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rimlee

[SCI-FI] 난독의 시간/20.3 크로스로드

이하루 /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박재령)


“정리해 보죠. 장경주씨 말씀은 짐승을 잡아달라는 거 맞죠? 그 짐승은 다른 어떤 곳도 아닌…… 아니, 뭐 그건 됐고. 제 말이 정확합니까?”

열어 놓은 창으로 레너드 코헨의 할렐루야가 들렸다. 매일 이 시간만 되면 어디선가 흘러와 기어이 비집고 들어오는 균열. 잠깐이나마 사람에게 선의라는 것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예술의 장난.

들을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야릇한 음악이다. 아니 야릇하다는 말은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기묘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지도 않은데.

“네 맞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소리가 들립니다. 밤에는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죠. 그건 분명 짐승의 소리입니다. 제 선생님도 짐승에게 잡아먹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짐승을 피해 어딘가로 몸을 숨기신 거라면 좋겠지만…….”

창을 닫고 싶었다. 그러나 오래된 창틀은 비틀려있다. 잘 닫히지 않는다. 항상 틈이 벌어진다. 그래도 눈앞의 멀끔해 보이는 의뢰인과 의뢰 내용의 간극보다 크지는 않다.

“이게 확실한 증거입니다. 읽어보시면 이해되실 겁니다. 짐승을 잡아주시길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내키지 않지만 남자가 내민 투명 홀더를 집어 들었다. 쓰레기통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듯 꾸깃꾸깃한 종이를 투명 홀더에 신줏단지 모시듯 고이 넣어 온 의뢰인이 신기하다.

읽는다.

책 속에 짐승이 산다. 어둠 속에 깜박이는 눈들이 있다. 해진 책표지의 제목들 사이로 시간이란 우울에 표백된 글자들 마른 우물이 되어 제 안에 짐승을 키웠다. 짐승들이 헐거워진 자간의 창살을 뜯어내며 우람한 어깨를 앞세워 밀고 나온다. 짐승을 마주치면 절대 등을 보이며 도망치지 말라는, 죽은 듯이 가만히 있거나 조심조심 뒷걸음쳐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아주 쉽게 짐승들을 외면했다. 책들이 악랄해졌다.

그러나…….

하아. 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또다. 이번 달만 들어서도 세 번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망상증 환자나 적었을법한 종이 쪼가리를 증거랍시고 들고 찾아온 인간이.

대체 소문이 어떻게 돌았기에 이런 작자들이 파리처럼 꼬여드는 것일까.

갑자기 옛날이 그리워진다. 나는 형사였다. 120kg 몸무게를 가지고 어떻게 형사 짓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처음부터 그런 몸무게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면 답이 될까.

한때는 70kg의 근육질 몸매로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는 말이다.

한때. 삶의 어느 한순간을 지칭하는 이 단어는 얼마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나. 평범한 사람들은 이 말을 와인처럼 입안에 굴리는 것으로 위로받으며 산다. 나도 그렇다. 지금도 종종 보는 후배 형사들에게 미친 사마귀로 불리며 어둠의 자식들을 쫓던 시절을 노래한다.

그러면 뭐 하나. 악독한 범죄자를 상대하는 대신 지금 눈앞에 있는 의뢰인 같은 부류를 상대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데.

마음 같아서는 이게 무슨 증거가 됩니까! 의뢰인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내려치고, 정신 차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대신 얼굴을 쓰다듬어 내 쉬는 한숨을 숨겼다. 기대를 담고 기다리는 눈빛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종이에 휘갈겨진 글자 하나하나를 인두로 지지듯이 두 눈에 꾹꾹 눌러 담으며 다시 한 번 읽어 내려갔다. 이 헛소리의 어느 부분에 눈앞의 의뢰인이 미처 숨기지 못한 공포와 절망을 일으키는 당위성이 숨겨져 있는지 찾는 수고를 기울여 본다.

젠장,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해 불가능한 것이기에 눈길을 한 번 더 주는 것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해 불가능한 것은 결국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남기 마련이다. 갑자기 이해를 유발하거나 이해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해한 척을 하거나, 배척하거나,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존재 자체를 무시하거나 할 뿐이다.

그럼에도 120㎏의 고매한 인격을 가진 나는 이해해보기로 한다. 이미 이해했다거나 이해한 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하려는 노력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경주 씨는 직업이 작가시라고요?”

“그렇습니다.”

“아, 소설을 쓰시는군요.”

“아닙니다. 시인입니다. 올해 등단했습니다.”

하필이면! 쓸데없이 예민하고, 작은 것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는 통에 늘 걱정을 안고 사는 것으로도 모자라, 걱정거리가 없으면 불안해서 없는 걱정거리도 만들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작자들인,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골치 아픈 이들인 시인이라니!

갑자기 모든 것이 이해가 간다. 하긴 시인이라는 족속이 아니면 이런 종이 쪼가리를 증거랍시고 들이밀 리가 없지. 시인이란 원래 저 혼자만 이해하는 이야기를 배설하면서 타인의 이해 능력 부족에 대해 성토하는 과업을 가졌으니까.

“아, 예. 그러시군요.”

말이 헐겁게 나갔다. 시선이 부딪힌다. 의뢰인은 다른 어떤 말을 더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키지는 않지만 한마디 더 던져주었다.

“등단이란 게 꽤 어렵다고 들었는데 축하합니다. 재주가 좋으시군요.”

의뢰인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려졌다. 광대뼈 언저리가 약간 붉어진 게 보였다. 스스로 등단 사실을 밝힌 게 쑥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 인사치레가 엎드려 절 받은 격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도. 정작 부끄러운 것은 당신의 정신 상태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는다.

“그건 그렇고 사건의 개요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그래, 의뢰는 의뢰일 뿐이고, 수락 여부야 나중에 결정하면 되겠지. 상담에도 시간당 페이가 들어온다는 것을 잊지 말자. 먹고는 살아야지.

