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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FI] 잿빛 추방 / 19.12 크로스로드



(일러스트레이션: 유지원 교수)

1

잠을 깬 지 한참이 지났지만, 몸에 달라붙은 눅진한 피로가 유조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팔다리를 움직일 수도, 침대에서 몸을 뗄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2개월 전 병원에 다녀온 뒤로 충분히 자고 나서도 잠을 털어내기가 유난히 힘들어졌다. 좋아질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깨어 있을 때도 어지러움, 두통, 구역감, 가슴이나 복부 통증 같은 증상이 간헐적으로 왔다 가곤 했다.

원격 진료를 여러 번 받아 봤으나 ‘후유증’이라는 진단과 대증요법 이외의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애당초 미리 정해 놓은 증상과 진단, 처방 메뉴에 끼워 맞추기나 하는 원격 진료 따위 겉핥기에 큰 기대를 걸었던 건 아니지만.

50대 중반인 유조는 번식 경험이 없었다. 40대가 끝날 때까지도 그는 번식에 대해 애써 생각지 않으려 했다. 모든 시민은 성별 구분이 없고 단성생식으로 번식했다. 대부분의 시민은 20대 이후부터 일생에 단 한 번 번식했고, 그 시기는 개인차가 커서 이른바 ‘적령기’라는 것은 따로 없었다. 그들은 각자의 사정이나 형편에 따라 약물이나 시술로 번식 시기를 조절하거나 아예 건너뛰었다. 소수의 시민은 평생 번식하지 않았다.

따라서 50대에 접어들고도 아무런 징조가 없는 유조가 특이한 경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평균 130세까지 생존하는 시민들이 번식 없이 70대를 넘긴다면, 약물도 시술도 번식 가능성을 좀처럼 끌어올리지 못했다.

3년 전부터 번식은 유조뿐만 아니라 그가 나고 자랐던 도시 전 시민의 첨예한 관심사가 되었다. 2개월 전 유조가 병원에 가야 했던 일도 상황의 여파였다. 유조는 입원한 날부터 약 1개월 동안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아무 것도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만 집중하기에도 바빴다.

자고 있는 동안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한쪽 발이 몹시 차가웠다. 추방소의 난방은 1개월 전 폐쇄 명령이 내려오자마자 끊겼고 보급선은 6개월 전에 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생활 리듬과 식사를 규칙적으로, 될 수 있으면 좋은 것으로 유지하려 했지만 몸은 서서히 바스러져 갔다. 유조는 몸속 깊은 곳에 있는 동력로가 이미 멈춘 지 오래고, 지금까지는 그 잔열로 어찌어찌 움직여 온 기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그것마저 다 식은 것 같은데.’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나머지 유조는 추방소장 겸 수석집행관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기상 시간을 넘겨 누워 있었다. 어차피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누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올 것도 아니니 오늘은 좀 더 이불 속에 있기로 했다. 이불을 걷어내어 지금 몸을 덮고 있는 얇디얇은 온기를 벗겨내면, 다시는 온기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리란 이상한 불안감이 떠나질 않았다. 유조는 삐져나온 발을 이불 속으로 힘들여 끌어다 넣었다. 발이 온기에 닿자 자기도 모르게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 이대로 조금만 있자. 여기는 추방소이고 나는 이곳의 소장 겸 수석집행관이다. 폐쇄가 결정된 이래 다른 직원은 전부 복귀했고 지금은 나 혼자 뿐이다. 그러니까 여기는 내 세상이고, 나는 여기서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경보가 울렸다. 유조의 훈련된 몸은 방금 전 헛생각 따위 모른다는 듯이 자동으로 일으켜졌다. 이불이 흐트러지자 그 속에 있던 온기가 주위의 찬 공기에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누워 있던 2층 숙직실에서 맞은편 통제실로 건너간 유조는 메인 패널의 경보 스위치를 끄고, 스크린에 올라온 탐지 내용을 확인했다. 소형 연락정 접근 중. 현재 동남 방향 약 15킬로미터 지점. 도착 예상 시간 8분.

뭔가가 잘못되었다. 폐쇄를 앞두고 대부분의 기능이 정지된 추방소에 누가 올 일이 있을 리 없었고, 있었다면 미리 귀띔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연락정이 일직선으로 날아오고 있는 방향은 추방소가 틀림없었다. 추방소 주위 사방으로 수백 킬로미터 안에는 다른 인공 구조물이 없었다.

유조는 도심에 있는 교정본부에 긴급 연락을 시도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신호가 가고 있으니 통신망은 정상이었다. 격오지 시설인 데다 문도 닫게 생겼으니 더 이상 볼 일 없다는 건가. 유조는 다섯 번을 더 시도하고 단념했다. 경보가 다시 울리며 연락정이 5분 뒤에 도착한다고 알렸다. 유조는 버튼을 내리쳐 경보를 꺼 버리고, 통제실 한구석에 있는 무기고를 열었다. 안쪽은 소총 한 자루와 곤봉 한 자루씩 말고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유조는 소총을 장전하여 어깨에 걸고, 곤봉을 허리춤에 매달았다.

연락정은 추방소 정문을 50미터쯤 남기고 멈췄다. 왼쪽 출입구가 열리고 한 사람이 내렸다. 화면을 확대하여 얼굴을 보니 40대 초반 정도의 외모였다. 짊어진 등짐이 제법 커다랬다. 유조는 헤드셋을 쓰고, 정문이 똑바로 내려다보이는 통제실 창문을 살짝 열었다. 소총을 창밖으로 내밀어 낯선 방문자를 향해 조준했다.

추방소 정문 위쪽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유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지하라.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한다.”

방문자는 걸음을 멈추고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혀라. 5초 준다.”

“‘센트리(Sentry)’의 서문산정 기자라고 합니다. 추방소장님과 인터뷰 약속이 돼 있어요.”

“그런 일정은 없다.”

“교정본부에서 연락이 안 갔어요?”

“불필요한 말 접고 제대로 신분과 목적을 밝혀라. 밝힐 수 없으면 왔던 길 그대로 돌아가라. 불응하면 사살하겠다.”

“본부에서 확인서를 내 줬어요. 가슴 주머니에 있으니까 지금 꺼낼게요.”

유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문자는 조심스럽게 왼손을 내려,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서 작은 개인용 패드를 꺼냈다. 그가 패드를 추방소 쪽으로 향하자 디스플레이에 확인서 양식이 나타났다. 유조는 통제실 패널 스크린에 표시된 ‘양식 확인’ 메시지에 당황했다. 폐쇄 명령이 내려온 이래로, 교정본부에서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규정으로 정해진 정기 연락조차 없었다. 조금 전 이쪽에서 걸었던 긴급 연락도 묵살되었으니 확인서에 대해 물어볼 방법이 달리 없었다. 방문자가 제시한 확인서는 적어도 시스템상으로는 정식 발급된 것이 확실했다. 유조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는 동안 방문자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거 꽤 성의 있게 준비한 인터뷰거든요. 추방소라는 게 도시령에서 여기 한 곳 뿐이잖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문을 닫게 됐으니 저도 직업의식이 발동하지 않겠어요? 짤막하게라도 좋으니 한마디만 해 주세요. 도심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아시잖아요. 네?”

