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imlee
[SCI-FI]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에서 / 20.5 크로스로드

(일러스트레이션: 박재령)
이산화/작가
얼룩덜룩한 이끼와 웃자란 풀 사이에서 무언가 허연 덩어리가 핑 튀어오르는 바람에, 치카타나틀리는 깜짝 놀라 몇 발짝 물러나다가 하마터면 미끄러운 나무뿌리를 밟아 그대로 넘어질 뻔 했다. 다행스럽게도 칩에 내장된 운동 제어 기능은 치카타나틀리의 몸이 열대우림의 축축한 진흙 바닥에 처박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순간 신경을 타고 도달한 전기 신호가 팔다리의 근육을 단단하게 수축시켰고, 치카타나틀리는 잠깐 동안 뒤틀린 외다리 허수아비 같은 모양새로 서 있다가 천천히 몸의 균형과 통제권을 되찾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팔다리가 저릿저릿했고 눈앞이 여러 빛깔로 요란히 번쩍였다. 그런 익숙한 불쾌함 속에서도 치카타나틀리는 방금 전 튀어올랐다가 툭 떨어진 덩어리의 정체를 최우선으로 확인하려 애썼다. 문제의 물체는 손가락 하나 정도 길이에 통통하게 살이 찐, 머리가 까만 애벌레였다. "딱정벌레 종류 같은데요. 3령 유충이네요."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애벌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의무병 아와우틀리가 말했다. 치카타나틀리는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 둘러멘 소총을 고쳐 쥐었다. 한편 애벌레는 이내 몸을 잔뜩 움츠렸다가 그 반동으로 다시금 높이 튀었고, 맥없이 툭 떨어졌고, 낙하의 충격으로 몸을 뒤틀면서도 재차 도약할 채비를 했다. 포병 아스카몰리가 진저리를 치는 데에도 아랑곳없이 아와우틀리의 들뜬 목소리가 이어졌다. "놀랍네요. 이렇게 작은 애벌레인데, 제 허리보다 높이 뛸 수 있어요. 단순하게 몸길이 비율로만 계산해 보자면 제가 이 나무를 뛰어넘는 것보다도……" "뜀 뛰는 굼벵이한테 낭비할 시간 없어. 이 정글만 지나가면 곧 본사야. 가자." 하지만 치카타나틀리가 앞장서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이번에는 애벌레 대여섯 마리가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튀어올랐다. 군홧발이 진흙을 밟을 때마다 온 사방이 끓는 기름에 물을 뿌린 것 같은 타닥타닥 소리로 가득 찼다. 덕분에 맨 뒤에서 따라오던 아스카몰리는 연신 힉, 힉 하며 작은 비명을 질러야 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글쎄요, 포식자에게 경고하는 행동일까요. 하지만 저도 이해가 잘 안 되네요. 굳이 이렇게 뛰어 봐야 오히려 눈에만 더 띌 것 같은—잠깐만요, 저것 좀 보세요." 아와우틀리가 말을 멈추고서 전방의 수풀 구석을 가리켰다. 치카타나틀리는 잔뜩 경계하며 총구를 돌렸지만 수풀 속에 있는 거라곤 뭉툭한 가재를 닮은 벌레들, 그리고 벌레 시체를 열심히 파먹고 있는 살찐 쥐떼뿐이었다. 다만 벌레들의 행동은 치카타나틀리가 보기에도 적잖이 수상했다. 동족이 바로 옆에서 잡아먹히고 있는데도 도망치거나 몸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라곤 조금도 없이, 벌레들은 쥐 옆을 태연히 서성이거나 때로는 몸을 뒤집고 부드러운 배를 드러내곤 했다. 쥐의 이빨이 살을 파고드는 순간에조차 저항하는 벌레는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급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 세 쌍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 어김없이 펼쳐졌다. 햇볕 잘 드는 바위에 빼곡이 앉아 날개를 자랑스레 여닫는 나비 무리. 그 위로 쪼르르 날아와 나비 하나를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냉큼 물고 가 버리는 부리가 긴 새. 기껏 나뭇잎 모양으로 위장해 놓고서는 제발 자신을 봐 달라는 듯 꽃 위에서 팔을 휘적이는 여치. 어느새 인기척을 느끼고서 모여들기 시작한 크고 작은 동물들. 칠면조 비슷하게 생긴 새가 다가와 아스카몰리의 군화에 몸을 부볐다. 작은 돼지처럼 생긴 털짐승이 아와우틀리 앞으로 힘껏 달려오더니 냅다 벌러덩 드러누웠다. 하나같이 야생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을 만큼 친근하고도 무방비한 동물들이었다. 그리고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생명체와 야생에서 이렇게 마주쳤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치카타나틀리는 아주 지긋지긋하도록 잘 알았다. "정원이야. 틀림 없어."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싹이며 치카타나틀리가 나지막이 선언했다. "정원사 놈의 땅에 발을 들인 게 분명해." ***** 정원사들이 처음부터 '정원사'라고 불린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전쟁 초중반에 그들은 '군사생명공학자'나 '제 89 야전생물병력공장 총책임자' 같은 건조한 직함을 달고 있었으며 맡은 역할도 지금보다는 훨씬 알기 쉬웠다. 미생물 기반 경량화 생체조립 시설을 이용해 전선 가까이에서 즉각 병력을 생산해 보충하고, 전장의 생화학적 환경 변화나 기타 전술적 필요에 맞춰 군사자원의 성능을 조금씩 조절하고, 새 모델이 칩의 원격조종 기능과 잘 호환되지 않는다면서 불평을 늘어놓는 본사의 기술자들과 투닥거리는 것이 그들의 주요 업무였다. 하지만 치카타나틀리와 동료들이 생산될 무렵 그러한 체계는 이미 한계를 맞이하기 직전이었다. 공장에서 갓 뽑아낸 병력을 바로 전선에 갈아넣는 지루한 소모전의 여파가 사회 곳곳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최전방 지사의 직원들이 피로와 질병으로 쓰러지면서 인력의 공백이 곳곳에 발생했고, 급기야는 전투용으로 속성 생산된 병력이 칩을 통해 재교육을 받고서 온갖 업무에 마구잡이로 투입되기에 이르렀다. 치카타나틀리가 졸지에 167번 지사 방위부대의 지휘관을 맡게 된 것도, 아스카몰리와 아와우틀리가 각각 행정직과 연구 보조직으로 차출되어 간 것도 그 즈음의 일이었다. 하지만 치카타나틀리와 동료들은 기껏해야 이 지역 장기전에 맞게 다소 조절을 거친 평범한 군사자원에 불과했다. 곳곳을 이런 임시방편으로 때운 조직이 결국 무너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자 조달이 멈추었고, 새 지부장이 오지 않았고, 결국에는 통신이 끊겼다. 본사가 더 이상 지시를 하달하지 않고 칩의 원격조종 기능마저 작동을 그만두고서도 몇 년 동안은 관성에 따라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근처의 다른 지부나 적 점령지로 정찰을 다녀온 병력들의 증언이 소문처럼 퍼져나가자 가장 끈질기게 전쟁에 임하던 직원들조차 더 이상은 의욕을 내지 못했다. 핵심 인력이 뿔뿔이 흩어진 곳에는 갈 곳 잃은 병력,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된 무기, 그리고 여전히 멀쩡하게 작동하는 생체조립 설비를 손에 쥔 야전 공장의 기술자들만이 남았다. 통제할 사람 하나 없이, 전쟁을 위해 규격화된 제품만을 생산하라는 본사의 지시도 없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무한한 자유의 범위를 깨달은 순간, 한때 본사 소속의 군사생명공학자였던 이들은 지금껏 조용히 꿈꿔 오기만 했던 일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실행에 옮겼다. 가장 먼저 본사가 아닌 자신들의 이름을 자랑스레 내걸었고, 그 다음에는 전술적 효율성이라는 속박을 말끔히 벗어던진 온갖 해괴한 생물병기를 마구잡이로 디자인해댔으며, 생산 라인에서 뿜어져 나온 따끈따끈한 흉물들은 최전방으로 실어 보내는 대신 무절제하게 주변에 풀어놓았다. 곧 지금껏 존재한 적 없는 생태계가 과거의 전선 곳곳에 곰팡이처럼 무럭무럭 피어났다. 