“먼저 제가 가장 궁금한 것은 장경주 씨가 짐승이 산다고 믿는 이유입니다.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제가 장경주 씨를 안 믿는다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드리는 질문이 아닙니다. 사건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절차일 뿐입니다. 이점 양해해 주시고 솔직하게 숨기는 것 없이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처음부터,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주시면 됩니다. 아, 선생님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죠?”

“선생님은 이, 동자, 진자 되세요.”

이동진이라. 유명한 사람인가 보군. 의뢰인은 내가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지만 나는 이동진이란 사람을 모른다. 고백한다. 나는 문학의 ㅁ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관심도 없고 앞으로도 관심을 둘 생각이 없다. 우리 형 같은 사람을 곁에 두면 내가 왜 이렇게 문학이라면 치를 떠는지 알게 될 것이다. 우스운 건 그런 형을 둔 덕에 어지간한 소설의 스토리는 다 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다르다. 형이 시도 읽어준 적이 있지만 줄거리가 없는 시는 쉽게 잊어버렸다.

“이동진 씨라. 그렇군요. 계속 얘기하시죠.”

의뢰인은 살짝 실망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마도 내가 이동진이란 사람에 대해 놀라거나, 무언가 더 말해주길 원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 대단한 선생님을 둔 자신을 새롭게 봐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대신 나는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말을 재촉했다.

“저는 선생님의 수제자입니다. 수제자라고 해도 요즘은 그런 일이 별로 없지만 제 형편을 아시는 선생님의 배려로 선생님 댁에 몸을 의탁하고 살 수 있었죠. 청소도 하고, 밥도 하고, 뭐 그런 잡다한 일들을 하면서 선생님께 수시로 지도를 받았습니다.”

의뢰인의 말에 숨겨진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섬광처럼 사방에서 나타나 머릿속을 달려간다. 그가 처음 연락을 취해왔을 때 화상 통화 너머로 확인했던 허옇게 질린 얼굴이 떠오른다. 급하게 약속을 잡기를 재촉하던 살짝 떨리던 목소리와 다급함도.

단순한 사제 관계가 아닐지도 모른다. 결국 입 밖에 내고 만다.

“단순한 사제 관계였나요?”

“그게 중요합니까?”

의뢰인의 고개가 위협을 받은 코브라의 머리처럼 빳빳하게 들리는 것을 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대부분의 의뢰인들이 한두 번은 꼭 저런 모습을 보여준다. 당황, 분노, 수치 등 그 이유야 각양각색이지만 이럴 때 시선을 피하면 안 된다. 직시한다.

그렇군. 이번 의뢰인의 눈 속에는 칼날 같은 것이 숨어있군. 뭔가 있긴 있다는 거다. 씨줄과 날줄은 아직 엮어지지 않았다.

“사건 해결과 미해결의 차이는 대부분 정보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정보는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부분의 축적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의뢰인이 싫은 내색을 하니 더 알고 싶은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의뢰인은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듣기에 좋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과 저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그냥 사제관계일 뿐입니다. 1년 전에 사모님이 암으로 돌아가시고 선생님이 그런 뉘앙스를 풍기며 접근해 오신적은 있지만 제가 거절했습니다. 어차피 선생님도 진심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사모님의 부재로 인한 허기, 거기에 이용되어 관계를 망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선생님도 곧 정신을 차리셨고요.”

그가 말하는 관계란 무엇일까. 스승이라는 이에 대해 말하는 의뢰인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저런 눈빛을 알고 있다. 매혹된 자의 눈빛에 노출되는 것은 불안하고 불편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괜한 호기심으로 질문을 던지지 말 것을 그랬다.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이제 그 짐승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를 들어보죠. 짐승의 존재를 믿으시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믿지 못하시는군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정말 짐승은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 집 책들 속에 살고 있단 말입니다!”

의뢰인은 탐정사무소를 방문한 뒤 처음으로 약간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믿지 않는다는 말은 한 기억이 없습니다만.”

하아, 집에 미지의 짐승이 출몰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책 속에 짐승이 산다니.

속내를 감춘 표정으로 의뢰인과 시선을 맞춘다. 웃음기도, 지나친 호기심도, 약간도 불신도 드러내지 않고. 몇 초간의 시간을 기다려 준 후 넌지시 말의 물꼬를 터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럼 계속하시겠습니까?”

“다른 집 책들 속에도 짐승이 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딘가의 집에는 있고, 또 어느 집에는 없겠죠. 어쩌면 탐정님 집에도 짐승이 살지 모릅니다.”

의뢰인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 집에는 책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까. 책이란 책은 다 형이 가져갔다.

“책 속에 짐승이 살고 있다고 확신하시는 이유는 뭐죠?”

의뢰인이 옆에 두었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방 속에서 집에서 가져온 듯한 책을 꺼내 내밀었다. 책을 받아든다. 표지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인다. 하드커버 질의 책은 제법 무겁다. 후드득 넘겨봤지만 도통 이상한 걸 모르겠다.

“천천히 넘겨보세요.”

이런, 난 책만 보면 멀미가 나는 사람인데.

책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겨보자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문장 중간 중간 있어야 할 글자들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글자 대신 자리를 차지한 것은 빈 공간이었다.

예를 들어, ‘사랑해’란 문장이 있어야 할 곳에 ‘사( )해.’ 이런 식이다.

문제는 그런 문장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것. 바람이 솔솔 들락거려도 될 만큼 문장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굳이 세어보지 않아도 한 페이지에 열댓 군데는 될 것 같았다.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이게 뭐죠? 인쇄가 잘못된 건가요?”

*

생각해보면 형은 어릴 때부터 어딘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한마디로 별종. 책이라면 치를 떠는 나와 달리 항상 무언가를 읽었다. 책, 신문, 잡지 등은 물론 전단지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그냥 읽는 게 아니었다. 단 한자도 빠짐없이 읽었다. 책을 예로 들면 머리말이나 추천사, 주석은 물론 참고도서 목록까지. 잡지는 광고 지면까지.