잠시 후,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추방소 정문이 열렸다.

2

자신을 기자라고 밝힌 방문자 서문산정은 추방소 본관에 들어서자마자 얼굴을 겨눈 총구에 맞닥뜨렸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총구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야 했다. 유조는 산정의 몸과 등짐을 수색한 다음, 1층 본관 출입구 바로 안쪽에 있는 접견실로 밀어 넣었다. 그는 산정이 접견실 안쪽 책상 앞에 설 때까지 소총을 내리지 않았다.

“어째 바깥보다 더 춥네요.”

산정이 양팔을 문질러댔다. 유조가 산정을 들이고 나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난방이 끊긴 지 좀 됐어요.”

“보조 동력도 없어요?”

“직원들이 나가면서 다 떼어 갔어요.”

“아니, 그럼 같이 가시지, 왜 이 냉골에 혼자 남으셨을까. 실은 그게 인터뷰하러 온 이유지만요.”

유조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대답했다.

“정리할 것도 아직 있고… 밀린 휴가를 절반쯤 썼어요. 여긴 한 번 들어오면 오랫동안 나갈 수 없으니까 휴가가 많이 쌓였죠. 어쨌든 문을 닫을 때까진 누가 있어야 하니까.”

산정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일부러 추위와 고독을 찾는 휴가라. 하긴 그 두 가지가 여기 명물이라면 명물이겠죠. 다음엔 어디로 가시죠? 본부? 아니면…”

유조는 산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무게가 막 느껴지려던 참에 유조가 말했다.

“시작할까요?"

산정은 등짐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유조는 소총과 곤봉으로 무장한 상태 그대로였다. 카메라 삼각대를 놓던 산정이 소총을 흘끗거렸다. 유조는 산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산정은 유조의 시선과 마주치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면서 카메라 앵글을 잡았다.

“자, 이제 들어갑니다.” 산정의 얼굴이 일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함과 직책을 알려 주실까요?”

“황서유조. 추방소장 겸 수석집행관.”

“소장님. 추방소가 폐쇄된다는 통보를 받고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유조의 대답에는 약간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특히나 요즘 같은 때는.”

“재소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죠?”

“비우기 전까지 한동안 공실이 생겼던 적이 없어요.”

“추방소는 가두기보다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내보내는’ 곳이잖아요?”

“도심에서 워낙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가끔 입소와 집행 사이의 시차가 짧을 때가 있긴 해요. 오늘 들어와서 내일 나가는 식으로. 그렇지만 대부분은 얼마간 대기해야 합니다.”

“그 시차가 근년 들어 변하는 추세였나요?”

유조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잠깐 뜸을 들였다.

“그런 것 같아요. 재소자들은 더 많이 들어오는데 여기 인원은 변함이 없으니까, 병목현상이 생긴 겁니다. 폐쇄 명령을 받고 나서도 여길 싹 비우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어요. 확실히 알려면 기록을 살펴봐야겠지만.”

“‘비운다’는 건 추방을 뜻하는 거겠죠?”

“그렇기도 하고, 도심과 기타 지역 형무소로도 많이들 보냈어요.”

“이 추방형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반대 여론이 있어 왔습니다. 근래 시위가 빈발하면서 성토하는 목소리가 더욱…”

유조가 산정의 말을 끊었다.

“그런 무지렁이 같은 자들까지 인도적인 방법으로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방법은 달리 찾기 힘들겠죠. 나야말로 반대하고 싶군요. 계속 해야 하지 않느냐고.”

산정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방금 ‘인도적’이라고 말씀하셨나요?”

“인도적이죠. 추방만큼 인도적인 형벌은 없습니다.”

“그건 어폐가 있는 말씀 아닌가요? 수형자의 목숨을 빼앗지 않으면 곧 인도적이라는 건가요? 대신 몸을 온전치 않게 만들어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보내 버리는 데도요?”

유조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이런 데 오는 자들이 온전할 리가 없잖아요. 시민의 권리를 스스로 저버렸거나, 아예 그런 걸 타고나지도 못한 인간들이.”

산정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시민의 권리를 타고나지 못했다는 건 선천적으로 번식할 수 없는 이들을 가리키시는 건가요?”

유조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당연하죠. 번식도 못하는 자들이 무슨 시민입니까?"

“번식률이 위험 수준으로 낮아진 것도 사실이고, 그만큼 도시의 기능부전이 심각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시정은 모든 시민이 예비검사를 거쳐 번식 가능 여부를 증명하도록 강제하고 있어요. 검사 결과 번식 불가능 판정을 받으면 그 순간부터 시민권이 박탈됩니다. 가혹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유조의 언성이 높아졌다.

“봅시다. 당신도 기자니까 지난해 번식률이 얼만지 정돈 알잖아요? 마이너스예요. 그나마 번식 시술이 보급되고 있으니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거죠.”

“그 번식 시술 말인데요. 많은 시민들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효과가 완전히 검증되지 않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거죠. 도심에서 반대 시위는 일상이 된 지 오래예요. 시청과 중앙보건소는 물론이고, 웬만한 공공장소도 검문 없이는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반대자들이 퍼뜨린 조작설에 현혹되기나 하고. 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부작용이 있다느니 어쩌느니. 알 만큼 알 사람들이.”

“번식 시술과 예비검사가 도입된 지 3년이 지났지만, 번식률에 유의미한 개선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이너스로 떨어져 왔죠. 반면 시술과 검사로 피해를 겪는 시민은 늘고 있어요. 사망자도 있습니다. 본 시술뿐만 아니라 예비검사부터 문제가 생기고 있어요.”

순간 유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산정이 카메라를 슬쩍 곁눈질했다. 제대로 기록되고 있었다. 산정이 말을 이어 갔다.

“예비검사 자체가 힘겨운 건 차치하고서도 말이죠. 지난 3년 동안 증언과 자료가 꽤 많이 쌓였습니다. 온몸의 체액을 빼내고 대체 용액을 주입한 채로 몇 시간 동안 검사를 거치는데, 엄청난 고통이 동반되죠. 지병이 있거나 허약한 사람은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기도 합니다. 무사히 검사를 마치더라도 한동안 후유증이 남고요. 피부가 하얗게 변해서 몇 달을 가는 외모 변화부터 시작해서 빈발하는 각종 통증, 심각한 내출혈, 면역 상실 등 지금도 새로운 부작용과 후유증이 계속 보고되고 있어요. 검사 도중이나 이후에 일어나는 사망률이 25퍼센트에 달한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시영 언론은 일절 보도를 하지 않아요. 번식 시술과 예비검사에 부정적인 여론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저희 같은 독립 언론사가 열심히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보세요. 열 살짜리 애들도 씩씩하게 받는 검사란 말입니다. 안 그러면 그렇게 어린 나이부터 받으라고 정해 줬겠어요? 죄 엄살이고 날조예요. 번식 시술을 받다가 부작용이 생기거나, 그래요, 막말로 죽을 수도 있다고 칩시다. 한데 예비검사부터? 말도 안 돼요. 내 주위에서 그런 사람 본 적 없습니다.”

