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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 Street] 행성의 한때 / 19.11 크로스로드

길상효 /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유지원 교수) “종(種)이 아닌 개체….” 김우정 박사는 여전히 그 한마디만을 중얼거렸다. 그 말이 이제는 박사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겨우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만큼 박사의 기력이 눈에 띄게 쇠해 있었다. 재아가 물려받은 또렷한 눈동자도 간데없었다. 흐린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박사가 창밖을 향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의 앙상한 손을 한참 더 쥐고 있다가 요양원 병실을 나섰다. 김우정 박사가 사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심해에서 찾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어디에서도 답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종이 아닌 개체를 볼 것. 그 한 문장을 남기고 재아 역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 “세호! 이게 얼마 만이에요.” 동아시아기후연구소의 니나 카푸르 박사가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았다. 그가 중국과 일본 파견을 거쳐 고향인 인도에 다녀온 뒤 4년 만의 재회였다. 할머니가 됐다며 손주 사진을 보여주는 그의 얼굴에 그야말로 할머니 미소가 가득했다. “참, 커피 좀 들래요? 귀한 손님 오신대서 귀한 원두 구해 놨는데.” 카푸르가 잔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설마… 커피콩 말씀이세요? 세상에, 어떻게 구하셨어요?” “오는 길에 못 보셨나 보다. 저 건물이 아라비카 복원 연구소예요. 그 옆에 커피밭도 있고. 보여요? 실은 거기서 원두를 좀 갖다 줬어요.” 카푸르가 창밖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커피 종자의 복원 시도에 관해 듣기는 했지만 그 연구가 한반도에서 진행되고 있을 줄은 몰랐다. 20여 년 전 공식적으로 멸종 선고를 받은 이국의 식물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강원도 산중턱에서 부활을 꿈꾸고 있었다. 지구 온난화가 써낸 또 한 편의 서사였다. “거기가 고랭지채소 재배하던 데라고 들었어요. 이런 상전벽해가 또 없지요?” 유창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문어체 같은 그의 한국어도 여전히 다정하고 사려 깊게 들렸다. 듣는 사람 또한 신중하게 만드는 말투. 한 번 더 생각하고 천천히 말하게 하는 사람. 그래서 그리웠던 사람. 화성기후학회의 개최지가 동아시아기후연구소라는 것을 통보받은 순간 카푸르를 가장 먼저 떠올린 것도, 일정을 앞당겨 그의 연구실부터 방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맡아 본 커피 향이 연구실을 떠돌았다. “맞게 내린 건지 모르겠어요.” 카푸르가 잔을 건네며 말했다. “근데 이 아까운 걸 이렇게 갈아 마셔도 돼요…?” “저도 실험 중인 원두를 이렇게 유출해도 되나 싶었는데, 다 볶아서 가져왔더라고요. 생두 자체도 발아를 못 하게 만들어 놨겠지만요.” “그렇겠네요.” 성인이 될 무렵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기호식품에 딱히 애정도 없었던 데다 저승에서 돌아온 조상이라도 대하듯 경건해지는 바람에 잔을 든 채로 잠시 머뭇거렸다. 이윽고 첫 모금을 삼키자 카푸르가 웃음을 감추며 물었다. “맛이… 없지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은 모양이었다. “마셔 본 적이 별로 없어서… 맛을 잘 모르겠어요.” 입안에 남은 쓴맛 때문이었는지, 웃어 보인다는 게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부모님이 커피를 좋아하셔서 집에 늘 커피 냄새가 가득했는데, 어쩌다 마셔 보면 맛은, 음…. 그래도 이렇게 오랜만에 맡는 커피 냄새는 참 좋네요. 부모님 생각도 나고.” 공식적인 멸종 선언을 전후해 곳곳에 남아 있던 소량의 원두가 전 세계적으로 천문학적인 가격에 거래됐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지금도 종종 회자된다. 한국에서도 예외 없이 저마다의 마지막 커피를 앞에 두고 경건한 의식을 치렀음을 보여주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없지만 커피의 멸종으로 문학과 사상마저 무너진 세계를 그린 종말물이 쏟아져 나오는 데다 커피가 등장하는 고전까지 부활하면서 잠깐이나마 출판계가 호황을 맞기도 했었다. 아끼고 아낀 원두 몇 알로 마지막 커피를 내려 부모님이 한 모금씩 나눠 마셨다는 카푸르의 이야기가 동화처럼 들렸다. “재아 소식… 전해도 될까요?” 카푸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든 아직도 내 앞에서 재아 이야기를 꺼낼 때면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럼요.” 재아와 헤어진 지 7년이었다. 더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카푸르에게서라면 얼마든지 재아 이야기를 들어도 괜찮았다. 그는 대학원 시절, 누구보다 우리 둘을 아낀 스승이었다. 