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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 Street] K-자존감 / 20.7 크로스로드

장대익 /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일러스트레이션: 김민정)


고등학교 진학 후 한 달은 인생의 쓴 맛을 처음 맛본 시기였다.1) 중학교 성적이 최상위권이었고, 과학경시대회 수상자였으며, 과학영재들만 모인다는 기숙학교에 당당히 붙었지만, 고등학교 첫 시험 성적이 그야말로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예비 신입생에게 내준 과제를 거들 떠 보지 않았던 터였으니 말이다. 첫 시험 성적을 받아 본 후부터 일주일 동안 모든 고민은 ‘어떻게 해야 자존심을 크게 다치지 않고 학교를 떠날 수 있을까’였던 것 같다. 다 나보다 똑똑해보였고 나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만일 그때 체육관에 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 고등학교 졸업장은 달라졌을 것이다. 좌절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자율학습을 마치고 탁구대가 비치된 학교 체육관에 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동급생들과 탁구 경기가 시작되었다. 하루, 일주일, 이주일이 지나자 나는 더 이상 상대할 선수가 없었다. 중학생 시절 동네 탁구장에서 두 달 간 정식으로 레슨을 받은 덕이었다. ‘뭐야. 탁구는 내가 최고잖아! 오호 이 학교를 더 다녀도 되겠는 걸’(체육고등학교 아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그때부터 내 고등학교의 삶은 확실히 달라졌다. 친구들이 먼저 다가왔고(오는 것 같았고), 공부도 다시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코로나19 종식까지는 갈 길이 멀어 보이지만(어쩌면 그런 날은 영영 안 올 수도 있겠다), 대한민국의 코로라19 대처 능력은 지난 몇 달 동안 전 세계로부터 큰 주목을 받아왔다. “요즘처럼 국뽕이 차오른 적이 없다”, “한국이 선진국인 것은 우리만 몰랐다”고들 한다. 사실, 경제적 측면에서 우리는 이미 선진국이다. 한국은 2년 전에 일본(1992), 미국(1996), 영국(2004), 독일(2004), 프랑스(2004), 이탈리아(2005)에 이어 7번째로 3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 인구 5000만 명 이상)에 가입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경이로운 속도로 이러한 발전을 이뤄냈다는 점이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되기 전인 1961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고작 82달러로 세계 101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을 정도로 한국은 가난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는 그 때의 400배 가까이에 이른다. 1991년에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설립되어 공적개발원조를 시작함으로써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 공여국으로 전환한 최초이자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선진국이란 무엇이고 누가 정하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일단 묻지 말자. 부유한 나라를 꿈꾸던 우리 선배들이 이룩한 엄청난 성취는 민족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선진국의 관문은 GDP 하나만이 아니다. 남들보다 잘 살아도 세계에 내놓을만한 문화가 별 볼일 없다면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유구한 문화유산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의 뿌리에 관한 대답이지 그들에게도 통하는 보편은 아니다. 


그런데 BTS를 대표로 하는 K팝은 문화적 측면에서도 한국인의 자존감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BTS는 다른 K팝 스타들이 ‘넘사벽’이라고 생각했던 북미와 유럽 시장을 확실히 뚫었고 전 세계 아미(팬클럽 이름)들의 행동을 동기화했다.2)


콘서트를 직접 보기 위해 텐트를 치고 2박3일을 기다리고 있는 서양 친구들을 화면으로 목격하면서 우리 아이들은 우리 기성세대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문화적 우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게다가 올 들어 봉준호의 <기생충>이 주요 아카데미상을 거머쥐면서, 손흥민이 세계 축구계의 블루칩으로 평가받으면서, 어른들도 신이 났다. 

정치 영역은 어떤가? 대통령을 헌법에 의해 탄핵시키고 투표로 새로운 정부를 만든 촛불혁명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날아다니던 거리가 사라진지는 꽤 오래 됐고,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시민에게 물대포를 쏘게끔 명령한 이들도 사라졌다. “아무개가 대통령이 되면 당장 이민가겠다”던 이들이 모두 약속을 지켰다면 서울의 인구밀도는 조금 줄었을 테지만 이런 호기를 부렸던 이들은 조용히 잘 지내고 계신다. 


이런 맥락에서 코로나 사태는 또 다른 영역의 자존감 시험이라 할 수 있다. 지난 몇 달 간의 성적은 꽤 좋은 편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최근 한 컨퍼런스에서 “한국이 가진 세계적 표준은 단순히 방역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K-팝과 K-드라마를 비롯한 K-컬쳐, K-뷰티, K-푸드 등 수많은 영역에서 세계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3)


이른바 ‘브랜드K’는 이제 새로운 표준처럼 유행어가 되었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존감은 2002년 월드컵 이후로 최고치라 할 수 있다. 오늘날 ‘국뽕’으로 표현되는 국수주의와 국가적 자존감은 같지 않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지금 국가(대한민국)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것일까? 그저 한국에서 태어나 살고 있을 뿐인데 왜 ‘K방역’이라는 말에 어깨가 으쓱해지고 가슴이 벅차오를까? 자신이 속한 집단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행동에는 몇 가지 심리적 이유가 존재한다. 우선, 영장류는 중에서도 사피엔스는 크고 복잡한 집단을 이루며 살아왔다. 집단 내에서 음식물을 획득하고 정보를 전달하고 아이를 양육하며 각종 위협에 잘 대처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사회적 자본(사회적 네트워크)이 필요했다. 이에 소속감, 협력 의지, 충성심 등은 슬기로운 집단생활의 필수 심리로 진화했다. 