산정은 한숨을 쉬었다.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네. 예비검사도 본 시술도 옵션이 여러 단계로 나뉘니 당연하겠죠. 보험금을 내는 액수만큼요.”

질문은 계속되었다.

“지난주 중앙보건소 앞에 모인 시위대 보셨죠? 주최 측 추산으로는 10만 명이라고 합니다. 반대하는 시민들은 번식 시술뿐만 아니라 예비검사까지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시정은 시민권 침해행위를 강압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어요. 번식 여부만으로 시민권을 박탈하는 건…”

마침내 유조가 짜증을 냈다.

“지금 상황이 그렇잖아요? 우리는 성별 구분도 없고, 모두 단성으로 번식합니다. 그런 도시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2세를 낳지 못하기 시작했어요. 더 나아가 낳을 수 있는 사람들도 싫다고 갖은 수를 써요. 무슨 일이 생깁니까? 도시가 늙어 허덕이면서 죽어 가잖아요? 몇 주 전엔 도심에서 통근열차가 탈선해서 80명인가가 죽었죠? 기관사 나이가 얼마라고요? 103세? 무덤에 들어가 있어야 할 양반이 열차를 몰았다는 거 아닙니까? 몸 써서 일하는 사람들이 전부 그런 노인네들인데 도시가 얼마나 더 버틸 것 같아요?”

산정은 묵묵히 유조의 말을 받았다.

“한데 뭐요? 시민권 침해? 지금은 비상입니다. 앞으로 5년, 아니, 3년 이내에 일정 이상 번식률을 올리지 않으면 도시는 무너지고 말 거예요. 시국이 이런 데도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이나 하면서 내란 일으킬 작당이나 하고 있고!”

산정은 유조의 말이 끝나자 잠시 침묵했다.

“소장님. 여기서도 도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지켜보고 계신다면, 그 중앙보건소 시위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아시겠네요.”

“웬 정신 나간 애송이가 보건소장을 만난답시고 쳐들어갔다가 붙잡혔잖아요. 면담으로 젊은 세대의 입장을 전하고 싶다나 뭐라나. 그런 놈이야말로 여기 데려와서 추방해 버려야 하는데, 문을 닫게 됐으니 정말 아쉽군요.”

갑자기 유조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으니까 지금 보내려면 보내던지요.”

3

유조가 낯선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본 순간 산정이 책상으로 몸을 날렸다. 산정은 책상 위를 굴러 건너편으로 넘어가면서, 유조가 자기 쪽에 가깝도록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소총을 빼앗았다. 이번에는 유조가 총구가 이끄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신세가 됐다.

일행은 유조를 2층 통제실 한쪽 구석으로 옮겼다. 양쪽 발목과 무릎, 몸통과 양팔이 의자와 함께 테이프로 단단히 감겼다. 맞은편에 두 사람이 있었다. 산정은 메인 패널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이 유조를 응시하며 서 있었다. 앳된 얼굴은 아무리 쳐준대도 10대 후반을 넘었을 것 같지 않아 보였고, 작은 몸집은 어린 아이와 성인의 중간 정도였다. 유조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싸늘했다.

산정이 유조 쪽으로 고개를 돌려 이죽거렸다.

“소장님. 마지막 질문이 꽤 셌지요?”

패널에서 일어난 그가 앳된 사람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이쪽은 박연수.”

유조는 그가 누구인지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산정이 미소를 지었다.

“교정 당국에선 이미 유명인사인데 말이죠. 당신은 ‘애송이’라고 했지만.”

유조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앳된 사람, 즉 박연수는 지난주 도심 중앙보건소 앞에서 열린 대규모 시위에서 보건소장 면담을 앞장서 요구했던 인물이었다. 그를 체포하려던 경찰과 막으려던 시위대 사이에서 사투에 가까운 충돌이 벌어졌고, 애송이의 얼굴은 시영 언론을 타고 도시령 전체에 알려졌다.

연수는 유조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목소리였다.

“우리를 좀 도와 주셔야겠어요.”

유조가 되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누가…?”

연수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우릴 도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유조가 냉랭하게 대답했다.

“너희 같은 불온분자를 내가 왜? 남들 다 하겠다는 일 싫다고 데모나 하는 놈들을 내가 왜 도와 줘야 해?”

제 딴엔 윽박을 지른다고 생각했지만, 유조는 의자에 단단히 묶여 있는 몸뚱이를 보기 거북하게 옴찔거릴 뿐이었다.

“멀쩡한 시민들을 선동해서 시정에 불복하고, 가뜩이나 어려운 도시를 망가뜨리는 너희들을 내가 왜?”

연수는 유조가 내던지는 말을 차분하게 받고 있었다. 유조는 연수 같은 애송이가 뭣 때문에 저렇게 냉정한 얼굴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 궁금증은 유조가 지금 이 상황을 버티는 힘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몸속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미열마저 완전히 식은 듯, 유조는 가슴에 냉기가 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럴수록 발악하듯 언성은 높아졌고 말투는 거칠어졌다.

“내부에서 도움을 받았겠지. 교정 당국이라고 너희들과 내통하는 썩은 놈들이 없겠어?”

‘썩은 놈들’이라는 표현에 연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유조가 윽박질렀다.

“일이 제대로 돌아갔다면 넌 벌써 모가지가 날아가고도 남았겠지!”

“네, 원래는 그렇게 됐어야 했나 보죠.”

연수가 갑자기 받아쳤다.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원래는 도심 형무소로 끌려가서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극형을 선고받았겠죠. 지금쯤 시민권을 빼앗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땅속에 파묻히거나 온몸이 갈려서 비료가 돼 있을 텐데요. 하지만 나도 산정도 처음부터 그렇게 끝날 생각은 없었어요. ‘썩은 놈’ 몇이 힘을 빌려주기도 했고.”

“그 중 한 사람은 정말로 목숨을 바쳤어요.” 산정이 끼어들었다. 그는 연수의 어깨에 손을 올려 진정시켰다.

“호송 요원이 우리 의도에 공감해 줬었어요. 도중에 다른 요원들을 제압하다 중상을 입었죠.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면서 연락정을 끌고 온 겁니다.”

연수의 눈에 어린 원망이 유조에게 전해졌다.

“다음은 당신 차례예요.”

연수가 말했다. 유조는 두 눈을 부라리며 연수에게 대들었다.

“뭘 어쩌려고? 문 닫는다고 이것저것 다 떼어 가서 아무 것도 없어, 여기는. 빈 건물하고 나 혼자뿐이야.”

산정은 유조의 말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투로 물었다.