길을 돌아다닐 때도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간판과 가게 밖에 쓰여 있는 글자들, 정류장의 버스 노선표, 지나가는 택시의 회사 이름 등 눈에 보이는 모든 문자들을 중얼중얼 거렸다.

형은 심각한 활자 중독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더 있었다.

형과 내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나는 형이 자신이 읽은 책을 이야기로 풀어서 들려주는 시간을 나름 즐겼다. 독후감 숙제를 할 때에는 형이 대신 책을 읽고, 나는 형의 이야기를 듣고 숙제를 했다. 형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하지만 성격차이만큼 사이가 멀었던 것도 사실이다. 책과 함께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려는 형은 한심했다. 마치 태어난 목적 자체가 책을 읽는데 있는 것처럼 굴 때는 정말이지 한 대 때려주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그런 형에게 선물 받은 책을 읽으라며 던져주는 게 아니었다.

그 책이 하필이면 인간 분열에 대한 책이었다니 운명이란 정말이지 짓궂은 손을 가지고 있다.

*

“인쇄가 잘못된 게 아닙니다. 짐승이 먹어치운 거죠. 자세히 좀 들여다보십시오.”

의뢰인은 답답하다는 듯 내 얼굴에 책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뒤로 물리는데 언뜻 보이는 게 있었다.

활자와는 다른 이질적인 무엇. 책 속에 있어서는 안 되는 어떤 것.

“이게 뭐죠?”

“저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커다란 책벌레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아닌 것 같았죠. 그래서 저랑 선생님은 그냥 짐승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니, 부르고 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과거형으로 말하면 다시는 선생님을 못 뵐 것 같아서…….”

“계속하시죠.”


“짐승을 처음 눈치 챈 건 선생님이 아니라 접니다. 어느 날 읽고 있던 책에서 글자가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죠.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밤에는 서걱 서걱거리는 소리가 책장에서 들려오고, 마치 무언가를 갉아먹는 소리 같았죠.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짐승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건 선생님입니다. 전 제대로 쳐다보질 못했죠. 하지만 사라진 글자 사이에서 짐승의 빨간 눈만은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대나무 숲을 걸어가는 배부른 호랑이처럼 글자와 글자 사이 빈 공간 뒤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네발 달린 짐승의 빨간 눈.”

아닌 게 아니라 책 속에 짐승이 보였다. 빨간 눈이 뻔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책장을 덮어버렸다.

환청처럼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한동안 들려왔다.

*

먼저 느낀 것은 몸의 이상이었다. 일란성 쌍둥이인 형과 나는 공유하거나, 각각 배척함으로써 한쪽으로 치우친 욕망과 감각들을 가졌다. 예를 들어 형과 나는 서로의 위험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하게 감지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이 육감이라고 부르는 그런 종류의. 이건 서로 공유하는 감각이다.

반대로 심각한 활자 중독은 형에게 쏠린 욕망이었다.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음식에 대한 데미지는 형의 것까지 내가 짊어지고 있다. 나는 형의 심각한 활자 중독에 버금가게 각종 알레르기를 달고 살았다. 내가 먹는 음식뿐 아니라 형이 먹는 음식에 대한 반응도 내게 몰려왔다. 때문에 동생을 적당히 사랑하는 형은 음식에 대해 어느 정도 조심하는 편이었다.

“시팔, 대체 뭘 처먹고 있는 거야?”

며칠째 가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일은 흔치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렇다면 내가 알 텐데. 집에라도 찾아가고 싶었지만 보름째 이어지는 잠복근무 때문에 도통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문자를 남겨 두고 다시 잠복근무에 집중……, 집중할 수 없었다. 아, 정말 가려워 미치겠네.

“그만 좀 긁어요. 나까지 가렵네.”

같이 잠복 중이던 파트너의 시선이 닿은 팔뚝에는 붉은 선들이 마치 자해의 흔적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좀 심하다 싶은 게 어떤 선들에는 엷은 핏방울이 맺힌 곳도 보였다. 민망함에 팔뚝을 가렸다. 그 짧은 순간에도 가려움은 계속해서 짧은 손톱의 방문을 기다리는 듯 피부 아래로부터 꿈틀거렸다.


“내가 긁고 싶어서 긁냐?”

“그러니까 좀 씻고 다니세요. 아무리 잠복근무 중이라지만 선배는 정말 너무해요. 제가 보고 있을 테니까 저기 지하철 화장실에 가서 세수라도 하고 와요. 머리도 감고 오면 더 좋고.”

“됐어. 교대할 사람 오면 집에 가서 씻을 거야. 씻고 푹 자야지.”

차에 구비해 둔 얇은 모포를 뒤덮고 드러누웠다. 모포 속에서 손은 다시 팔뚝으로 향했다.

한 시간쯤 지나자 교대 조가 도착했다. 베테랑 형사인 정 형사와 신참인 이 형사였다. 서로 전달사항을 주고받고 자리를 뜨려 할 때였다.

“어이, 오 형사 살쪘어? 재주도 좋네. 잠복근무하면서 살도 찌고.”

“뭐라는 거야. 내가 살은 무슨 살이…….”

분명히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어야 됐는데. 뭐지 이 물컹하게 느껴지는 뱃살은?

그것이 시작이었다.

*

먹지도 않은 달걀 알레르기에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가려움에 고통 받고, 70㎏의 가뿐했던 몸무게가 100㎏ 늘어났을 무렵 겨우 형을 만났다. 그동안 형은 이런저런 이유로 나를 피했다. 집으로 찾아가도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전화도 안 받았다. 전화벨 소리가 안 들리는 것으로 보아 집에 없을지도 몰랐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유산 덕분에 집에 처박혀 좋아하는 책만 붙잡고 살던 형이 갈만한 곳을 짐작할 수 없었다.