그때까지도 버려진 채 허망하게 전선 주위를 떠돌던 병력들은 그런 지역들을 '정원'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가능한 한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 했다. ***** 정원을 지나가는 게 미친 짓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다. 전쟁 막바지까지 살아남은 병력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통제불가능이 된 공장 주위를 행군해야 했던 적이 있었고, 그 때 겪은 일은 그 누구의 머릿속에서든 쉽사리 지워질 만한 경험이 아니었으니까. 치카타나틀리 또한 살점을 불꽃보다도 빠르게 파먹는 포자로 가득 채워져 있던 카주마르주의 곰팡이 핀 병사들을, 발이 푹푹 꺼지는 늪 속으로 쇼틀리닐리를 끌고 들어가던 마숀자의 강철 케이블 같은 칠성장어 떼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한 번은 남프릭 맹다의 이동식 공장 트레일러를 질질 끌고 다니는 거대한 근육질 민달팽이 비슷한 생명체를 먼발치에서 얼핏 보기도 했는데,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 덩어리야말로 다름아닌 남프릭 맹다 본인이었을 것이다. 정원사들은 전쟁을 위해 개발된 기술, 전쟁을 위해 양성된 기술자들이 한순간에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서 전락한 결과 다다른 말로였다. 방향 없이 무작정 뻗어나가며 주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더럽힐 뿐인 이성을 잃은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일은 어떻게든 피하는 편이 좋았다—하지만 치카타나틀리의 결정은 정반대였다. "다들 어디 다친 덴 없지? 그러면 계속 가자." "대장, 진심이야? 지금이라도 되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 "어차피 정글을 지나야 해, 아스카몰리. 무작정 멀리 우회해 봐야 이 지역 전선에선 결국 다른 정원을 마주칠 뿐이야. 지금은 시간 낭비하지 말고 쭉 가는 게 나아."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었다. 한때의 격전지 주변에는 공장이 정말로 수 킬로미터마다 하나씩 세워져 있기도 했으니까. 정원이 아닌 곳에 머무를 수는 있었지만 정원을 완전히 피해서 행군할 수는 없었다. 아스카몰리가 여전히 우물쭈물하자 치카타나틀리가 말을 이었다. "통신 끊기기 전에 본사 위치를 받았다고 했잖아. 어떻게든 여기만 지나면 돼. 최대한 빨리 와 달라는 게 마지막 지시였고, 지시에 따르는 게 우리 일이야." 그렇게 말하고서 치카타나틀리는 먼저 앞으로 나아갔고, 아와우틀리가 어깨를 으쓱하고서 그 뒤를 따랐다. 결국에는 아스카몰리도 울상을 지은 채 정글 칠면조 떼를 헤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애벌레들은 지치지도 않고 튀어올랐다. 돼지 비슷한 것들이 세 병사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깊은 정글은 온통 그늘이 져 어두컴컴했고, 그 안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셋 중 누구도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 "와, 이렇게 안 위험한 정원은 처음인데요." 버섯이 돋아난 나무둥치에 앉아 숨을 돌리던 아와우틀리가 불쑥 말했다. 군장을 내려놓고서 제각기 휴식을 취하던 나머지 두 병사도 그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글 속의 정원에 발을 들인 지 두어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으니,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악의적으로 디자인된 생체병기와 벌써 너댓 번은 사투를 벌였어야 했건만 지금껏 이곳에서 마주친 괴생명체라곤 고작해야 과도하게 겁이 없는 짐승과 자기주장이 지나치게 강한 벌레가 전부였다. 다시 말해 이 정원은 여태껏 세 명이 지나 온 그 어떤 정글보다도 훨씬 안전한 공간이었다. "아까 전에 봤어? 퓨마 닮았는데 귀 길고 엄청 살찐 놈.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가 새가 코앞까지 걸어오니까 그때서야 잡아먹더라. 우리가 지나가는데 경계도 안 하고. 여긴 꼭 루이스 캐럴이 설계한 정원 같아." "루이스 누구?" "그냥 떠오른 이름이야, 대장. 마지막 재교육 때 그 놈들이 내 머릿속에 뭘 집어넣어 뒀는지 어떻게 알겠어?" 아스카몰리가 자기 머리를 툭툭 때리며 볼멘소리를 했다. 167번 지사의 행정직으로 차출되어 일하다가 지사 해체 직전 직원들에게 의미불명의 재교육을 받은 뒤로부터, 아스카몰리는 툭하면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단어와 표현을 무의식적으로 내뱉곤 했다. 아마도 칩을 통해 주입된 지식이 뇌에 제대로 연결되기도 전에 재교육 절차를 종료해버린 후유증일 것이라고 치카타나틀리는 추측했다. 어째서 167번 지사 직원들이 아스카몰리에게 이런 짓을 해 놓은 것인지, 그 이유까지는 들은 적도 없었고 알 방법도 없었지만. "루이스 캐럴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런 정원을 설계할 만한 놈이라면 좀 궁금하긴 하네. 최소한 가학적인 미치광이는 아니었을 테니까." "하지만 여기 정원사만큼 실력 좋은 공학자는 아니었을 걸요. 전 연구소에서 일했으니까 알아요. 생태계 전체를 이렇게 일관적으로 바꿔놓는단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그렇게 말하는 아와우틀리의 발치에서는 통통한 애벌레가 칠면조에게 콕콕 쪼아먹히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놀라우리만치 잘 튀어오르던 애벌레는 정작 포식자가 자신을 잡아먹으려 하자 몸을 축 늘어뜨리고 그저 운명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느긋하게 만찬을 즐기던 칠면조를 향해 이번에는 미끈한 점박이 고양잇과 동물이 멀리서 성큼성큼 다가왔고, 역시 그 어떠한 수고도 없이 칠면조의 목을 물고서 덤불 사이로 태연히 사라졌다. "새로운 종 한두 개를 창작하는 건 아시다시피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원래 있는 종의 행동양식을 조금 주물러서 새 품종을 만드는 것도 어렵진 않다고 들었고요. 하지만 여긴 온갖 동물이 다 이렇잖아요. 괴물 칠성장어 하나 정도에서 그친 게 아니라, 절지류부터 포유류까지 모든 동물을 다 바꿔치기해 놨다고요." "우릴 잡아먹으려고 들지 않는 방향으로 말이지."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들을 잡아먹어 달라고 애원하는 방향이겠죠." 바닥에서 뛰어오를 준비를 하던 애벌레 한 마리를 집어든 아와우틀리가 대답했다. 다른 놈들보다도 특별히 살이 통통하게 오른 손 안의 애벌레를 보면서 치카타나틀리는 문득 거의 바닥을 드러내 가는 군장 안의 보급품을 떠올렸다. 검고 희고 퍽퍽한 군용 식량 덩어리를 마지막으로 배가 찰 때까지 먹어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글에서 먹을 만한 것을 구해 보겠다고 헤맬 시간에 본사 쪽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겠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판단이었지만, 식량을 찾기 위해 조금도 수고할 필요가 없는 곳에 이왕 들어온 이상 기존의 판단을 조금 수정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그리고 군침이 꼴깍 넘어가는 속도는 그 생각보다도 훨씬 빨랐다. ***** 제식 나이프와 비상용 칩 강제시동 키트를 이용한 몇 번의 시도 끝에, 아와우틀리는 열대우림의 축축한 나뭇가지로부터 조그만 모닥불을 피워내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막상 털 뽑은 칠면조 다리를 불에 구우려고 시도해본 결과 새로운 문제가 드러났다. 