“그래도 소형 로켓 정도는 쏘아 올릴 수 있잖아요?”

“연료가 있어야 쏘아 올리던지 할 거 아냐! 여긴 난방도 안 된다고!”

연수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들은 이야기는 그게 아니었어요.”

“뭐라고?”

“여기라면 셋째 위성까지는 갈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보다 훨씬 더 멀리도 보낼 수 있지만, 남아 있는 연료로는 거기가 한계일 거라고요. 그 정도만이라도 가면 우리도 다음을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건물 비우면서 예비 동력까지 다 들어냈어! 나 한 사람 겨우 살 수 있게만 해 놨다고!”

연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지금 시간에 쫓기고 있는데, 당신은 거짓말만 하고 있어요.”

연수가 산정을 향해 눈짓하자 그가 곧장 통제실 밖으로 나갔다. 유조가 당황하며 물었다.

“뭘 하려는 거야?”

“미안해요.”

몇 분 뒤 산정이 통제실로 돌아왔다. 두 손으로 양동이를 들고 있었는데 옮기는 동작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양동이의 무게보다는 그 안에 든 것을 의식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양동이를 들여다 본 연수가 한구석으로 멀찍이 떨어졌다. 유조는 설비실에서 가져 온 양동이임을 대번에 알아챘다.

“아니야.”

구석에서 연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마지막으로 부탁할게요. 우리가 셋째 위성에 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안 돼.” 유조의 시선은 양동이에 담긴 것에 붙들린 채 꼼짝 못했다. “그러지 마.”

연수가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린 뒤 산정에게 지시했다.

“해.”

유조의 비명이 통제실에 울려 퍼졌다. 산정이 양동이에 담긴 물을 유조의 정수리부터 끼얹었다.

4

유조는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채 기진맥진해 있었다. 고개가 가슴팍 위로 푹 꺾였고, 이따금씩 팔다리가 경련했다. 체질적으로 액체에 강렬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시민들에게 물은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 하나였다. 지금 유조에게는 고통의 원인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정신을 찾아 가던 그가 고개를 들자 얼굴 위에 온통 하얀 금이 그어져 있었다. 서늘한 흰색으로 번들거리는 금은 물줄기가 흘러내린 길과 일치했다. 물기가 말라 가는 부분은 원래 피부색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하얀 유조의 얼굴을 본 산정이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중얼거렸다.

“정말이었어.”

연수가 산정의 말을 이었다.

“예비검사에 불합격한 거야.”

턱이 가슴팍에 닿은 상태로 말하느라 유조의 머리가 우스꽝스럽게 흔들거렸다.

“그래. 이제 속이 후련해?”

연수는 넌덜머리가 난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차라리 그러고 싶네요. 번식을 못하면 시민이 아니라고 일갈하던 사람이 실은 자기도 그렇다는 걸 알았을 때 기분이랑,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기분이 얼마나 비슷할지 궁금할 뿐이에요. 예비검사에 불합격하고도 시민의 권리를 계속 누리고, 추방소장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기록을 조작하고 주위 사람들을 매수했겠죠. 설마 이 정도로 끝나리라 생각하진 않겠죠? 본부에서 언제쯤 알게 될까요?”

유조가 피식 웃었다.

“너희들이라고 뭐 다를 것 같아? 너희들이 매일 같이 하는 데모가 뭣 때문인데? 번식은 시민의 의무야. 하기 싫어도 다 해야 하는 거라고. 한데 너희들은 날조한 내용으로 시민들을 선동하면서 의무 회피를 정당화했어. 난 공복으로 공무에 종사하고 있기라도 하지. 너희들은 뭐야? 패악질이나 해 대는 너희들은 죄 가짜야!”

연수가 맞섰다.

“시정은 시민권을 볼모로 우리 목을 조르고 있어요. 시민권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어요. 그러니 목소리를 내고 싸워서 되찾아야만 하는 거고. 그게 그렇게 불온한 일인가요?”

“시민권? 2세도 못 가지는 껍데기들이 무슨 시민권이야. 너 몇 살 때 검사 받았어? 결과는 당연히 ‘불가능’이겠지!”

연수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유조의 얼굴이 일순 굳어 버렸다. 연수는 유조에게 처음으로 응어리진 말을 내쏘기 시작했다.

“너야말로 그 잘난 시민의 의무를 제 발로 저버렸잖아. 무슨 면이 있다고 공복으로 남겠다는 거야? 일이 즐겁고 보람차서 그럴 리는 없겠지. 우리가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마. 너도 도망가려는 거잖아? 번식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번식을 일생에 한 번만 했다는 이유로 시민권을 잃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당하는지, 어떻게 사회에서 내쳐지는지, 너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들의 목숨을 몇 명이고, 몇 십 명이고, 몇 백 명이고 지워 왔잖아? 너한텐 껍데기니 뭐니 말할 자격도 없어.”

“나는…”

유조도 받아치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신 고개가 절로 떨어졌다. 산정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덧붙였다.

“우리가 들은 이야기는 이래요. 소장 당신은 예비검사 결과를 숨기고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죠. 하얗게 변한 피부색을 약물로 가리는 유치한 짓까지 해 가면서요. 하필이면 그 즈음 교정 당국이 추방소를 폐쇄하겠다고 결정했죠. 반대 시위가 예상 이상으로 격화되고 있었으니까. 여기는 격오지라서 본부의 통제력이 약하고, 당신은 소장이니 마음먹고 뭔가를 하려면 할 수 있는 환경이예요. 그렇지만 당신은 본부 소속이라 여기가 문을 닫으면 일단 도심으로 복귀했다가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을 거고, 그러면 다 끝장이겠죠. 나라도 추방소가 폐쇄되는 날까지 악착같이 버티고 싶을 걸요. 물론 폐쇄일이 지나고도 당신은 본부에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그 전에 모습을 감춰 버릴 테니까. 우리는 당신이 써먹으려던 기회를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했어요. 우리 나름대로 앞이 안 보였으니까.”

유조는 산정을 비웃었다.

“너희들은 추방소가 왜 폐쇄되는지도 알겠지?”

“시민들은 시술과 검사가 도입된 뒤로 3년을 싸워 왔어요. 번식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자 시정의 대응은 그만큼 강경해졌고, 우리는 우리대로 더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어요. 시위 진압은 갈수록 무자비해졌고, 체포되고 처벌받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났죠. 비례해서 재소자 수도 그랬고요. 이제 시정은 절차가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드는 추방 대신 극형으로만 반대 세력을 다스리기로 했어요. 도시에서 내쫓는 것조차 귀찮으니 전부 다 갈아서 비료로 만들기로 한 겁니다.”

“그래. 시정은 너희들을 더 이상 인도적으로 대하지 않을 거야. 대체 번식 시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사람들이 2세를 갖지 못하는데 달리 뭘 어떡해야 해? 일생에 한 번만 하는 번식도 이제는 다들 못하고 있고, 안 한다고 하고. 도시는 노인들로 가득해. 번식 시술은 희망이야. 선천적으로 번식을 못 하지 않는 이상, 시술만 받으면 몇 번이고 번식할 수 있게 해 주잖아? 그게 그렇게 불만이야?"