- 난 잘 있어. 집에는 없어. 알레르기 심하지? 미안해. 지금 하고 있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조금만 참아줘.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겨우 받은 문자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가려움도 살이 찌는 것도 다 형 때문이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망할, 형! 대체 어디에 처박혀서 뭘 하고 있는 거야!

형은 제법 온순한 사람이었지만 한번 고집을 부리면 도통 말릴 수가 없었다. 어디에 숨어있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기다릴 수밖에. 형이 전한 조금이라는 말이 한 달인지 1년인지 만이라도 알고 싶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문자로 물어본다는 것이 왠지 지는 것 같아서.

- 만나러 올래?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형이 다시 문자를 보내온 것은 두 달여가 지난 후였다. 알레르기 약을 꼬박꼬박 섭취하고, 생애 한 번도 찍어보지 못했던 120㎏의 몸무게에 허덕이던 어느 날이었다. 형이 알려준 장소의 이름은 거창했다. ‘국제 무성생식 메디컬 연구 센터.’

*

국제 무성생식 메디컬 연구 센터라는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다. ‘녹색 인류 프로젝트 실행 센터’와 더불어 지난 십여 년간 세간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국제기구였으니까. 사람들은 두 기관을 두고 인류를 지켜줄 최선의 선택이자 최후의 생존전략을 이끄는 쌍두마차라고 불렀다.

그렇게 불리는데 딱히 반감은 없었다. 국제 무성생식 연구 센터는 전 세계적으로 발생되고 있는 이유 불명의 불임으로 인한 인간의 멸종을 막기 위해 무성생식을, 녹색 인류 프로젝트 실행 센터는 점점 극심해지는 식량난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연구를 한다니 그 대의명분만은 인정해줄 가치가 있지 않은가. 두 기관의 행보가 너무 비밀스럽다 해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탄생 배경과 구체적인 연구방향이었다. 두 기관 모두 어느 소설가가 쓴 ‘두 개의 바나나에 관하여’란 단편소설로부터 힌트를 얻어 설립되고 그 소설 속 내용을 연구하고 있다는데,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인류를 지켜줄 최선의 선택이자 최후의 생존전략을 이끄는 쌍두마차라는 것은 헛소리가 분명했다. 아니, 그 두 단체에 속한 모두가 미친 것이 분명했다.

‘두 개의 바나나에 관하여’란 소설 내용을 알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그 소설은 오래전 내가 형에게 던져 준, 선물 받은 책의 제목이다. 형이 읽고 들려준 바에 의하면 ‘두 개의 바나나에 관하여’란 소설에는 달걀을 주식으로 한 레시피로 인간의 살을 찌운 후 한 사람을 각각의 주체인 두 사람으로 분열시키는 무성생식 방법과, 인간의 신체에 나노 칩을 이식해 식품을 섭취하는 대신 식물처럼 광합성으로 영양분을 생성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게 말이 되나? 얼마 전 분열을 통한 무성생식 지원자를 모집한다는 얘기를 흘러가는 말로 듣고, 지원을 하면 국가가 상당액의 생활비와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공고까지 봤지만 여전히 그 연구 방향에 대해서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무성생식에 찬성하는 편도 아니었다. 극심한 반대론자까지는 아니지만 딱히 인간이 멸종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지도 못했다. 오래전 멸종한 공룡이나 몇 년 전에 멸종한 일각고래보다 인간이 더 오래 살아남아야 할 무언가를 인류가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형도 나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국제 무성생식 메디컬 연구 센터’ 내에 거주 중이라니.

설마, 그 소설이. 그럴 리가. 내가 달걀 알레르기로 고생하고, 살이 찐 이유가 정말……. 에이, 그건 아니겠지.

*

“인사해. 나의 분열된 자인 이원이야.”

오래간만에 만난 쌍둥이인 형 옆에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얼굴을 가진 자가 서있었다. 형은 자신이 무성생식에 성공했다고 어린아이처럼 신나는 얼굴로 떠들어댔다. 자신처럼 분열을 하는 자를 ‘분열자’, 이원 같이 분열자에서 분열된 사람을 ‘분열된 자’로 부른다는데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우리는 한동안 일란성 세쌍둥이처럼 똑같은 얼굴로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간의 일은 들을 수 있었다. 들었다고 쉽게 믿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정말 달걀을 먹고 살을 찌워서 분열까지 이를 수 있다니.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형, 잠깐만 이리로 와서 나하고 얘기 좀 해. 이원 씨 만나서 반가워요. 급한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 잠시 여기서 기다려요.”

나는 이원이라고 불린 자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형을 끌고 갔다.

“형, 미쳤어?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야? 돈이 필요했어? 그럼 나한테 먼저 의논을 했어야지!”

그래, 분열을 할 수 있다 치자. 하지만 형이 분열을 꼭 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무슨 소리야. 돈이야 부모님이 남겨주신 것으로 충분하잖아.”

“내 말이 그 말이야. 돈도 필요 없으면서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벌였냐고. 내가 요 몇 달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알레르기는 그렇다고 쳐. 이 몸무게는 어떡할 거야?”

센터에서 제공하는 레시피 대로 먹고 분열에 성공했다는 형은 이미 예전의 몸무게를 되찾은 듯 날씬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120㎏의 몸무게로 형사 질을 하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를 것이다.

“빼면 되지 뭐. 너 그런 거 잘 하잖아. 뛰고, 차고, 때리고, 뭐 그런 운동 같은 거.”


“야!”

형이고 뭐고 한 대 패고 싶었다. 이게 지금 말인가, 똥인가.

“미안해. 하지만 이해 못해도 어쩔 수 없어. 난 내가 더 필요해.”

내가 더 필요하다니. 대체 왜! 형이 그 정도로 자기애가 충만한 사람이었나? 아니라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아니, 그걸 떠나서 같은 얼굴의 분열된 자라고 해서 그 정체성을 또 다른 나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한가? 복제건 분열이건 두 개의 사과는 두 개의 사과지 하나의 사과는 아니지 않나?