세 병사 중 누구도 고기가 다 구워질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껍질이 타는 고소한 냄새가 코를 간질이자 지금껏 잊고 있었던 허기가 빠르게 온 정신을 사로잡았다. 어차피 웬만한 오염물질은 문제 없이 소화할 수 있도록 생화학 레벨에서 조정된 몸이기도 했다. 아직 붉은빛이 전혀 가시지 않은 살코기를 향해 세 쌍의 손아귀가 일제히 뻗어 나갔다. "음. 괜찮네요. 지사 직원 식당보다 훨씬 낫네. 거기 밥은 전투식량이랑 다를 게 없었는데." "다행이네. 넉넉히 먹어 둬. 오늘 밤까지 배 채우고, 해 뜨면 바로 출발할 거야." "출발하는 얘긴 나중에 하고 대장도 좀 먹어. 이게 간인가? 닭이나 거위랑은 다르게 혀끝에서 약간 톡 쏘는 느낌이 있네. 아주 기름지지는 않고, 거칠지만 풍부하고……견과류의 풍미도 살짝 느껴지고." 아스카몰리가 갑작스레 쏟아낸 말에 치카타나틀리는 그만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닭이나 거위'라니, '견과류의 풍미'라니! 꼭 그런 걸 실제로 먹어본 적이 있다는 것처럼! 요란한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뱉었는지 깨달은 아스카몰리의 얼굴이 공연히 빨갛게 달아올랐다. "재교육 때문이야! 갑자기 막 떠오른 헛소리라고. 참으려고 해도 잘 안 된다니까!" "괜찮아, 괜찮아. 네가 그런 말 하는 거 싫어하지 않으니까. 아스카몰리, 혹시 다른 걸로도 해볼 수 있어? 아까 모닥불에 애벌레 몇 마리 던져 놓지 않았나?" 뜨거운 잿더미 안에서 익은 애벌레는 겉이 조금 타서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살아있을 때보다도 몇 배는 징그럽다는 것이 아스카몰리의 솔직한 감상이었지만, 그럼에도 막상 질긴 껍질을 뜯고 속살을 입에 넣어 보니 '생 바닷가재와 계란 푸딩을 섞은 듯한, 크리미하고 달콤한 맛에 약간의 밤 향기'가 난다는 말이 어김없이 줄줄 흘러나왔다. 근처 풀숲에서 붙잡힌 메뚜기는 '쌉쌀한 닭고기 맛이 나는 마른 새우를 씹는 느낌'이었고, 불가로 걸어온 정글 돼지는 '정제되지 않은 질긴 식감에 각종 허브가 조금씩 섞인 듯 복잡한 맛'이었다. 그리고 불가에 앉아 이 모든 무의식적인 감상을 가만히 듣는 동안 치카타나틀리의 입가에는 줄곧 보기 드문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 헛소리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대장. 무슨 말인지도 모르잖아." "당연히 모르지." 어느새 어두컴컴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치카타나틀리가 대답했다. 보아하니 슬슬 침낭을 펼쳐야 할 것 같았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흔적을 정리하고, 불침번을 세우고, 늦지 않게 출발할 수 있도록 미리 짐을 싸 두고. 하지만 그런 번거로운 일들을 처리하기에는 오랜만에 배를 채운 뒤의 기분이 너무나도 아늑했다. 조금만 더 이대로 멍하니 있고 싶었다. 감겨오는 눈꺼풀의 무게에 저항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는 말을 덧붙이면서. "하지만 뭔가 의미가 있지 않겠어? 그러니까 네 머릿속에 굳이 집어넣어 줬을 거 아냐. 그냥……그런 느낌이 들어. 그게 좋아." 세상에, 나 지금 엄청 횡설수설하고 있구나.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치카타나틀리의 의식이 꺼졌다. 식사의 열기를 품은 몸이 바닥을 향해 주르륵 미끄러졌다. 컴컴한 정글 한가운데에서, 기묘하리만치 평화로운 정원 한복판에서 세 병사는 오래도록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얼굴과 손등에 내려앉는 희미한 간지러움이 치카타나틀리의 의식을 천천히 일깨웠다. 게슴츠레 뜨인 눈꺼풀 사이로 햇살이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뭐야, 설마 그대로 자 버린 거야? 날이 다 밝을 때까지? 벌떡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니 아스카몰리와 아와우틀리는 여전히 깊이 곯아떨어진 채였고, 꺼진 모닥불과 널브러진 뼈다귀 주변에는 겁 없는 쥐들이 '혹시 우리도 이렇게 잡아먹어 주지 않을까' 하는 모양새로 슬금슬금 기어다녔다. 축축한 바람이 불어오자 생전 처음 모습을 한 온갖 풀잎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그리고 치카타나틀리가 보기에 이 모든 광경은 어쩐지 전부 옅은 붉은빛이었다.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언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느낌에 무심코 뺨을 문질러 보니 손에도 어김없이 붉고 투명한 미지의 액체가 묻어났다. 치카타나틀리의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다들 일어나. 어서! 일어날 수 있어? 몸에 이상한 데는 없고? 빨리 대답 해!" 다행스럽게도 아스카몰리와 아와우틀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떴다. 몸도 멀쩡하게 움직여졌고 감각에도 전혀 이상이 없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온 사방이 새빨갛게 물든 꼴을 보고서 전혀 동요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아스카몰리가 몸에 묻은 액체를 닦아내려 애쓰는 동안 아와우틀리는 넓적한 잎사귀에 남은 흔적을 관찰해본 뒤 가능한 한 침착하게 말했다. "안개비가 내린 것 같네요. 물방울이 마르지 않은 걸 보면 방금 전이겠죠. 따갑거나 한 데는 없으니까 화학무기 같진 않지만, 그래도 뭔가 있긴 할 거예요. 정원이니까." "뭐가 됐든 빨리 빠져나가자. 게으름을 너무 피웠어. 군장 대충 닦고 짐부터 싸. 아스카몰리 넌 거기 멍하니 서서 뭐 해?" "누가 있어, 대장." 아스카몰리의 떨리는 손이 빽빽한 나무와 덩굴 사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서 어렴풋이 움직이는 허연 형체 두 개가 곧 치카타나틀리의 눈에도 들어왔다. 두 형체는 서서히 이쪽을 향해 다가왔고 치카타나틀리는 재빨리 총을 들어 놈들이 있는 방향을 겨누었다. 운동 제어 기능이 켜지자 전기 신호가 온 몸을 옭아매 흔들림을 억눌렀다. 눈과 오른손 검지를 제외한 모든 신체기관이 사라진 듯한 감각의 정적 속에서 곧 상대방의 모습이 시야 중앙에 또렷이 잡혔다. 놈들은 장갑차만 한 털북숭이 도마뱀도 아니었고, 동료들의 뼈를 잔뜩 집어삼킨 부정형 점균 덩어리도 아니었다. 반짝이는 비닐 비옷을 걸치고 개인용 통신장비를 손에 든 사람 둘이었다. 둘 중 치카타나틀리보다 키가 큰 쪽이 자신들을 가리키는 총구의 존재를 먼저 깨닫고서 황급히 양 손을 번쩍 들었고, 더 작은 쪽도 뒤이어 천천히 팔을 올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치카타나틀리가 외쳤다. "허니팟 앤트로포테크닉스 제 167번 지사 방위부대다! 소속과 신분을 밝혀라!" "그물을 풀어 새로이 방직하는 자 알케르메스의 아이, 연구원 치칠로퀼린과 차폴린입니다! 가, 감마 구역 대안생태계 현황 모니터링 업무를 수행하는 중이며, 병사 여러분께 위해를 끼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키가 큰 쪽의 대답에 치카타나틀리는 작게 혀를 찼다. '그물을 풀어 새로이 방직하는 자 알케르메스'라니, 그게 여기 정원사 놈의 자칭인 모양이지? 마숀자 때처럼 연구원들이 자기 주인 이름을 외치면서 돌격해오지 않은 건 마음이 놓이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마음을 놓아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치카타나틀리가 손을 까딱여 보이자 두 연구원은 손을 든 자세 그대로 정글을 헤치며 조심조심 걸어왔다. "거기 정지. 나랑 내 부하들이 이 빨간 물질에 흠뻑 젖었다. 여기 연구원이면 무슨 상황인지 나보다 더 잘 알겠지. 위험성과 대책을 설명해라." "아, 알겠습니다! 차폴린, 혹시 노출 실험 데이터에 군사자원 대상으로 한 것도 있습니까?" "알케르메스는 군사자원 접촉을 특별히 상정하지 않았다, 치칠로퀼린." "네, 그쵸. 