연수가 유조의 말을 받았다.

“시민 대부분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신체 활동일 뿐이야. 일생에 단 한 번. 시기를 조절할 수도 있고 막을 수도 있어. 어느 쪽이든 그건 시민 각자의 선택이고 존중받아야 해. 평생 번식을 경험하지 않는 시민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열등한 것도 아니야. 모두가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선택해서 살아 가. 지금 시정은 이 모든 것에 강제로 손을 대고 있어. 신체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시술로 번식을 여러 차례로 늘리고, 예비검사로 번식 불가능 판정을 받으면 시민권을 빼앗아. 번식을 경험하지 않는 시민들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시민이 아니게 되어 버려.”

산정이 끼어들었다.

“번식을 경험하지 않는 시민들은 우리 세대도 이제야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어요. 연수 세대는 그런 이들이 더 많고 서로 자연스러운… 아니, 우리 세대에도, 그 이전에도 계속 존재했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니 없다고 착각했던 거였죠. 시정은 그런 현실도 애써 부정하고 있어요. 우리들이 2세를 갖지 못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건 물론 중요하지만, 시정이 그 문제에 도그마처럼 몰두하는 건 잘못이예요. 번식률을 올리겠다면서 번식을 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고 있잖아요. 그리고 번식은 신체에 엄청난 부담을 초래해요. 번식기에 거치는 변화는 그 후에도 상흔을 남깁니다. 단성생식을 하면서도 체외 인큐베이팅 기술이 발달한 이유가 뭐겠어요? 그것도 형편이 되는 시민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만. 그렇게 못하는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번식을 몸소 경험해야 해요. 어쩌면 우리의 신체는 번식을…”

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시정은 이렇게 된 바에 차라리 모두 함께 자멸해 버리자고 하는 것만 같아요. 할 수 있는 한 가장 끔찍한 방법을 써서. 그러면서 번식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라는 역겨운 선전만 거듭하고 있죠. 대다수 시민이 일생에 한 번 번식한다는 것만이 정상이고 축복이라면, 어떤 이유로든 그렇게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대체 뭐죠? 번식을 정상이자 표준으로 보는 시각 자체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건 우리가 가진 많은 형질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게 점차 사라진다는 것은…”

유조가 투덜거렸다.

“그런 거 하나쯤 더 심는 게 뭐가 잘못이야?”

산정이 되받았다.

“시정은 사망자까지 내는 위험한 예비검사와 시술을 개선하지 않고 오히려 강제하고 있어요. 재정난 때문이라면서. 그 재정난이 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유조가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

“너희들이 잠자코 있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겠지.”

연수가 유조에게 다가서며 검지를 내밀었다.

“‘너희들’이 잠자코 있었다면 내가 지금 여기 있지도 않았을 거야.”

유조는 연수를 응시했다. 표정에 약간의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연수가 말을 이었다.

“내 양육자는 나를 낳는 걸로 살면서 할 번식은 다 했어. 그렇지만 시정은 다시 낳아야 한다고 끌고 갔지. 예비검사 후 부작용이 생겼어. 체액을 전부 빼내고 나면 당신처럼 온몸의 피부가 하얗게 변해. 어떤 사람은 그냥 그걸로 끝나고, 어떤 사람은 원래 색깔로 돌아오기도 해. 내 양육자는 아니었지. 체액을 빼낸 후유증으로 검사 도중 파괴된 면역체계가 복구되지 않은 거야. 그 모습은 당신 같은 사람은 상상조차 못 해.”

산정이 팔로 연수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나의 소중한 사람은 당신이 직접 죽였죠.”

그 말에 유조가 산정을 쏘아보았다.

“시술과 검사가 의무화된 지 반 년 만에 갖가지 부작용과 사망 사례가 폭로된 건 당신도 알 겁니다. 그걸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사람은 내 바로 위 편집장이었어요. 바로 당신이 여기서 추방형을 집행했지요. 그분이 어떻게 되었는진 당신도 모를 거예요. 추방된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금세 잊혀지니까. 난 편집장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분이 남긴 일을 계속 이어가는 게 내가 그분을 잊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어요. 이젠 어렵게 됐지만.”

유조는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산정이 말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도 그 훌륭한 시민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됐군요. 무지렁이 껍데기임이 드러난 공복을 시정이 과연 어떻게 취급할까요? 당신이 그렇게 인도적인 형벌이라고 칭찬했던 추방형도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요. 당신에겐 뭐가 남을까요?”

연수가 나섰다.

“우리는 목소리를 내야만 했고,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고 말해야만 했어.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거야. 계속 목소리를 내어 말할 거야. 그러려면 우리는 살아야 해. 살아서 기회를 만들어 가야 해. 지금은 너도 우리와 다르지 않아. 그러니까 함께 살자. 그게 속죄이건 뭐가 되었건 살아서 이다음을 해 나가자고. 우리를 도와 줘. 부탁할게.”

연수가 왼손을 펴서 유조에게 내밀었다. 유조는 고개를 들어 연수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 위로 온갖 감정과 생각이 흘러가다가, 마침내 말이 되어 흘러나왔다.

“난 평생 번식이란 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어. 2세가 생기면 생기는 거고, 안 생기면 안 생기는 거고. 번식기가 되었을 때 내 몸이 어떻게 될지 별로 상상해 본 적도 없어. 되어 봐야 아는 것일 테니까. 그래도 지금까지 내 삶엔 그리 큰 문제가 없었어. 난 공복으로서 잘나갔고 그만큼 열심히 노력했어. 3년 전 의무화가 되고 나서도 번식은 남의 일일 뿐이었고, 난 나대로 범죄자들을 도시에서 내쫓느라 바빴어. 이 나이가 되니 안 하고 그냥 넘어가려나 싶기도 했어. 한데 두 달 전에 갔던 병원에서 처음부터 안 되는 몸이라고 하더군. 그리고 시정에선 그게 안 되면 내가 시민이 아니라고 할 거고.”

연수가 물었다.

“너처럼 자기 몸에 관심이 없는 인간이 있었다니. 다른 사람들이 번식 때문에 어떤 일을 겪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해.”

“그래. 난 관심 없었어. 그리고 지금이라고 너희들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내가 아는 건 시민은 시정을 따라야 한다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겐 미래가 없어.”

유조는 연수에게 증오 어린 눈길을 던졌다. 연수가 그것을 맞받으며 말했다.

“동료 시민들을 이해하지 않으려 하고, 관심조차 갖지 않으려는 너 같은 자들 때문에 모두가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5

경보가 울렸다. 유조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연수와 산정의 시선이 서로 만났다. 유조가 거칠게 내뱉으며 발을 굴렀다.

“염병할!"

연수가 유조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 한 번 왼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할 거야?”