어쩌면 카푸르는 내가 걱정하는 것보다 더 많이 재아를 걱정하며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작년까지 런던자연사박물관 수장고에서 일했나 봐요.” 끊임없이 새로운 종이 도착하는 가운데 수백만 개의 미확인 생물체 표본이 분류와 명명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곳이 자연사박물관의 수장고였다. 전 세계적으로 1년에 2만여 종이 명명되는 속도로는 모든 수장고의 표본이 명명되는 데만도 수 세기가 걸릴 것이었다. 재아는 그전까지 극지연구소에 있었다. 그전에는 대서양 심해연구소에 있었고. 김우정 박사의 마지막 근무지이자 사고지였다. 자신의 할머니인 김우정 박사의 사고 원인을 밝히기 위해 연구소에 들어갔으리라는 많은 이들의 추측과 달리 나는 재아가 할머니의 뒤를 이어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0여 년 전, 대서양 심해연구소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발견해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 바로 김우정 박사였다. 그런데 학계가 그의 이름을 딴 학명까지 붙이며 이 새로운 종에 주목하는 동안 김우정 박사는 이상한 주장으로 자신의 공에 흠집을 낸 일이 있었다. 어류는커녕 식물에 가까울 만큼 대부분의 기관이 퇴화된 채 움직임도 없이 소극적인 여과섭식만 하는 그 심해 생명체의 기원이 육지 포유류에 있다는 가설을 내놓은 것이었다.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는 그 주장에 반응한 것은 아마도 재아와 나뿐이었을 것이다. 열광하는 재아와 달리 나는 어린 시절 재아가 할머니께 들었다던 이야기 중 하나를 떠올리는 정도였지만. “그래서 어떻게 된 줄 알아? 바다로 뛰어든 사람들이 전부 물고기가 된 거야. 물에 닿는 부분부터 비늘로 덮이면서 팔다리가 지느러미가 되고 등에도 지느러미가 돋고. 그러니 어쨌겠어. 쫓아오던 병사들은 절벽 끝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 돌아간 거지. 물고기가 된 사람들은 바다 제일 깊은 데까지 헤엄쳐 내려가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고.”함께 잠드는 밤이면 재아는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끝이야?”“끝이야.”“흠, 바다라고 천적이 없을 리가.”“토 달지 말랬지. 이렇게 끝나는 이야기도 있는 거야.”“할머니 말씀?” “응, 이제 자자.” 그러면서 재아는 잡고 있던 내 손을 펴게 한 다음 자신의 손가락으로 내 손바닥에 점 두 개를 꾹꾹 찍고 그 아래에 천천히 둥근 호를 그렸다. 어둠 속에서 재아가 내게 웃어 주는 방법이었다. 나는 그 미소를 쥐고 깊이 잠들었다. 재아와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것처럼.토끼가 자라 등에 올라타고 아무렇지도 않게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옛이야기라지만 재아를 통해 듣는 할머니의 이야기에는 늘 기이한 데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린 재아를 묘하게 자극하는 지점들이 있었던 것이다. 나라면 이야기를 좇느라 지나쳤을 것에 재아는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세계를 넘나들 때의 낙차를 낭떠러지처럼 아득히 느끼는가 하면, 한 문장으로 묘사된 시간차에 영원처럼 갇히는 것이었다. 물고기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재아는 언제인가 학교에 가기 싫어 물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기이함은 재아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에도 있었다. 아무튼 그 일로 재아의 어머니와 할머니 사이가 심하게 틀어졌다고 했다.김우정 박사는 주변의 우려와 만류에도 매번 심도를 더하며 아래로 아래로 하강했다. 박사가 어째서 육지와는 점점 더 멀어지는 길을 통해 심해 생명체와 포유류와의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 그의 소식을 들을 때면 걱정만 하는 나와 달리 재아는 어떤 기대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사고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김우정 박사가 혼자 탑승한 잠수정으로부터 구조 신호를 받은 연구소는 8킬로미터 깊이의 해구에서 간신히 박사를 찾아냈다. 탱크에 남은 산소가 모두 소진된 뒤였다. 구조된 뒤 몇 개월 동안 의식을 잃고 있던 박사는 기적적으로 깨어났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랜 재활 치료를 통해 간신히 입을 뗀 박사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한마디만을 반복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는 재아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았다. 자신의 클라우드 링크와 계정 정보를 담은 메시지 한 통을 남긴 채 종적을 감춘 것이었다. 할머니의 사고로 인한 충격 때문일 것이라고 애써 이해해 보기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그 시기가 너무나도 애매했다. 가끔 중얼거리는 한마디 외에는 어떤 의사 표현도 하지 못하는 점은 안타까웠지만 그 밖의 신체 기능들이 조금씩 회복되는 할머니를 보면서 재아는 분명히 사고 직후의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겨우내 할머니 곁을 지키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할머니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데 매달렸다. 