음. 그렇습니까. 그럴 것 같긴 했습니다." 잠시 경직된 침묵이 흘렀다. '치칠로퀼린'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고, 손가락을 허공에 몇 번 휘적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보자, 제 소견으로는 방금 노출되신 물질이 단기적인 작동에 큰 지장을 줄 가능성은 없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다만?" "혹시 모를 과민반응이나 기타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몸과 소지품을 흐르는 물에 세척하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도보 10분 거리에 유속이 느린 강의 지류가 있습니다." 치칠로퀼린은 그렇게 말한 다음 고갯짓으로 정글 안쪽 방향을 가리켰다. 곧 치카타나틀리의 총구가 내려갔고 아스카몰리와 아와우틀리는 군장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여전히 긴장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연구원들을 더 추궁해볼 필요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지금은 일단 이 기분 나쁜 액체부터 좀 씻어내고 싶다는 것이 세 병사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 연구원들이 안내한 강은 조금 탁했지만, 그래도 액체가 말라붙어 끈적거리기 시작한 피부와 옷을 닦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몸 여기저기에 빨갛게 남아 있던 흔적은 물이 닿자 간단히 녹아 사라졌다. 한편 여기까지 행군해 오는 동안 제대로 씻지 못해서 곳곳에 쌓인 때와 피로를 벗겨내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한 번 강에 들어가고 나니 도저히 대충 몸만 헹구고 나갈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세 병사는 꽤 오래도록 물에 몸을 담근 채 시간을 보냈고, 연구원들은 그런 셋이 목욕을 마칠 때까지 강가에 서서 기다려 주었다. 이따금씩 묻는 말에 대답도 해 주면서. "우리가 뒤집어쓴 게 정확히 뭐라고? 무슨 영양액?" "말씀드렸다시피 주성분이 영양액입니다. 당류, 무기염류, 그 외에 이 주변의 기초 생태계에 필수적인 각종 영양분이 적정 비율로 배합되어 있습니다. 아직 시험 단계의 생태계이기에 안정성을 보장하고자 이런 개입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고 알케르메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다 밥 준 거란 소리지. 왜 이렇게 끈적거리는지 이해는 가네. 근데 도대체 어디서 뿌렸기에 이렇게 온통 뒤범벅을 만들어 놓은 거야?" 치카타나틀리의 물음에 이번에는 차폴린이 강 상류 쪽에 어렴풋이 보이는 언덕을 홱 가리켰다. 풀과 나무로 뒤덮인 녹갈색 언덕은 멀리서 보기에 마치 커다란 짐승이 웅크려 있는 모양새였고, 그 곳곳에서는 이따금씩 분홍빛 증기가 후욱 뿜어져 나왔다. 한쪽에 솟은 굴뚝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저기가 원래 공장이었던 건물이리라고 치카타나틀리는 어림짐작했다. "알케르메스가 저기 있다. 에어로졸화한 영양액을 주기적으로 대기중에 분사하여, 기상 상황에 따라 대안생태계 내 각각 구역에 살포될 수 있도록 하는 중이다. 거듭 말했다시피 대안생태계 외부자가 영양액에 노출되는 일은 예상하지 못했다." "당장 문제 생기는 게 아니라면 우린 상관 없어. 어차피 바로 나갈 생각이니까." "음, 잠시. 그 부분은 우리의 의견을 들어줬으면 좋겠다만." 의아해하는 치카타나틀리를 앞에 두고서 두 연구원은 잠깐 진지한 시선을 교환했다. 이윽고 치칠로퀼린이 말을 받아 이었다. "앞서 설명드렸듯이 영양액 성분이 군사자원의 작동에 지장을 초래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그, 연구원 입장에서는 기존에 시험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섣불리 단정하여 말씀드릴 수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당분간 우리 쪽에서 여러분의 동작 상태를 모니터링할 수 있도록 협조하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모니터링? 얼마나 걸리는데?" "그것은 사실 전적으로 알케르메스의 일정에 달려 있습니다만……. 군사자원과 유사한 체질량의 포유동물 케이스를 참조할 때, 최장 7일 가량의 단기 관찰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꿔 말하면 7일 동안 이 정원에 머물러 달라는 뜻이었다. 몸을 말리자마자 바로 본사를 향해 출발할 생각이었던 치카타나틀리에겐 적잖이 당황스러운 권유였다. 그런 당황을 눈치 챘는지 차폴린이 몇 마디를 재빨리 보탰다. "대안생태계 내에 머무는 동안 최대한의 편의를 보장해 주겠다. 이곳에 서식하는 동식물은 얼마든지 섭취해도 좋다. 어차피 최근 통계상으로는 대다수 종의 개체군 크기 및 성장현황 모두 대체로 안정적이니까. 신체검사 및 간단한 정비는 물론, 혹시라도 필요한 물자가 있다면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한도 내에서 얼마든지 지급해줄 의향 또한 있다." 여전히 치카타나틀리는 이곳에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의향을 정리해서 말하려던 찰나 나머지 두 병사가 대뜸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제안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목소리로. "괜찮지 않아? 난 찬성." "저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보급 받고 만전의 상태로 출발해도 손해 볼 건 없죠." 치카타나틀리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둘을 다그치고 싶었다. 본사로 향하는 일은 그들에게 내려진 임무였고 그들은 오로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만들어진 생명체였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게으름을 피우는 건 병사가 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오랜 행군이었다. 굶주렸고, 지저분해졌고, 작동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으며 무엇보다도 마음이 지쳐 있었다. 잠깐 쉬고 정비를 마친 다음 더 빨리 나아갈 수만 있다면. 아주 잠깐 정도라면. "하지만 7일이나 낭비할 수는 없어. 사흘이야. 그 뒤엔 즉시 떠날 거야." "사정이 그러시다면야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구원의 대답에 아스카몰리와 아와우틀리는 대장의 얼굴을 잠깐 쏘아보았지만, 길쭉한 메기를 닮은 물고기가 멀찍이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튀어오르자 그런 시선도 이내 흐트러졌다. 강 주변에는 나무와 덤불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고 그 곳곳에는 먹히기만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식량이 가득했다. 떠나는 날의 아쉬움보다는 당장의 즐거움을 기대하도록 만드는 행복한 광경이었다. 심지어 치카타나틀리조차 스스로의 내면에 자리잡아버린 달콤한 기대감을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었다. 이곳 정원에서 보낼 앞으로의 사흘은 분명 지금껏 보낸 그 어떤 사흘보다도 아늑한 나날이 될 터였다. *****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을 가장 먼저 온 마음으로 받아들인 병사는 아스카몰리였다. 