유조가 대답했다.

“날 풀어 줘.”

연수와 산정이 유조를 묶은 테이프를 끊어내는 데 5분이 걸렸고, 경보는 그동안 계속 울려댔다. 마침내 몸이 자유로워진 유조가 패널로 달려가 경보를 끊었다. 스크린에 무장 경찰정 7대를 잡은 화면이 떠 있었다. 경로는 추방소를 향해 직진 중. 도착 예상 시간 약 15분. 유조가 뒤를 돌아보며 연수와 산정에게 말했다.

“너희들을 쫓아온 거야.”

산정이 응수했다.

“우리뿐일까요? 지금이라면 체포해서 다시 집어넣느니 여기서 죄다 사살해 버리는 게 낫겠군요.”

유조가 비아냥댔다.

“잘 알고 계시네. 너희는 탈주범 신분이야. 사살 명령이 떨어져 있겠지. 맨 왼쪽에 있는 좀 더 큰 경찰정 보이지? 저기엔 비료 만드는 기계가 실려 있을 걸.”

산정이 휘파람을 불었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굳어 보였다.

유조는 뭔가를 잠깐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따라와.”

세 사람은 지하 5층에 멈춰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맞은편은 널찍하고 둥글게 패인 공간이었다. 중심에 심우주 항행용 캡슐이, 그 양옆으로 관련 기자재가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캡슐 뒤쪽으로는 지하 발사대로 이어지는 터널이 보였고, 캡슐을 운반하는 궤도가 터널을 따라 뻗어나가 있었다. 유조는 오른쪽 끝에 있는 커다란 금고 같은 구조물로 다가가 문을 밀어 열었다. 안쪽에서 하얀 기체가 쏟아져 나왔다. 기체가 어느 정도 걷히자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투명하고 갸름한 물체였는데 마치 커다란 동물이 탈피를 하고 남긴 껍데기를 잘 정돈해 놓은 것 같았다. 유조가 연수와 산정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손 좀 빌릴까.”

투명한 껍데기는 의외로 무거워서 세 사람이 제법 힘을 들여야만 했다. 연수와 산정은 유조의 지시로 그것을 항행용 캡슐 바로 아래 바닥으로 운반했다. 유조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게… 유기 튜브야.”

산정이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추방형의 핵심이군요.”

연수는 말없이 그 물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기 튜브는 추방형에 없어서는 안 될 도구였다. 추방형은 단순히 수형자를 다른 행성으로 내쫓아 버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 본격적인 추방에 앞서 집행관은 호흡기를 연결한 수형자를 유기 튜브에 넣어 봉인하고 특수한 생용해액을 주입한다. 액체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시민은 생용해액에 잠겨 극심한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는다. 유기 튜브가 생용해액으로 완전히 채워지면, 심우주 항행용 캡슐에 옮겨 싣고 이를 다시 소형 로켓에 실어 대기권 밖으로 날려 보낸다.

캡슐이 로켓에서 배출되어 유형지로 향하는 동안, 유기 튜브 속에 갇힌 수형자는 미리 프로그램된 임의의 생물로 서서히 변화한다. 튜브 자체도 수축하여 수형자의 육체에 밀착, 새로운 생물의 외피가 된다. 이때 육체의 변화가 정신의 그것을 앞지르므로, 수형자는 유형지에서 낯선 생물의 육체에 갇힌 채 혼란에 빠져 미치거나 죽어 가게 되는 것이다. 설령 이질적인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는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수형자는 자아를 잃고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모해 버린다.

유조는 추방형을 가장 ‘인도적인 형벌’이라고 말했으나, 실상은 극형 이상으로 시민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가학적이고 혹심한 형벌이었다. 유조는 그것을 오랜 세월에 걸쳐 몸소 집행해 온 장본인이었다. 아울러 추방형은 필요 이상으로 절차가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드는 형벌이었다. 비용의 상당 부분은 유기 튜브의 도입과 관리에 조달되었다. 이 기괴한 형벌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튜브는 수형자가 유형지에 도착할 때까지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제조 기술과 설비를 갖추지 못한 도시는 같은 태양계에 속한 다른 행성에서 튜브를 들여와야 했다.

세 사람은 유기 튜브 앞에 얼마간 말없이 서 있었다. 투명하고 아무 것도 아닌 듯한 이 물체가 담은 함의를 서로의 입장에서 곱씹는 듯했다.

다시 경보가 울려 경찰정이 도착하기까지 5분도 안 남았다고 알려 왔다. 유조가 연수와 산정에게 말했다.

“이걸 남겨 놓느라 신경을 엄청나게 써야 했지. 별짓을 다 했어.”

산정이 조소하며 대꾸했다.

“난방이 안 되는 것도 알만하네요. 가용한 동력을 몽땅 이리로 돌렸을 테니까.”

유조가 맞서서 비웃었다. 자조에 가까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유기 튜브는 온도 유지가 제일 중요해. 어떤 의미로는 살아 있는 거거든.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야.”

연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다 못 가는구나.”

유기 튜브는 세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가 못 됐다. 어리고 몸집이 작은 연수를 포함한 두 사람이라면 어찌어찌 몸을 구겨 넣을 순 있어 보였다. 산정이 물었다.

“공기는 얼마나 있죠?”

“충분하진 않지만 셋째 위성까진 갈 수 있을 거야. 호흡을 옅게 하라고. 다들 학교에서 배웠잖아?”

유조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여기 생용해액은 주입하지 않는 거죠? 어디까지나 탈출용이니까.”

산정이 물었다.

“미쳤어? 멀쩡한 사람이 들어가 있는데 그걸 집어넣었다간…”

연수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여기 들어갔던 사람들 가운데 멀쩡하지 않은 이는 없었어.”

“제기랄, 그만 좀 해!”

유조가 투덜거렸다.

“너, 연수는 아직 어려. 그러니까 너만은 반드시 탈출해서 훗날을 만들어 가야겠지. 나랑 여기 기자 선생님은 사정이 좀 다르지만.”

유조가 산정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해 두라고. 어떻게 할 건지 의논들을 해 봐. 난 저놈들을 상대하면서 시간을 벌게. 너희들은 튜브를 캡슐 안으로 옮겨서 케이블을 연결해 놔. 참, 항로 설정할 줄 알아?”

산정이 대답했다.

“내가 하면 돼요.”

“그럼 수고들 하라고. 얼마 안 걸릴 테니까 빨리빨리들 움직여.”

유조의 표정에 처음으로 활기 비슷한 것이 감돌았다. 그 얼굴을 본 연수의 가슴속을 뭔가 서늘한 것이 스쳐갔다. 유조는 말을 마치자마자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연수와 산정은 엘리베이터가 지상으로 올라가며 내는 기계음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6

통제실로 돌아온 유조는 스크린으로 바깥 상황을 확인했다. 경찰정 7대는 이미 추방소 부근에 멈춰 서서, 옆구리로 무장한 진압경찰관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신속히 대형을 잡아 가는 그들의 숫자는 적게 잡아도 30명은 되어 보였고, 아직 경찰정에서 내리지 않은 인원도 적지 않을 터였다. 제일 앞쪽까지 접근한 인원들은 추방소 정문에서 70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유조는 선두에 있는 자의 제복에 달린 견장으로 그가 진압대장임을 알아보았다.

