. 진부했지만 그만큼이나 숱하게 오용된 표현이었다. 본인들의 존재가 곧 모성의 정체성과 직결된다고 믿는 낭만주의자들은 인류종의 생존을 지구 자체의 존망과 결부시키길 즐겼다. 때문에 이들은 약간 더워지거나 추워지는 것을 두고 ‘지구멸망’ 같은, 자그마치 6000000000000000000000000kg짜리 흙덩이가 실제로 들으면 코웃음 칠 법한 말을 애용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종말을 다룬 이야기라면 으레 등장하는 극적 전개, 재난영화의 초중반처럼 눈물과 비명과 힘줄이 선 주먹이 오가는 광경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빨랐다. 중성자별 한 쌍의 충돌이 빚어낸 폭풍은 태양이 일백억 해 동안 내뿜는 열량을 단 일각에 걸쳐 투사했다. 무슨 일을 당하는지조차 모르는 이들의 머리 위로 넓게 빠르게 깊게, 죽음이 드리웠다. 서슬 퍼런 단두대로 버터케이크를 처형하듯 침해는 무정했다. 달뜬 입자는 하나하나가 이미 총포와 필적하는 운동량을 갖고 있었다. 지구는 난도질당했다. 뭉개졌다. 짓물렀다. 갈가리 찢긴 산과 바다가, 뻘처럼 찐득한 문명의 부스러기들이 사방팔방으로 흩날렸다. 대지 깊숙한 곳 한 번도 하늘을 본 적 없는 흙과 돌이 드러났다. 그조차 머잖아 저항 의지를 잃고 무너졌다. 이내 엉망으로 녹아내린 행성이 원심력에 밀려 스스로를 미러볼처럼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 물리‧화학적 변화를 상세히 풀이할 어떤 관찰자도 그러나 그곳에는 없었다. 누군가 자손에게 이 이야기를 남기기에도 종말에 맞춘 새로운 생활을 익히기에도 시간이 없었다. 이미 칼날은 내려왔고, 그저 과거의 기억 일부가 기적적으로나마 보존되리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초공간 「방금 발화를 증명할 수단이 있습니까?」 웁소탐트라의 결속 상대, 게바우휘나차는 질문을 건넨 이의 인식기관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가 어느 심하게 오염된 화물이 실은 관측 가능한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음을 주장한 직후였다. 발화자 본인이 침묵을 지키자 가벼운 의미 요란이 장내를 감싸 안았다. 절반은 역시 말도 안 되는 주장일 뿐이었다며 얼토당토않은 발제를 폄하했고, 나머지 절반은 심포지엄 뒤의 성대한 피로연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게바우휘나차는 이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예, 있습니다.」 장내의 소란이 한 층 격화되었다. 「대체 그것이 무엇이오? 그대 말대로라면 모든 것이 무질서로 되돌아갔을 텐데.」 「특이성정을 보인 탄소복합물 중 일부가 재앙을 피했습니다.」 이후의 혼란을 글로 옮기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영속자인 작가가 필요했다. 3차원 우주에서는 별 하나가 새로 태어날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었다. 「그러면 왜 이 자리에 가지고 나오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방금 ‘가지고’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입니다.」 게바우휘나차는 장내가 완전한 침묵에 잠길 때까지 기다렸다. 「이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맞닥뜨린 탄소복합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의 지능 기관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질량‧에너지 비율은 화물 내 다른 탄소복합물에 비해 월등히 높았습니다. 이들은 이렇듯 우월한 생체지표를 이용하여 고도로 발달된 건축술을 포함한 갖가지 생존수단을 확보했습니다. 덕분에 가히 구조체 전역의 지배자로 군림했지요.」 놀라운 일이로군. 출처: 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id=1514&s_para1=172&Board=n9998&admin=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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