그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강물에 손을 넣어 적당히 잡히는 물고기를 썰어 먹을 때에도, 반쯤 뜯어져가는 군화를 수선할 때에도, 치칠로퀼린의 안내에 따라 조직 샘플 채취에 협조할 때조차도 아스카몰리는 167번 지사 직원들이 주입한 정체불명의 언어를 쉼없이 떠들어댔으니까. 조금의 통제조차 받지 않고 흘러나오는 이 재잘거림이야말로 아스카몰리가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렸다는 숨길 수 없는 증거였다. "아얏! 살살 좀 해. 다시 말하지만 신은 우리가 고통을 측정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랬어." "한 번에 많이 채취해 둬야 검사 돌릴 때 편합니다. 그리고 방금 그건 레논입니까?" "모른다니까. 끝도 없이 이 심리 게임을 하고 있거든. 웬 드루이드들이 베일을 들추고, 게릴라 심리전을 펼치고……. 잠깐, 혹시 넌 이게 다 무슨 소린지 알아?" 눈앞의 상대방이 자신의 재잘거림을 '해석'해줄 수 있단 사실을 깨닫자 더욱 흥분한 아스카몰리는, 머릿속에서 실시간으로 윙윙거리는 모든 내용을 당황한 치칠로퀼린에게 즉시 마구잡이로 쏟아냈다. 치칠로퀼린이라고 해서 정말로 그 전부를 해석해줄 수는 없었지만, 단지 문장 몇 개의 정확한 출처를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아스카몰리가 신이 나서 치카타나틀리에게 달려가도록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유명한 옛날 노래 가사라지 뭐야! 대장 말이 맞았어. 아무래도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의미있다고 생각한 걸 나한테 넣어준 모양이래. 좋아했던 노래, 꼭 남기고 싶었던 표현, 아마도 그런 것들 말이야. 전체 가사도 연구원이 가르쳐 줬어!" 아스카몰리의 더듬거리는 노래가 야영 장소에 울려 퍼지는 동안, 아와우틀리의 발걸음은 앞으로 사흘이라는 시간을 함께하게 된 이른바 '대안생태계'의 더욱 깊숙한 곳곳으로 향했다. 의식적인 행동이라기보단 거의 학습된 버릇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비록 아스카몰리의 경우처럼 조잡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아와우틀리 역시 잠시 연구 보조직으로 일하기 위해 재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고, 그때 심어진 연구용 사고체계는 원래의 의식과 분리할 수 없이 뒤섞여 아와우틀리의 내면에 온전히 뿌리를 내린 채였다. 혹시라도 연구 현장으로 복귀하게 된다면 즉시 과거의 업무 태도를 되찾을 수 있도록. 나뭇가지 위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선 포식자를 불러들이려 발버둥치는 사마귀의 모습을 최대한 선명히 눈에 담을 수 있도록. "정말 볼수록 굉장하네요. 저도 생명체의 투쟁-도주 반응 일부분을 극대화하는 연구에 손가락 하나쯤은 얹어 봤지만, 그건 이미 존재하는 본능에 기름을 더 끼얹는 작업이었을 뿐이고 이건 정반대의 경우잖아요. 당연한 생존 본능을 억제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자연적으로는 도무지 존재할 수 없는 욕구를 그 자리에 대신 끼워넣은 거예요. 그것도 생태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종을 대상으로. 이게 어떻게 가능하죠, 차폴린?" "이런. 설마 외부인의 칭찬을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정기 기록용 영상을 촬영하던 차폴린의 귀 끝이 연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비록 아무리 칭찬을 듣는다 한들 차폴린이 말해줄 수 있는 내용은 '알케르메스의 허가 없이 공개해도 될 만큼 충분히 개략적인 연구 방법론'밖에 없었지만, 동시에 그 개략적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한 차폴린의 목소리엔 적잖은 열의가 묻어났고 아와우틀리 또한 설명 한 마디 한 마디에 온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의 노력을 높이 평가해 준 것은 고맙지만, 사실 우리가 정말로 생물종 하나하나의 행동양상을 조작해 포식당하기를 선호하도록 만든 것은 아니다. 이 지역 대안생태계에 가한 조작은 기껏해야 몇 가지의 새로운 생명체를 제작해 도입한 것이 전부다. '잡아먹히고 싶어하는 욕구'가 아니라, '잡아먹히게 만들고 싶어하는 욕구'를 지닌 생명체를 말이다. 자연계에는 이미 유사한 욕구를 지닌 종이 충분히 많이 존재한다만, 혹시 알고 있나?" "어, 연구소에서 입력받은 데이터에는 있어요. 쥐가 고양이를 겁내지 않게 만드는 원생동물, 달팽이가 새한테 잡아먹히도록 유도하는 흡충, 뭐 그런 종류 말씀이신가요?" "정확하다. 그러한 종류의 생물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해 생태계 전반의 포식행동 양상을 바꾸어보자는 것이 알케르메스의 주요 연구 주제다. 내 추산으로는 이 지역 대안생태계에 존재하는 목표 생물종의 80% 가량이 최소한 하나 이상의 행동변화 유도종의 영향 아래에 있고, 정기적인 난포낭 살포 덕분에 그 비율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설명을 여기까지 들은 아와우틀리의 표정에 순간 가벼운 꺼림칙함이 스쳤다. 이 정원에 돌아다니는 동물 대부분이 '행동변화 유도종'에 감염돼 있다면, 혹시 그걸 먹은 우리도 위험해지는 거 아냐? 의혹의 기색을 눈치 챈 차폴린이 재빨리 해명의 말을 덧붙였다. "면역 기능이 정상인 군사자원에 감염될 확률은 낮은 편이라고 생각될 뿐더러, 설령 감염되었다고 해도 먹이사슬 상단에 위치한 대형 포유류의 체내에선 행동변화 유도종이 자동적으로 휴면 상태에 들어간다. 특별히 설계된 포식 신호에 노출되지 않는 한은 어떤 영향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 말 믿어도 되죠? 표범 앞에서 막 드러눕고 그러는 거 아니죠? 다행이다……."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 아와우틀리는 다시 나뭇가지 위의 사마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옆에서 두 인기척이 아무리 바스락거려도 사마귀는 도망칠 생각조차 없이 그저 새를 끌어들이는 데에만 온 힘을 쏟았고 있었다. 샛노란 깃털을 지닌 작은 새가 쪼르르 날아와 자신을 물고 가는 그 순간까지도. ***** 두 병사가 사흘 동안 마음 가는 대로 신나게 돌아다닌 것과는 대조적으로, 치카타나틀리는 정원에 머무는 내내 행군 준비에만 묵묵히 온 신경을 쏟았다. 소총을 분해해 닦았고, 옷과 침구를 전부 빨아 말렸고, 휴대할 수 있을 만큼 가볍고 보존성도 좋을 법한 마른 메뚜기를 조금 확보해 두었으며 강물이 그나마 가장 맑은 곳을 찾아 수통도 새로 채웠다. 이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난 이틀째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두 연구원이 있는 강가를 찾아가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약속한 신체 검사와 정비를 받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정비라고 해 봐야 치칠로퀼린에게서 보급형 윤활제 주사를 맞고 차폴린의 간단한 칩 동작 상태 테스트를 받는 것이 전부. 차폴린이 외부 제어 기능을 일시적으로 활성화하자 치카타나틀리의 사지가 딱딱하게 굳었다. 찌릿거리는 고통 속으로 치칠로퀼린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만전의 상태라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신체 기능 전반이 다른 분들 이상으로 저하되어 있고, 부위별 손상 정도도 우려할 만한 단계입니다. 본인께서 가장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괜찮아. 본부까지 갈 수만 있으면 돼. 제대로 된 정비는 본부에서 해줄 거야." 