형은 정말 미안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속을 내가 아니다. 형의 눈빛 안쪽에 반짝이는 희열을 놓치지 않았다. 익숙한 눈빛. 설마, 라는 의혹과 혹시, 라는 의심이 강렬한 두통과 어지럼증과 함께 찾아왔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다독은 정신병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겨우 책 좀 더 읽겠다고 자신을 분열 시켰을까. 분열자와 분열된 자 사이의 메커니즘을 모르긴 하지만 분열이란 것이 온전한 나를 증식하는 방법은 아닐 텐데.

형이 내려오기 전 보고 있던 국제 무성생식 메디컬 연구 센터의 소개 영상에도 분명히 나와 있었다. 인류가 멸망의 타개책으로 복제가 아닌 분열을 선택한 것은 생명체의 다양성이 확실하게 확보되기 때문이라고.

저만치 떨어진 곳에 멀뚱하게 서있는 이원이란 사람이 보였다. 생전 처음 보지만 나와 형과 같은 얼굴, 같은 키를 가진 이원이란 사람은 나의 형인가 동생인가.

머리가 아팠다.

*

“선생님은 분노하셨습니다. 무서워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두려움보다 분노가 더 큰 것 같았습니다. 맞습니다. 짐승이 활자를 먹는다는 걸 용서하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짐승을 책 속에서 꺼낼 방도가 없었으니까요. 그 사이 저는 신춘문예에 당선이 됐습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저는 그 상금으로 생애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게 되고요. 사실 빚도 있고 등단했다고 생활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서 앞일을 생각하면 상금을 쓸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앞으로 좋은 글을 쓰려면 안목을 넓힐 필요가 있다면서 해외여행을 권유하셨죠. 그깟 몇 백 있어도 가난하고 없어도 가난하지 않느냐, 어차피 글쟁이에게 가난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특히 시인은 돈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뭐 이러시면서요. 정작 그렇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은 베스트셀러 작가라 돈도 잘 버셨지만요.”

의뢰인은 계속해서 여행을 가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는 얘기, 짐승과 선생님만 남겨 놓은 것이 걱정이었다는 것 등을 늘어놨다.

“하루에 세 번씩은 꼭 선생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오히려 혼자 여행 중인 저를 심려하셨죠. 저는 선생님과 같이 여행하고 싶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처음 가는 해외여행은 혼자 가는 게 좋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사모님 제사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이번 년이 삼 년 탈상을 하는 때니까요.”

“책을 내다 버리면 되지 않았습니까?”

“해봤죠.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면서 오랫동안 모아오신 책들을 전부 내다 버릴 때 선생님의 표정을 보셨어야 합니다. 하지만 새로 책을 사면 짐승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고 책을 안 살 수도 없지 않습니까? 선생님이나 저나 직업이 시인인데.”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모두 다 비슷한 얼굴들을 하는 건지. 사람들은 구분하지 못하지만 형의 얼굴과 내 얼굴은 분명히 달랐다. 책을 읽고 있는 형의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


5개월 동안 열심히 운동을 한 나는 다시 정상 체중을 되찾았다. 형이 분열을 위해 열심히 체중을 채워나갈 때는 아무리 운동을 해도 빠지지 않던 살이 형의 분열이 끝나자 너무 쉽게 빠져 어이가 없었다. 형은 1년간의 휴식기를 갖고 또다시 분열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국제 무성생식 메디컬 연구 센터의 말에 따르면 다섯 번까지는 안전하게 분열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로 인해 분열된 자가 늘어난다고 생각해봐. 그 분열된 자가 다시 분열을 하고……. 이렇게 계속 분열해 나가면 나는, 아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너는 이해하지?

형이 직접 그런 말을 했는지 그저 눈빛이 그렇게 읽혔는지는 모르겠다. 쌍둥이로서의 몇몇 경험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것이 그가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당위성까지 개진되지는 않았다.


이해는 개뿔.

이런 미친 생각을 내 형이 하고 있다니.

그럼 나는 앞으로 형이 분열을 할 때마다 지은 죄도 없이 달걀 알레르기에 시달리고 체중 70㎏에서 120㎏로 쪘다 빠졌다를 반복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무슨 고무줄도 아니고! 나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형에게 주먹을 날려버렸다.

그 후 형과는 조금 소원해진 상태였다. 이 세상에 단둘뿐인 가족이니 언젠가는 다시 예전 관계로 회복되겠지만 당분간은 형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내 존재의 부재로 형이 미친 생각을 그만두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

사달이 난 것은 형에게서 이원이 분열된 지 5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국제 무성생식 메디컬 연구센터에서 형에게 문제가 발생했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걸려온 전화가 반갑지 않았다.

*

국제 무성생식 메디컬 연구 센터 1층 로비에 칼을 쥔 채 서 있는 형은 낯설었다. 칼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 앞에는 머리가죽이 벗겨지고, 뇌까지 일부 짓이겨진 이원이 죽어있었다. 로비의 대리석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형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나는 나를 죽였다!”

“나는 나를 먹었다!”

“나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칼을 내려놓으라고 설득할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무장한 경비원들이 마취 총을 형에게 겨눴다. 형은 어이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잠시 후 경비원들이 형을 어딘가로 끌고 갔다.

국제 무성생식 연구센터의 사무장이란 사람으로부터 들은 자초지종은 들을수록 기가 막혔다. 형이 자신의 분열된 자인 이원이 읽은 책의 지식을 탐냈다는 것이다. 분열이 가능하면 반대로 합체 역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망상같은 이론을 세운 형은 이원과 다시 한 몸이 되길 원했다. 이원이 이를 거부하자 살인을 하고 뇌를 파먹으려 했다는 이야기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죽은 게 이원인지 형인지도 헷갈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형은 감옥에 수감되지는 않았다. 아직 인간의 분열을 통한 무성생식의 연구가 초기 단계여서 분열된 자의 인권이 성립하지 않았던 탓이다. 당시 사람들은 분열된 자가 새로운 주체인지, 아니면 단순한 복제인간이나 호문쿨루스와 마찬가지인지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로 인해 형의 주장 - 나는 나를 죽였다! - 은 법의 판결에 대혼란을 가져왔다. 이 사건을 자살로 봐야 하는지, 타살로 봐야 하는지, 자살이 맞는다면 법의 처벌을 내릴 수 있는 건지, 변호사와 검찰 사이에서 치열한 갑론을박이 오갔다.