진압대장이 수신호를 보냈다. 뒤편에서 진압경찰관 한 명이 달려 나와 정문으로 향했다. 그는 정문 여기저기를 살핀 다음 대장에게 되돌아갔다. 대장은 그에게 몇 마디 듣더니 다시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뒤편에서 다섯 명이 더 달려 나와 앞선 하나와 합류했다. 그들은 정문으로 다시 접근하고 있었다.

유조가 메인 패널로 비상 프로토콜을 발동한 뒤, 첫 번째로 뜬 메뉴를 선택하려던 참이었다.

나직한 굉음과 함께 사위가 빠르게 어두워졌다. 동시에 패널 스크린에 무수히 빗금이 그려진 검은색 정사각형 경고 이미지가 나타나 깜빡거렸다. 진압경찰관들도 잠시 당황한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댔다. 유조의 얼굴에 화색이 돌다 금세 사라졌다.

“당연히 미리 대비를 했겠지.”

사방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이어 정수리 위로 우지끈 소리가 떨어져 내려왔다. 어두워졌던 바깥이 뿌옇게 흐려지며 어마어마한 양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조는 빗소리가 들리자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액체를 싫어하는 시민들은 물소리나 빗소리만 들어도 거슬려했다. 창문을 포함한 추방소 건물 전체가 방음 모드로 자동 전환되면서 빗소리를 포함하여 바깥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음을 차단했다.

빗줄기는 스크린에 떠오른 정문 바깥 광경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거셌다. 평범한 시민이 비를 맞았다면 그 자리에 쓰러져 몸부림을 쳤겠지만, 진압경찰관들은 훈련받은 자들답게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진압복에 내장된 방수막을 노출했다. 정문 폭파를 위한 준비 작업은 아무런 차질 없이 완료될 것이었다.

유조는 뒤돌아 통제실을 나서기 전에 비상 프로토콜 메뉴를 실행했다. 정문 구동장치에 설치되어 있던 폭약이 터졌다. 스크린으로 정문 양쪽 가장자리가 소리 없이 폭발하고, 진압경찰관 두세 명이 소리 없이 뒤로 튕겨나가는 모습이 중계되었다. 이것으로 정문을 폐쇄하는 한편으로 아주 조금 시간을 벌었다. 1층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유조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접견실로 들어갔다 나올 만큼만. 접견실 한구석에는 아까 그가 통제실로 돌아오다가 봐 둔 것, 즉 빼앗겼던 소총과 곤봉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애송이와 기자 선생은 너무나도 순진했던 것이다. 유조는 서둘러 소총의 장전을 풀고 총몸을 분해했다. 중심부만 남은 총몸에 부품 몇 가지의 방향을 바꾸어 다시 달자 권총이 되었다. 유조는 권총을 뒤춤에 넣고 상의로 내려 가린 다음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유조는 지하 5층의 광경을 재빨리 살폈다. 연수는 여전히 유기 튜브 앞에 서 있었고, 산정은 왼쪽 관제석에 앉아 패널과 씨름하고 있었다. 유조가 튜브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

유조의 목소리를 듣고 연수가 돌아보았다. 산정이 얼굴을 패널에 고정한 채 대답했다.

“항로 설정 중. 거의 다 끝났어요. 바깥은요?"

“금방 밀고 들어올 거야. 길어야 20분쯤 될까.”

유조가 대답했다. 연수는 유조의 모습을 보고 두 눈이 가늘어졌다. 유조가 갑자기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희 셋째 위성 가 봤어?”

연수와 산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 다 아직?”

침묵. 유조는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관제석 쪽으로 다가갔다.

“항로는?”

“조금만 기다려요.”

산정의 대답을 들은 유조가 연수 쪽으로 돌아섰다.

“아무래도 이건 우리 둘이 올려놔야겠네.”

유조가 아직 바닥에 놓여 있던 유기 튜브를 가리키며 말했다.

연수는 유조를 계속 쏘아보며 서 있다가, 천천히 유기 튜브 쪽으로 걸어갔다.

유조는 튜브를 들려고 허리를 숙이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세웠다. 그러고는 산정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기로 했어?”

산정이 유조를 돌아보았다. 유조가 연수 쪽으로 살짝 눈짓을 하자, 산정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의자를 돌려 두 사람 쪽을 향한 뒤 말했다.

“내가 남을 겁니다.”

“호오.”

유조가 연수를 잠깐 돌아보았다. 연수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지상에서 그토록 냉랭하고 단호하던 모습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산정이 말을 이었다.

“누군가는 방패막이 돼 줘야 하잖아요? 여유가 있으면 발사 버튼도 눌러 주고 말이죠.”

유조가 두 눈을 깜빡이며 턱을 오른쪽으로 살짝 틀었다.

“좋을 대로 하라고. 너희들끼리 결정한 거니까.”

유조가 연수를 향해 말했다.

“난 셋째 위성에 여러 번 가 봤어. 사냥하기 좋거든. 여기선 니라델 사슴이 보호종이지만, 거긴 지천이지.”

즐겁다는 듯 기억을 떠올리는 유조의 표정에 연수의 얼굴이 점차 싸늘해져 갔다.

유조가 튜브로 다시 허리를 숙였다. 연수도 힘을 주면서 튜브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패널 쪽으로 의자를 돌리려던 산정의 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나갔다. 그를 등진 채 주저앉아 튜브를 들어 올리던 유조의 뒤춤이 이상하게 불룩했다. 산정은 튀어나온 모양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유조의 뒤쪽으로 소리 없이 다가갔다.

유조와 연수는 튜브를 힘겹게 들어 올려 캡슐 쪽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연수의 두 눈이 유조의 등뒤로 접근하던 산정의 모습을 포착하자 돌연 흔들렸다.

그때 유조가 무심코 연수를 올려다보았다.

산정이 뒤춤에서 권총을 뽑자마자 유조가 돌아섰다.

두 사람의 손 네 개가 얽히면서 총구가 공중을 향해 솟아올랐다.

유조가 놓은 쪽 튜브가 바닥에 충돌하며 둔중한 굉음을 내었다. 연수도 튜브를 놓고 뒤쪽으로 물러섰다.

이윽고 권총 격발음과 튜브의 두 번째 굉음이 동시에 지하 5층을 울렸다.

7

분노가 유조를 틀어쥐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무지렁이 껍데기들을 상대하는 동안, 어느 시점엔가는 틀림없이 일어나리라 생각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유조의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몸싸움은 금세 끝났다. 권총을 빼앗은 유조가 손잡이를 쥔 주먹으로 이마를 후려갈기자, 산정은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연수가 쓰러진 산정에게 달려가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일어서!”