둘째, 집단에 소속함으로써 불확실성이라는 부정적 감정을 감소시킬 수 있다. 불확실성이 크다고 느낄수록 사람들은 집단성이 높은 집단을 더 강하게 동일시한다. 인생에 불안감이 몰려올 때 종교를 찾고 미래가 불투명해보일 때 팬클럽에 가입하는 법이다. 셋째, 집단이 개인보다 훨씬 더 오래 존속하기 때문에 집단에 소속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화하킬 수 있다. 죽음을 앞둔 이들이 유난히 조국을 찾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작금의 국민적 자존감 상승을 이해할 수 있는 가설은 사회적 정체감(social identity) 이론이다. 사회심리학자 타지펠(Tajfel)과 터너(Turner)에 따르면, 자신이 속한 집단은 개인의 자존감의 중요한 원천이다(Tajfel & Turner, 1986).4)


해외에서 한국 회사 제품의 광고를 보면 왠지 모를 뭉클함과 뿌듯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개인적으로는 그 회사와 무관하지만 단지 한국 브랜드이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다. 세월호 참사, n번방 사건, 각종 산업 재해와 같은 국가적 비극과 수치를 겪을 때 국민 개인의 자존감이 추락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국가가 부끄럽다고 느껴질 때 각 국민이 취할 수 있는 심리 전략은 무엇인가? 크게 세 가지다.5) 하나는 그 나라를 떠나는 일이다. 이민을 가거나, 남지만 국가를 계속 비난하며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국민의 자존감에 구멍을 낸 그 문제를 끝내 해결함으로써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방식이다. 메르스에 무너졌던 방역체계를 새롭게 정비해서 코로나19에서는 큰 성공을 거둬 K방역을 외치는 것은 바로 이런 전략이다. 마지막은 국가의 취약한 영역은 솔직히 인정하되 다른 영역들을 내세움으로써 자존감을 보상하는 방식이다. 가령, ‘대한민국의 교육 문제는 심각하지만 그래도 경제는 괜찮잖아.’라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K방역을 외치는 지금, 한국인은 어떤 방식으로 자존감을 드높이고 있는가? 몇 년 전에 실패했던 바로 그 영역(메르스 방역)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기에 우리의 자존감은 급상승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자존감을 당장이라도 추락시킬 위협 요인들은 건재하다. 가령, 작년 경향신문이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라는 특집 기사에서 보도했듯이, 산업 현장에서 안전비용 절감 등의 구조적 원인으로 사망하는 노동자 수가 하루 평균 3명이나 된다.6)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이다. 자살률도 1위를 고수중이다.  


브라질 축구팀은 역대 월드컵 대회에서 가장 많은 우승(5회 우승)을 한 팀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 세계인들이 브라질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K팝, K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뜬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갑자기 행복한 국가로 돌변하지는 않는다. 한국인의 자존감이 살짝 올라갈 뿐이다. 우리가 올려야 할 자존감의 영역은 우리 일상의 본질에 해당되는 부분이어야 한다. 삶의 현장이 여전히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K브랜드’라는 외침은 자기기만에 가깝다. 

우리 방역 시스템의 여태까지의 성공은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줄만 하다. 국민의 건강과 안전과 같은 일상의 본질적 문제에 대한 탁월한 대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존감을 ‘K방역’이라고 꼬리표를 달아주고 홍보하는 쪽에 힘쓰기보다는(원래 접두사 ‘K’는 남들이 붙어주는 것이 아니었던가!), 남아있는 본질적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심리적 동력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기존 선진국들보다 이번 방역 문제를 잘 풀었으니(잠시 우쭐), 이제 우리를 좌절케 하는 고질적 문제들에 다시 천착해보자’는 식으로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자존감의 바닥에서 별것 아닌 탁구실력으로 튀어 올랐다. 이 자존감은 학습 동기를 불어넣었고, 내 성적은 두 달 만에 전교 3등으로 수직 상승했다. 물론 그 이후의 성적은 비밀이다. 자존감은 단지 쾌감이 아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한 동력이다. ‘K-자존감’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1) 이 에세이는 저자의 칼럼(<장대익칼럼>, 경향신문, 2020년 5월 4일)을 수정 증보한 것임을 밝힌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042056015&code=990100 

2) https://www.nytimes.com/2020/03/04/arts/music/bts-map-of-the-soul-7-review.html

3)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35211&code=11131400&cp=nv

4) Tajfel, H. and Turner, J.C.(1986), The Social Identity Theory of Intergroup Behavior. In: Worchel, S. and Austin, W.G. (Eds.), Psychology of Intergroup Relation, Hall Publishers, Chicago, 7-24.

5) 내집단의 정체성이 위협받을 때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세 가지 전략에 대해서는 타지펠과 터너의 선구적 연구를 볼 것. Tajfel, H. & Turner, J. C.(1979), An integrative theory of intergroup conflict in Austin, W.G. and Worchel, S. (Eds.), The social psychology of intergroup relations, Brooks/Cole, Monterey, 33-37.

6) http://news.khan.co.kr/kh_storytelling/2019/labordeath/index.html


출처 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Board=n9998&id=1568&s_para1=178&s_para4=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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