형에게는 다행히 판사가 그리 인권의식이 투철한 인사가 아니었다. 세상에 갓 태어나기 시작된 극히 소수의 분열된 자를 인간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닌지 아직은 판단할 수 없다는 미명하에 형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국제 무성생식 메디컬 연구 센터의 힘도 컸다. 인간 종족의 멸망을 막는다는 화두를 앞에 내세운 연구자들은 형의 케이스를 분열자와 분열된 자와의 관계 샘플로 정신적 연구가 필요하다며 무죄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법원은 앞으로 형이 다섯 번째 분열을 할 때까지 무성생식 메디컬 연구 센터의 감시 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집행유예를 내렸다.

보통의 집행유예와 달리 무려 집행유예 기간이 8년. 앞으로 네 번의 무성생식을 통한 분열을 더 할 때까지 형은 센터에 붙잡힌 모르모트나 마찬가지였다.

예상외로 형은 별로 화내지 않았다. 책만 읽을 수 있다면 어디에 있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럼 나는!

이 일은 언론을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형과 얼굴이 똑같이 생긴 나는 어딜 가나 주목의 대상이 됐다. 공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형사 일을 그만두고 탐정사무실을 개업한 이유다.

그리고 세상에는 형처럼 별난 족속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형이 이원을 죽이고 외친 ‘나는 나를 죽였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글쟁이 등 예술가와 창작자, 철학자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찬반양론은 있었지만 그 단발마가 인간 주체와 실존에 관한 깊은 성찰과 철학을 담고 있다는 데에는 양측 모두 동의했다. 선악을 떠나 형은 이 시대의 사상가나 고승처럼 시대의 화두를 던진 자로 평가되었다. 형이 읽은 책이 어마어마하다는 게 밝혀져서 일지도 모른다.

그 여파는 내게도 미쳤다. 그들은 탐정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면 지금 눈앞의 의뢰인처럼 나를 찾았다. 형과 내가 일란성 쌍둥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에. 쌍둥이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내가 형과 같은 외모를 가진 것만으로 생각도 공유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생각 외로 글쟁이, 예술가, 창작자, 철학자들에게 탐정이 필요한 일이 많았다. 내가 글쟁이 등의 전문 탐정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덕분에 탐정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굶어죽는 일은 없었다.

나중에는 호기심 많은 과학자들도 단골 고객이 되었다. 과학자들은 나를 통해 형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찾아 왔다가 고객으로 정착했다. 이런 일련의 연쇄들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글쟁이들이란, 예술가들이란, 창작자들이란, 철학자들이란, 과학자들이란, 책벌레들이란.

아이고, 말해 뭐 하나. 내 입만 아프다.

*

“그럼 선생님이 실종된 건 언제부터입니까? 장경주 씨가 여행에서 돌아오신 후입니까?”

“아닙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가 여행하는 도중에 발생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여행지에서 매일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는 사실은 이미 말씀드렸죠? 그런데 일주일 후부터는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전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물론 하루 정도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그날이 정확하게 탈상을 하는 날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삼일 동안 연락이 되지 않자 바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겁니다. 선생님의 필적이 분명한 메모를. 네, 탐정님이 들고 계신 그 파일에 들어있는 그 메모 말입니다. 선생님은 왜 그 메모를 버리신 걸까요? 평소 어떤 메모든 버리는 일이 없으신 분인데. 글 쓰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습니다. 아무 때나 아이디어나 문장이 떠오르면 잊어버리기 전에 여기저기에 메모하고 소중하게 보관하죠. 언제 그 아이디어나 문장이 쓰일지 모르니까. 어쩌면 선생님은 제게 증거를 남기신 거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과 연락이 끊긴 게 열흘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집필을 위해 어딘가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계시다고 생각해보진 않았습니까?”

성인 남자다. 무슨 이유에서건 제 발로 걸어 나가 잠적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죽은 부인 에 대한 생각이 갑자기 간절해져서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글쟁이들만이 가진 침잠 병과 방랑벽의 결합일 수도 있고.

“아니요. 선생님은 집 밖에서는 글을 잘 못 쓰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의뢰인의 손짓에 따라 나는 다시 책장을 열었다. 그의 손가락이 짐승을 가리켰다. 이번에도 그는 짐승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짐승의 등허리에 박혀있는 만년필이 눈에 들어왔다.

*

형이 국제 무성생식 메디컬 연구 센터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몇 년 전이다. 나는 제일 먼저 형에게 1년에 적어도 1만 5천 권의 신간을 제공해 주라는 내 조언을 지켰는지 물었다. 그들은 대답을 우물거렸다.

자살이나 타살일 염려는 없었다. 형이 죽었다면 내가 느꼈을 테니까. 그래서 걱정하지 않았다. 집에도 들른 흔적은 없었지만 어딘가에서 마음이 가는 대로 책과 함께 잘 살고 있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국제 무성생식 메디컬 연구 센터의 추격이 느슨해지면 연락이 올 것이다. 그전에 내가 찾아 나서는 것은 이로울 게 없다.

애초에 연구센터에 형을 가둔다는 것이 난센스였다. 온갖 추리소설과 범죄소설은 물론이고 심리학과 범죄학 등의 책을 독파한 형이 마음만 먹는다면 탈출은 식은 죽 먹기였다. 어렸을 때도 그랬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미로정원에서도 형은 길을 잃는 일이 없었다. 한때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탈출 카페를 찾아다니며 도장 깨기를 하듯 최단시간 탈출이라는 신기록을 수립하는 취미를 잠시 가졌던 적도 있다.