치칠로퀼린은 뭐라고 더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끝까지 그 말을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칩 테스트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가만히 앉아 외부 조작대로 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건 상당히 지루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치카타나틀리가 먼저 입을 열어 보았다. 대수롭지 않게. 어디까지나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아와우틀리한테서 얘기 들었어. 이 정원 얘기. 난 군사생명공학에 대해선 거의 아는 게 없지만, 그래도 여긴 지금까지 들러 본 정원 중에서 제일 흥미롭게 설계해 뒀던데." "요즘 칭찬을 너무 많이 듣는 기분이다. 이러다 중독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될 정도다." "칭찬해주려고 얘기 꺼낸 거 아냐.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어떤 원리로 여길 설계했는지는 알겠는데, 목적이 뭐야? 뭔가 의도한 바가 있었으니까 너네 정원을 이렇게, 잡아먹히고 싶어서 안달하는 놈들이 바글대는 꼴로 꾸몄을 거 아냐." 예상치 못한 종류의 질문이었기에 차폴린은 잠시 생각에 잠겨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대답할 수 없는 종류의 질문인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설계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강가에 나간 아이가 자갈을 쌓으며 노는 데에 어떤 숭고한 목적이 있나? 우리는 자갈 대신 염기와 단백질을 쌓을 뿐이다." "하지만 하필 이런 형태였던 데에는 뭔가 의미가 담겨 있겠지. 167번 기지 놈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담아서 아스카몰리 머리에 그런 짓을 해 놓은 것처럼. 혹시 전쟁이 싫었던 거야? 그래서 이번에는 싸울 필요도 없이, 아무 목표도 없이 마냥 나무 그늘에서 뒹굴거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고 한 거야?"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 침묵은 조금 더 길었고, 그 끝을 알린 차폴린의 목소리 또한 이전보다 조금 더 나지막했다. "내가 이해하는 한, 알케르메스는 전쟁 수행이라는 단일한 목표를 위해 생명체를 디자인하는 일을 결코 싫어하지 않았다. 주제의 제약이 곧 창작의 기틀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명확한 지향점이 있는 디자인이야말로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느꼈다. 다만……그 지향점이 항상 전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전쟁은 에너지 낭비를 수반하는 목표다. 반드시 경쟁이 발생하고 충돌이 발생한다. 알케르메스는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다른 목적을 지향하도록 이 생태계를 재설계하고 싶어했다." "'다른 목적'이란 게 고작해야 천적한테 성공적으로 잡아먹히는 건데도?" "그것 또한 가능한 하나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생각에 잠긴 쪽은 치카타나틀리였다. 칩 테스트가 끝나고 전기 신호가 잦아드는 동안에도 치카타나틀리는 자갈로 쌓은 탑처럼 밤의 강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디선가 또 물고기가 내는 찰박찰박 소리가 들릴 즈음,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마음에 들어. 응, 그것도 목적은 목적이지. 그럼 됐어." 그날 연구원들이 있는 곳을 떠나 야영 장소로 돌아갈 때까지, 치카타나틀리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이튿날 아침은 세 병사가 정원을 떠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나아갈 방향은 진작부터 정해져 있었고, 잠시 동안의 휴식과 영양 공급 덕분에 정글을 헤쳐나가기 위한 기력 또한 충분했다. 행군 준비도 완벽하게 마쳐 두었으니 날이 밝기만 하면 이번에야말로 지체없이 출발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치카타나틀리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예상은 출발 지시를 내린 바로 그 순간에, 오랜 동료의 곤란해하는 얼굴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의해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기, 대장? 며칠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될까?" "무슨 소리야. 벌써 사흘이나 낭비했는데. 혹시 몸에 이상이라도 생겼어?" "그런 건 아닌데, 연구원들도 모니터링 더 하는 게 좋겠댔고……." 제대로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아스카몰리의 모습에 당황해, 치카타나틀리는 다른 한 명의 동료에게로 급히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와우틀리 또한 지휘관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똑같은 모습으로 시선을 피하며 머뭇거리는 두 동료를 앞에 두고서야 치카타나틀리는 비로소 상황을 파악했다. 그래,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 온종일 고생만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나 풍족하고 걱정거리 없는 곳에서 며칠씩이나 쉬었으니, 여길 떠나기 싫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부대의 지휘관인 치카타나틀리가 그런 동료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 임무는 여기서 빈둥대는 게 아니잖아. 지시에 따르는 게 군사자원의 존재 이유야." "빈둥대려는 게 아니에요. 차폴린이 그랬어요. 원한다면 여기서 연구원으로 당분간 일해도 좋다고."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되돌아온 아와우틀리의 대답에 치카타나틀리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단순히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랜 동료의 목소리가 어쩐지 너무나도 차갑고 낯설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소총도 군장도 어느 새 땅바닥에 내려놓은 채, 167번 지사 방위부대 의무병이었던 전직 연구원의 두 눈에는 전에 없이 단호한 기색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충돌의 징조가 보이지 않는 먹구름처럼 두 병사 사이에서 맹렬히 소용돌이쳤다. 번갯불이 튀는 건 시간 문제였다. "넌 연구원이 아니야, 아와우틀리. 재교육 받고서 잠깐 연구원 일 하다가 복귀한 게 전부잖아. 아스카몰리 너도 어디까지나 임시로 행정직에 배치됐을 뿐이고. 그 역할은 이미 옛날에 끝났어. 네 원래 임무로 복귀해." "원래 임무 같은 건 이제 없어요. 죽일 적도 없고, 붙어 있을 전선도 없고, 투입될 작전도 물론 하나도 없죠. 반면에 이 정원엔 일손이 더 필요해요. 벌써 델타 구역 관리를 담당해 달라는 부탁도 받았다고요." "난 지시를 받았어! 최대한 빨리 본사로 와 달라는 게 마지막 통신이었어. 본사 위치를 받았다고. 그럼 가야 할 거 아냐! 그게 군사자원의 목적이고 존재 의미야!" "여기서 보낸 사흘이 저한테는 전쟁이 끝난 이후로 가장 의미있었던 시간이에요! 존재하지도 않는 지시를 희망이랍시고 붙잡고서 여태껏 멍청하게 뚜벅뚜벅 걸어온 그 어떤 날보다도!" 전혀 정제되지 않은 외침이 한껏 달궈졌던 공기를 싸늘하게 식혔다. 소리를 친 당사자인 아와우틀리조차도 놀랄 만큼 선명한 감정의 폭발이었다. 