유조가 벼락처럼 소리 질렀다. 연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어느새 유조가 캡슐을 등진 채 서서 연수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연수는 싸늘한 눈길을 되찾아 유조에게 마주 내쏘았다.

건물이 가볍게 진동했다. 유조가 권총을 장전했다.

“얼른. 정문이 뚫렸단 말이야!”

연수는 끌어안았던 산정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유조가 명령했다.

“튜브 집어넣어. 시간 없어.”

유기 튜브는 세 사람이 겨우 들었을 만큼 무거웠다. 연수가 망설이자 유조가 재차 고함을 질렀다.

“빨리!”

심우주 항행용 캡슐은 바닥에서 1미터쯤 위에 설치된 궤도에 얹혀 있었다. 연수는 유기 튜브로 다가가 양손으로 한쪽 끝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힘에 부쳤다.

흥분으로 유조의 말끝이 흐트러졌다.

“내 총에 맞는 게 더 억울할까? 아니면...”

연수가 튜브의 한쪽 끝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팔 근육이 터질 듯이 긴장하며 튀어나왔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가운데, 연수는 튜브를 힘겹게 궤도에 걸쳐 놓았다.

먼 곳에서 금속 케이블이 서로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압경찰이 1층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케이블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한 것 같았다.

연수는 튜브 중간쯤에 꿇어앉았다. 이어서 한쪽 어깨를 튜브 바닥에 밀어 넣은 채로 일어서려 했다. 금속 케이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왔다. 연수가 숨을 들이켜고 다시 힘을 주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금세라도 엎어질 듯했지만, 용케 버티면서 튜브의 나머지 부분을 궤도 위로 밀어 올렸다. 튜브를 한 번 굴려 항행용 캡슐에 집어넣는 일이 남았다. 금속 케이블 소리가 한층 커지는 가운데 유조가 악을 썼다.

“움직여!”

궤도 위로 올라간 연수가 전력을 다해 튜브 중간 부분을 당겨 올렸다. 권총으로 연수를 계속 조준하던 유조는 왼쪽 옆 관제석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다, 쓰러져 있는 산정을 보았다. 산정의 가슴이 느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관제석 스크린에는 셋째 위성으로 맞춰진 항행용 캡슐의 항로가 떠 있었다. 산정이 자기 일을 마쳐 놓은 것이었다. 남은 절차는 발사 명령 뿐.

금속 케이블 소리가 위험하게 느껴질 만큼 가까워져 바로 머리 위에서 들린다 싶더니, 가벼운 쿵 소리로 바뀌었다. 진압경찰이 엘리베이터 위에 내려선 모양이었다. 그와 함께 연수 쪽에서도 쿵 소리가 났다. 유기 튜브가 항행용 캡슐 안에 딱 맞게 들어가 있었다. 그 옆에서 연수가 숨을 몰아쉬며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유조가 총구를 옆으로 까딱였다.

“내려와.”

연수가 바닥에 털썩 내려섰다. 유조는 빠른 옆걸음으로 캡슐 쪽에 접근했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비열함과 악의가 가득 담긴 웃음이었다.

유조는 권총의 장전을 풀어 튜브 안에 던져 넣고, 캡슐에 내장된 케이블을 튜브에 연결했다. ‘드드드드드’ 굉음과 함께 주위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유조가 중얼거렸다.

“엘리베이터 천정을 따고 있군. 시간이 더 있으면 좋았을 걸.”

케이블을 연결하느라 등을 보였던 유조가 연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돌아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맞닿았다.

유조는 이 순간이 몹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연수는 2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숨을 고르며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지금은 궤도 바로 아래, 유조의 가슴께까지 다가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본다.

연수는 이빨을 악문 채 입술을 있는 대로 열어젖혔다. 싸늘하게 웃는 것만 같았다. 그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훅 하고 내뱉자, 이빨 하나가 사라지며 초록색 연기로 변했다. 연기를 뒤집어쓴 유조는 몸에서 수평을 한 순간에 빼앗겨 버린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아찔하게 어지럽고 금방이라도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홱 넘어갈 것 같았다. 이내 머리와 등이 딱딱한 표면에 부딪히는 감각이 느껴지다가 거짓말처럼 정신이 돌아왔다. 정면을 향한 유조의 두 눈에, 연수가 유기 튜브의 출입구를 눌러 닫는 모습이 들어왔다.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연수는 서둘러 관제석으로 옮겨가 패널로 유기 튜브 통제 프로그램을 불러냈다. 스크린에 방대한 생물 데이터베이스가 떠올랐다. 연수는 재빨리 하나를 선택한 뒤 변화 시퀀스를 실행했다. 튜브에 연결된 케이블로 즉시 생용해액이 주입되었다. 몸에 용해액이 닿자 유조가 격렬히 몸부림쳤다. 본능적 반응이었다. 무엇보다도 용해액은 차가웠다. 아침에 이불 밖으로 삐져나왔던 발이 느꼈던 것보다 아득히 더 차갑고 무자비한 냉기가 온몸으로 퍼졌지만, 유조에게는 이미 막을 힘이 없었다. 정신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반사적인 꿈틀거림만이 이어질 따름이었다. 혹독하리만치 차가운 액체는 유조의 발끝에서 발목으로, 정강이로, 무릎으로, 허벅지로, 골반으로, 배로, 명치로, 가슴으로, 목으로, 턱으로, 얼굴로 거침없이 차올랐다.

연수는 튜브 쪽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유조가 튜브 안에서 액체를 휘저으며 철벅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도중에 멈출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연수가, 산정이, 유조가 각각 해 온 모든 일들도 다 그랬다. 연수는 머릿속에서 뭔가가 짓이겨지는 듯한 감각에 신음하다가 눈을 떴다. 관제석 스크린이 보였다. 유기 튜브에 프로그램한 외계생물, 유조의 새로운 몸이 될 니라델 사슴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연수가 패널의 발사 버튼을 힘껏 누르자마자, 엘리베이터에서 불꽃이 번쩍 튀더니 문이 양쪽으로 튕기듯이 열렸다. 하얀 연기 속에서 10여 명의 진압경찰관이 달려 나왔다. 연수는 관제석에 앉은 채로 천정을 올려다보며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기다렸다.

2분 뒤, 추방소 본관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지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검은 유선형 물체가 화염과 매연을 뚫고 엄청난 속도로 튀어올랐다. 같은 시각 추방소 관제실을 지키고 있던 진압경찰관 한 명이 요란하게 번쩍이는 섬광을 느꼈다. 경찰관은 들고 있던 소총을 패널 위에 내려놓고 창가에 섰다. 그는 불꽃과 연기를 내뿜는 소형 로켓이 굵은 빗줄기를 가르며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방음 처리된 창문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빗소리조차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늘은 잿빛으로 고요하게 젖어 있었다. 출처: 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id=1506&s_para1=171&Board=n9998&admin=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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