책을 읽는 것 외에 형이 가졌던 유일한 취미였다.

*

형이 분열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달걀 알레르기가 또 찾아왔고, 체중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 무성생식 연구센터를 탈출한 형이 혼자서도 분열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 분명했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형은 국제 무성생식 메디컬 연구 센터를 탈출한 후에도 세 번의 분열을 더 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다섯 번의 분열이 가능하다고 했으니 이제 단 한 번의 분열만 남은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여전히 짜증이 나긴 했지만 곧 끝날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기다릴 수 있었다.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42.195㎞ 마라톤의 결승선이 보이는 지점에서 포기하거나 무너지는 사람은 아니니까.

오히려 문제는 아무래도 형이 분열에 그치지 않고 뭔가 다른 행동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직감은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형이 먹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먹고 있다고.

한 번씩 찾아오는 극심한 구토감이 예사롭지 않았다. 뇌가 텅 빈 시체가 발견됐다는 뉴스가 종종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형을 추적하는 일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형은 쉽게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경찰은 국제 무성생식 연구 센터의 의뢰로 아직도 형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는 가끔 후배 형사를 만나 정보를 얻었다.

“새로운 소식은 좀 없어? 작은 흔적이라도.”

“아뇨. 정말 감쪽같다니까요. 천재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흔적을 안 남길 줄은 몰랐어요. 마치 완전범죄 같아요.”

“센터에서는 뭐래?”

“정말 센터 때문에 미치겠어요. 잃어버린 건 자기들이면서 우리들 보고 찾아내라고 얼마나 닦달을 하는지. 몇 년 동안 정말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에요. 그러게 애초에 감옥에 집어넣었으면……. 아, 미안해요. 그래도 선배 형인데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형이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니까. 형사는 형사가 할 일을 해야지.”

뜨거운 사우나에 달궈진 몸을 일으켰다. 겸연쩍은 얼굴의 후배를 위해 먼저 자리를 비켜주려 한 것이다. 몇 분만 시간을 주면 후배도 따라 나올 것이다. 그러면 오래간만에 밥 한 끼나 같이 해야겠다. 가끔 말실수를 하긴 해도 형에 대한 수사 상황을 주기적으로 알려주는 친구다.

“어, 선배 잠깐만요. 오른쪽 등에 그거 뭐예요? 누구랑 싸우기라도 했어요? 연장에 찔린 것 아니에요?”

“싸우긴 무슨. 뭔데 그래? 잘못 본거 아냐?”

후배의 시선이 고정된 곳을 바라보려 머리를 뒤로 돌려봤지만 잘 보이질 않았다. 그런 내가 답답했는지 사우나 밖 거울 앞으로 끌고 간 건 후배였다.

“잘못 보긴. 자 봐요. 이거 안 보여요?”

“정말이네. 꼭 송곳 같은 거에 찔린 거 같잖아. 이게 왜 생겼지?”

“이 선배가 정말. 선배, 너무 감 떨어진 거 아니에요? 자신이 찔린 것도 모르다니. 선배가 잡아넣은 놈들이 한둘이 아닌데 걱정도 안돼요? 안 그래도 장안파 살모사가 출감했다는데.”

그러고 보니 엊그제 샤워를 하는 도중에 등 쪽에 심한 통증을 느끼긴 했었다. 한동안 운동을 소홀히 해서 생긴 근육통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찔린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다. 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

“저건 분명히 선생님이 애용하시던 만년필입니다. 몇 년 동안 선생님은 저 만년필만 쓰셨습니다.”

“그렇다는 말씀은?”

“네. 전 선생님이 짐승과 싸우셨다고 생각합니다. 보십시오! 저 짐승의 포만감에 찬 눈을! 늘어난 배를! 지금까지 짐승이 저런 눈을 한 적이 없습니다. 활자만 먹고살았을 때는 말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짐승은 꽤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자간 사이에 몸을 누이고 활자에 기대 제 배를 쓰다듬으며 널브러져 있는 게 포만감을 즐기는 듯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일을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책 속에 들어갈 수도 없고, 짐승이 책 밖으로 나온 다해도 이길 자신이 없는데!

“제게 원하시는 게 정확하게 뭐죠?”

“선생님을 찾아 주시길 바랍니다. 저 짐승이 먹어치웠다면 뼈라도 찾아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

만년필이라. 설마 아니겠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거울 앞에 서서 상의를 벗었다. 등에는 아직도 무언가에 찔린 듯한 흔적이 보란 듯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만년필에 찔렸다고 봐도 무리가 없는.

어쩐지 눈도 좀 빨간 것 같다. 얼마 전부터 생긴 알레르기가 점점 심해져 가고 있다. 이번에는 의사도 무엇으로 인한 알레르기 인지 정확하게는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짐작하기로 닥나무나 사시나무 같은 나무 종류로 인한 알레르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하필 종이를 만드는 원료로 잘 알려진 나무들이라니.

‘그래도 선배 형인데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후배랑 나눈 몇 마디 말에서 유독 걸리는 한 단어에서 잠시 시선을 돌린다. 몇 년 사이 세상은 조금 더 변화했다. 국제 무성 생식 메디컬 연구센터와 녹색 인류 프로젝트 실행 센터도 극도로 비밀스러운 행보를 이어갔던 예전과는 달리 점점 정보를 공개하고 있었다. 무성생식 지원자를 적극적으로 모집했고, 세상에는 형과 같은 분열자와 이원과 같은 분열된 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분열자가 되면 다섯 번의 분열을 할 수 있다는 것, 분열된 자와 분열된 자에서 다시 분열된 자 역시 분열을 할 수 있지만 그 횟수는 최초의 분열자보다 적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는 10세 미만인 분열자의 경우에는 첫 번째 분열된 자가 외모뿐 아니라 마치 쌍둥이와 같은 특성을 지닐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는 정보도 누출됐다.