치카타나틀리가 그 폭발에 담긴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의미를 받아들이기까지는 그보다도 훨씬 더 긴, 거의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냐. 지시는 있었어. 분명히 들었다고. 본사 위치도 받았단 말이야." "나도 믿고 싶었어, 대장. 우리 통신은 진작에 다 끊겼는데 대장한테만 연락이 왔단 말이, 본사가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뭐든간에 임무를 하달했단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어. 그랬으니까 힘들어도 지금껏 따라온 거야. 하지만……솔직히 진짜로 믿은 적은 없어." "차폴린한테 들었어요. 정비할 때 칩 통신 기능 테스트도 같이 했는데, 아스카몰리도 저도 신호에 전혀 반응을 안 했다고. 무슨 전자전 공격 같은 걸 받아서 수신기가 완전히 망가진 거예요. 대장도 정비 받았죠? 통신 기능은 정상이었어요? 테스트 신호 받는 걸 느끼기는 했나요?" 대답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힘을 잃어버린 두 다리가 풀썩 무너져내리려 했지만, 운동 제어 기능만큼은 정상적으로 작동했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일조차 치카타나틀리에게는 허가되지 않았다. 죽은 나무처럼 지면에 못박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채 치카타나틀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마지막으로 지시를 받았던 순간을—그렇게 믿어야만 했던 순간을 멍하니 되새기고 또 되새기는 것뿐이었다. ***** 돌이켜 보면 그 통신은 평소에 받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반투명한 녹색 글자로 되어 있지도 않았고, 신경을 사정없이 긁어내리는 알람 자극도 없었으며, 확인할 때까지 시야 한쪽 귀퉁이에서 깜박깜박 빛을 발하지도 않았다. 총성도 포연도 그친 전장 한복판을 목적지 없이 마냥 터덜터덜 배회하고 있을 무렵에, 지독한 굶주림과 그보다도 더욱 견디기 힘든 허무감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죽어가고 있을 때에 통신은 다만 잿빛 하늘을 가르는 영롱한 강철 빛깔 보급품처럼 치카타나틀리의 눈 앞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번쩍이는 모든 표면이 허니팟 앤트로포테크닉스의 공식 로고로 뒤덮인 그것은 마치 가장 강력한 수백 종류의 중화기와 전차와 자동병기들이 시공간상의 한 점에 겹쳐져서 형성된 거대한 프리즘처럼 보였다. 모든 방향을 일시에 겨냥하는 무한한 수의 총구가 167번 지사 방위부대 지휘관 치카타나틀리의 존재를 감지하고 길을 내주었다. 피와 기름의 광택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계단을 따라 치카타나틀리는 떨리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계단 양 옆에는 지금껏 전장에서 보아 온 모든 총기가 양 옆에 도열해 있었고, 그 종점에는 거대한 얼굴 하나가 심연 위에 떠 있었다. 비록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그 얼굴의 형상은 틀림없이 치카타나틀리가 본부로부터 지시를 수신할 때마다 상상하던 최고전술책임자의 모습이었다. 잠시 동안 얼굴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가운데에서 치카타나틀리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윽고 수천 개의 톱니와 방아쇠가 일제히 딸깍이는 소리와 함께 그 입술이 열렸다.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천지를 진동시킬 듯 장엄했고, 그 어떤 모델의 전투식량보다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달콤했으며, 마찬가지로 치카타나틀리가 본부의 지시를 읽을 때 상상하던 목소리와 놀랍도록 일치했다. "지시 번호 20405521. 중요도 등급 차프라. 대분류 A. 소분류 LAE." "부대원을 가능한 한 동반하여 본사로 향할 것." "지휘관으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할 것." "이상." 얼굴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치카타나틀리를 태운 계단은 하늘을 향해 솟구치듯 올라가, 잿빛 구름을 일순간에 걷어내고 언젠가 작전 지도로만 보았던 드넓은 대륙을 발 아래에 펼쳐 보였다. 치카타나틀리의 시선이 수많은 영광스러운 전장으로 뒤덮인 사막을, 아직까지도 틀림없이 포연이 피어오르는 숲을, 군사자원 유니폼 차림의 병사들이 줄지어 행진하는 도시를 차례로 가로질러 대륙 한쪽 끝을 향했다. 그곳에는 너무나도 눈부셔 차마 바라볼 수도 없는 거대한 건물이 드높이 솟아 있었다.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건물보다도 철저하게 방비되고 있음이 분명한 그 건물의 꼭대기에서는 허니팟 앤트로포테크닉스의 공식 로고가 지상에 내려온 두 번째 태양처럼 빛을 발했다. 치카타나틀리는 그곳이 자신이 향해야 할 본사의 위치임을 알았다. 모든 지시 내용을 이해했고 삶의 이유를 새로이 찾았다. 보급형 전투복처럼 몸을 감싸는 빛 속에서 치카타나틀리의 의식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뇌리에 단단히 새기려고 애썼다. 167번 지사로 돌아가서 남아 있는 동료들을 데려와야 해. 함께 본사로 가야 해. 본사로 가야 해.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여전히 텅 빈 전장밖에 보이지 않았다. 통신 기록에서는 어떠한 신규 메시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치카타나틀리는 자신이 본 것이야말로 분명 본사의 마지막 지시라고 생각했다. 167번 지사 방위부대 지휘관인 자신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내려진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임무이리라고 확신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오직 전쟁 수행이라는 목적만을 위해 제작되었고 또 살아 온 치카타나틀리에게 더 이상의 임무가 남아 있지 않다면, 그건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조차 더 이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었으니까. 여태껏 전장에서 겪었던 모든 처절한 고통과 사투마저도 결국에는 전부 무의미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다고 치카타나틀리는 굳게 믿었다. 온 힘을 다해 믿어야만 했다. ***** 하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찬란한 환상이 깨진 자리에는 망가진 몸과 깊이 모를 공허만이 남았다. 혼자서라도 떠나고 싶었건만, 어떻게든 그날 보았던 본사를 향해 행군을 시작하고 싶었건만 간밤에 단단히 챙겨 둔 군장이 지금은 어쩐지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양 어깨를 짓눌리듯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 치카타나틀리 주위로 칠면조와 돼지들이 무심히 모여들어 꾸룩꾸룩 울었다. "끝까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 그냥……그런 느낌이 좋았어." 목구멍을 타고 기어나온 중얼거림이 맥없이 툭 떨어졌다. 더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독백이었다. 