녹색 인류 프로젝트 실행 센터도 첫 녹색 인간이 탄생을 알렸다. 발표에 의하면 나노 칩의 이식으로 인간이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광합성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5년간의 추적으로 검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녹색 인간이 되기 위한 나노 칩 이식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당장은 식량난 해결에 별 도움이 안 될 것으로 보였다. 뉴스에 의하면 나노 칩 이식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지 않는 한 식량난 해소에 사용되기보다는 부자들의 다이어트 방법으로만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책상 위에 형과 찍은 사진이 보였다. 여섯 살 무렵에 찍은 사진이라고 들었다. 형과 함께 찍은 사진은 이게 처음이었다. 아니 가족사진 중 내가 등장하는 최초의 사진이었다.

“일란성 쌍둥이라.”

통제하지 못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형은 어렸을 때부터 달걀 요리를 무척 좋아했다.

*

의뢰인을 기다리는 동안 문득 이원이 생각났다. 이원을 떠올리는 일은 좀처럼 없었는데.

이제 와서야 인정하는 일이지만 나는 이원이 불편했다. 이원과 형이 국제 무성생식 메디컬 연구센터에서 같이 살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치게 됐지만 몇 번을 봐도 불편함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나는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인데 두 사람을 만나고 나면 원하지 않는 질문들이 생겨서 싫었던 것도 같다. 이원을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같은. 유년기의 성장을 거치지 않은 생명체의 존재는 낯설었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지식을 탑재한 두 눈을 바라보는 것은 두려웠다.

무엇보다 이원은 어느새 분열자인 형과 비슷한 지식수준과 정보의 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형처럼 책을 탐독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계속되는 형의 요구에 오랜만에 국제 무성생식 메디컬 연구센터를 방문한 날의 일이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1층의 카페테리아에 발을 디딘 순간 나는 쉽게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넓은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은 받으며 소파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는 이원과 형을.

무슨 이유인지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미묘한 기분 속에 더 이상은 이원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속도 무시하고 뒤돌아섰다. 카페테리아를 빠져나왔다.

핸드폰이 계속 울렸다. 보지 않아도 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받지 않았다.

완벽했던 나무 바닥에서 비틀린 단 하나의 나무판을 발견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그걸 보면서 깨달았다. 두 사람 중 누가 이원이고, 누가 형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는 것을.

횡단보도 너머로 의뢰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

의뢰인을 따라 그와 선생이 같이 살던 집으로 들어갔다. 글쟁이 둘이 살던 집 아니랄까 봐 여기저기 책이 잔뜩 쌓여있었다. 한번 깡그리 버렸다는 게 이 정도라니. 이 인간들도 활자 중독자가 맞다.

서재에는 더욱 많은 책들이 붙박이 책장에 들어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여기저기 이빨 빠진 책 제목들이 눈에 띄었다.

「백 ( ) 동안의 ( )독」

「어디에도 ( ) 땅은 ( )다」

「사랑의 ( )악」

…….

책을 읽지 않는 나는 그 이빨 빠진 빈 공간에 정확하게 무슨 글자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무언가 커다란 것이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다. 책들을 보고 있는 것이 불편했다. 의뢰인이 들고 온 선생님의 메모라는 것에 적혀있던 글들이 생각난다.

책 속에 짐승이 산다. 어둠 속에 깜박이는 눈들이 있다. 해진 책표지의 제목들 사이로 시간이란 우울에 표백된 글자들 마른 우물이 되어 제 안에 짐승을 키웠다. 짐승들이 헐거워진 자간의 창살을 뜯어내며 우람한 어깨를 앞세워 밀고 나온다. 짐승을 마주치면 절대 등을 보이며 도망치지 말라는, 죽은 듯이 가만히 있거나 조심조심 뒷걸음쳐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아주 쉽게 짐승들을 외면했다. 책들이 악랄해졌다.

나는 들고 온 연장을 확인했다.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허리에 쇠몽둥이를 찼다. 온몸 여기저기 숨겨둔 칼과 전기 충격기도 있었다. 뒤춤 허리띠에는 장도리를 꽂아 넣었다. 이 많은 책들 속, 어느 책에 짐승이 머물고 있을까.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귀를 기울였다. 바스락바스락 서걱서걱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본능적으로 책 속의 짐승도 나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밀란 쿤데라’의 책 앞에 선 순간이었다. 책 제목에서 갑자기 세 글자가 사라졌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순식간에 「참을 수 없는 ()()() 가벼움」이 됐다. 눈앞에서 빈 공간을 훑고 지나가는 붉은 혀가 보였다.

나는 재빨리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을 펼치자 수도 없이 사라진 글자들이 허공처럼 눈에 들어왔다. 허공은 점점 그 수를 늘리며 넓어져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짐승과 눈이 마주쳤다. 놀라 책을 놓칠 뻔 했다. 짐승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책의 자간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짐승도 앞발로 자간 사이를 벌려 나갔다. 쇠창살을 힘으로 뚫고 나오는 것처럼 짐승이 뛰쳐나왔다. 나도 달려 나갔다.

생포해야 한다.


출처: 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id=1531&s_para1=174&Board=n9998&admin=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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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 **APCTP 선정, 올해의 과학도서 온라인 저자 강연** APCTP 에서는 매년 올해의 과학도서 10권을 선정하고 있는데요. 해당 도서들의 저자 강연도 진행합니다. 올해는 온라인 저자 강연으로 진행하게 되어 더 많은 분들이 함께 하게 되었는데요. 첫번째 시간으로 해도연 작가의 '외계행성:EXOPLANET'을 만나보겠습니다.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 **APCTP 선정, 올해의 과학도서 온라인 저자 강연** APCTP 에서는 매년 올해의 과학도서 10권을 선정하고 있는데요. 해당 도서들의 저자 강연도 진행합니다. 올해는 온라인 저자 강연으로 진행하게 되어 더 많은 분들이 함께 하게 되었는데요. 첫번째 시간으로 해도연 작가의 '외계행성:EXOPLANET'을 만나보겠습니다. 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