결국 치카타나틀리는 그 날 예정대로 정원을 나서지 못했고, 아스카몰리와 아와우틀리가 연구원들이 있는 곳으로 떠날 때조차도 손을 뻗어 붙잡지 못했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밝아졌다가, 어둠이 드리웠다가, 온통 어둠이 드리웠다가, 밝아졌다가, 붉은 안개가 끼었다가 다시 어두워지고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웅장하게 빛나는 지시가 다시금 기적처럼 내려올 기미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한때 전투병력이자 같은 부대의 동료였던 낯선 두 생명체가 작별 인사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씩 찾아왔을 뿐이었다. "내 머릿속에 있는 걸 정리해 주고 싶대. 칩을 잘 쓰면 가능할 것 같다고, 어떤 내용이 있을지 자기들도 궁금하다고. 응, 협조하기로 했어.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오늘부터 정식 연구원으로 일하게 됐어요. 보조가 아니라 진짜 연구원이죠. 한동안은 델타 구역 관리 작업을 해야겠지만, 그 뒤엔 새 프로젝트를 기획해 보자고 하네요."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치카타나틀리는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고, 굳이 가늠하려 들지도 않았다. 짐승의 것이 아닌 한 쌍의 발소리가 가까워져 오는 동안에도 붉은 액체에 덮인 몸은 그저 바닥에 축 늘어진 채였다. 치칠로퀼린이 조직 샘플 검사 결과를 읽는 소리, 차폴린이 '행동변화 유도종 활성화를 통한 대형 포유류 정기 개체수 조절'에 대해 설명해 주는 소리가 치카타나틀리의 귓가에 아득하게 메아리쳤다. 전부 아무래도 좋은 소리들이었다. 어차피 이 세계에 더 이상 의미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양 팔을 어깨에 둘러멘 두 연구원에게 질질 끌려 치카타나틀리의 몸은 가까운 강가로, 다시 강줄기를 거슬러 상류 쪽으로 향했다. ***** 강 상류에는 언젠가 멀찍이서 보았던 큼지막한 녹갈색 언덕이 있었고, 그 바로 앞에는 작은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 나무가 어지러이 쓰러져서 생긴 널찍한 공터가 하나 보였다. 두 연구원이 공터 한복판에 데려다가 앉혀 준 덕분에 치카타나틀리의 눈에는 이제 언덕 전체가 또렷이 올려다보였다. 한때 공장 건물의 일부였으리라는 추측을 증명하듯 언덕 전면에는 창문이나 배기구를 닮은 콘크리트 구멍이 뻥뻥 뚫려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혈관을 연상케 하는 여러 갈래의 덩굴이 곳곳의 표면을 빽빽하게 뒤덮고 있기도 했다. 짐승을 닮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어떤 짐승도 닮지 않은 기이한 형상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기이한 일은 그 다음 순간에 일어났다. "제 4형 행동변화 유도종의 생활사 최종 단계 활성화 프로세스를 개시합니다." 중앙의 배기구로부터 깜짝 놀랄 만큼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동시에 다른 구멍들로부터는 뜨거운 바람이 훅 뿜어져 나와 일제히 흙먼지를 불어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인지 몰라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치칠로퀼린의 눈 앞에서 언덕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덩굴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고 마른 진흙으로 덮인 토대가 쩌저적 소리와 함께 갈라졌다. 그 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여러 쌍의 짧고 육중한 다리였다. 지금껏 언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였다는 사실을 치카타나틀리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공장 건물 전체에 신경과 근육을 뻗어 한 몸이 된 생명체. 아마도 한때는 '군사생명공학자'나 '제 89 야전생물병력공장 총책임자' 같은 건조한 직함을 달고 있었을 존재. 정글 한가운데에 이 게으르기 짝이 없는 정원을 펼쳐 놓은 장본인—알케르메스. 그것이 다시 한번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활성화 신호가 방출됩니다. 담당 연구원은 신호 방출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을 면밀히 모니터링한 후, 활성화 과정이 종료된 뒤에 해당 결과를 보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치칠로퀼린이 먼저 발걸음을 돌려 공터 가장자리로 향했다. 차폴린은 치카타나틀리의 어깨를 한 번 가볍게 두드려준 뒤 그 뒤를 따랐다. 혼자 남겨진 치카타나틀리의 가슴이 공포로 세차게 뛰었다. 어느새 알케르메스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한 낮은 으르렁거림이, 짙은 향기가, 번뜩이는 전기 신호가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 만큼 그저 두렵고 또 두려웠다. 하지만 그 공포 속에서 더욱 다양하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조금씩 싹트는 것을 치카타나틀리는 문득 느꼈다. 그것은 결코 저항할 수 없는 압도감이었고, 전신을 오롯이 채우는 충만감이었으며, 또한 까마득한 안도감이었다. 본사로부터 온 휘황찬란한 통신을 목도했을 때와 놀랍도록 유사한 감정의 배합이었다. 그때 치카타나틀리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새로운 존재 의미를 찾았다는 걸. 사방의 수풀이 요란하게 부스럭거렸다. 곧 가죽이 번들거리고 머리가 큰 소 하나가 공터로 달려나와 입을 쩍 벌리고 날뛰며 울부짖었다. 왕관 모양의 깃털을 단 수리가 언덕 주변을 푸드덕거리며 빙빙 돌았다. 흑표범도, 귀가 긴 퓨마도, 긴팔원숭이도 마찬가지로 공터에 모여들어 제각기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언덕은, 알케르메스는 뭇 짐승들의 성원에 화답하듯 몸 아래로부터 점액질로 덮인 꿈틀거리는 팔 수십 개를 우르르 토해냈다. 관절 없는 근육질 팔은 마숀자의 늪지 칠성장어보다도 더욱 두꺼웠고 그 끝에는 저마다 손가락과 빨판과 갈퀴가 달려 있었다. 채찍처럼 날렵하게 휘둘러진 팔이 순식간에 수리를 붙잡고서 알케르메스의 몸 안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치카타나틀리는 황홀경에 차 바라보았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게 바로 내 목표야. 내가 가야 할 곳이야. 나는 저렇게 되기 위해서 만들어지고 또 지금껏 살아온 거야. 칠흑같은 한밤, 어둠 속에도 타오르는 길잡이별 있어요 그대가 무엇이라도 누구라 하여도 어디선가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동료의 목소리였다. 정말로 동료가 지금 이곳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동료가 언젠가 내뱉었던 의미 불명의 곡조가 기억 속에서 재생된 것뿐인지 치카타나틀리는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분간할 필요조차 없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앞으로 남은 임무는 어차피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난 치카타나틀리의 몸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다리가 땅을 박찼고 팔이 하늘로 뻗어 나갔다. 전력을 다해 펄쩍펄쩍 뛰고 소리를 지르는 동안 치카타나틀리는 더없이 행복했으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하게 느꼈다. 출처 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Board=n9998&id=1550&s_para4=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