낮이면 오래전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할머니에게 되돌려주고, 밤이면 할머니가 남긴 무수한 연구 자료를 샅샅이 뒤지면서. 그러던 중 어떤 계기에서였는지 박사 논문 심사를 코앞에 둔 채 돌연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었다. 몇 개월 뒤부터 이런저런 연구소나 탐사 현장에서 재아를 봤다는 목격담이 들려왔고 그때마다 만사를 제치고 달려가 봤지만 이미 재아가 다른 곳으로 떠난 뒤였다. 재아의 다음 행선지를 추측해 보기도 했지만 매번 빗나갔다. 10년을 만난 재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좌절만 반복되면서 재아를 찾는 일에도, 재아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추측하는 일에도 지쳐 갔다. 박사후 연구원 3년차에 발표한 논문으로 이곳저곳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고 장고 끝에 거처를 결정한 뒤로는 재아를 찾는 일을 완전히 포기했다.그 뒤 극지연구소를 거쳐 심해연구소로, 그리고 자연사박물관 수장고까지 이어지는 재아의 행적에서도 나는 더 이상 그 무엇도 추측하지 않았다. 재아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에 이어 딸을 이해하기를 포기한 것처럼 나 역시 재아를 이해해 보려는 일을 그만둔 지 오래였다. 다만 재아가 안녕하기를 바랄 뿐. 이튿날 개최된 화성기후학회는 지금까지의 화성 관련 학회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지구인의 화성 이주를 전제로 가장 먼저 시작된 연구 중 하나이자 그 이주를 성공적으로 이끈 화성 기후 연구가 이제는 화성의 현재와 미래만이 아닌 과거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화성에서 발견된 생명체 화석 때문이었다. 이제 시작이었지만 화성에 살았던 생명체의 진화 연구를 통해 과거 화성에서의 기후를 추측할 길이 열린 것이었다. 화성생명체연구소의 대표는 기조연설에 앞서 자칫 이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었던 과거를 잠시 회고했다. 5년 전, 화성생명체조사단은 화성에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최종 결론과 함께 현지 탐사단을 철수시켰다. 화성의 대기와 지각에 고루 살포하고 매몰한 생체 반응 탐지기를 비롯해 고해상도 위성 촬영 장치가 30여 년 동안 측정한 결과였다. 이어서 해산 절차에 돌입한 조사단은 과거에도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도 덧붙였다.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모습으로 인류의 상상 속에 나타났던 화성인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일종의 낙담에 빠져 있을 때였다. 지구 귀환을 보류하고 혼자 남아 탐사를 계속하던 연구원이 마침내 희미한 흔적 하나를 찾아냈다. 연구원으로부터 간이 분석 결과를 전송받은 화성생명체조사단 본부는 흔한 풍화작용의 흔적일 뿐이라고 일축하면서 연구원에게 조속한 귀환을 명령했다. 표면적으로는 안전을 내세웠지만 일개 연구원의 독자적인 행동을 본부의 권위를 훼손하는 괘씸한 일탈로 여기고 내린 조치였다.하지만 이에 불복한 연구원은 몇 달 뒤 추가로 찾은 암석 표본들을 가지고 귀환했고, 오래지 않아 그것들 모두가 생흔화석, 즉 과거 화성에 생명체가 살아 움직였다는 증거로 밝혀졌다. 비록 원시동물이 남긴 미세한 움직임의 흔적일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지구는 충격과 희열에 휩싸였다. 인류의 오랜 질문에 마침내 답이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지구 밖에도 생명체가 존재했다는 문장 하나가 우주의 역사에 더해졌다. 그 소식은 특히나 이주를 코앞에 두고 기대와 염려로 들떠 있던 3차 이주 예정자들뿐 아니라 이미 화성에 이주해 있는 이들에게도 큰 환영을 받았다. 움직임의 흔적만 남긴 미지의 생명체가 인간과 생물학적으로 얼마나 유사한지, 화성의 환경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화성은 살 만한 곳이라는 안도를 준 것이었다. 이후 생흔화석이 발견된 지역을 중심으로 지각을 파 내려가던 현지 탐사단이 지구의 원시 절지동물과 유사한 형태의 체화석을 연달아 발견하면서 화성생명체조사단은 화성생명체연구소로 명칭을 전환하고 연구원들을 대거 영입해 규모를 확장하면서 본격적인 계통 연구에 착수했다. 뒤늦게 화성생명체연구소에 합류한 나에게도 이번 학회는 특별했다. 화성기후연구소, 화성지질연구소 등 다양한 분야와 긴밀히 공조해 진행하는 화성 연구의 거대한 틀을 이해하고 내가 맡은 계통 연구의 방향을 구체화할 수 있어서였다. 화성까지 망가뜨릴 셈인가개발은 곧 파괴, 화성 개발을 당장 중단하라화성 개발비로 지구 열 개는 살릴 것화성 개발의 배후를 공개하라 학회를 마치고 동아시아기후연구소 건물을 나서자 오전부터 늘어서 있던 화성 개발 반대론자들이 그때까지도 피켓을 든 채 침묵시위 중이었다. 끝나지 않을 싸움이었다. 아니, 이미 끝난 싸움이었다. 이제 화성은 지구의 엄연한 일부였다. 바위를 치는 달걀을 보듯 그들을 향한 애처롭던 마음이 피로감으로 바뀐 지 오래였고, 솔직히 이제는 그들의 목소리가 신념을 가장한 어깃장으로만 들렸다. 숙소로 돌아와 태블릿과 기타 자료를 탁자 위에 던지다시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서너 시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겨우 일어나 씻고 주변을 정리한 뒤 다시 잠을 청하려는 순간, 회의장 앞의 시위자들이 떠올랐다. 늘 그러듯 내가 향할 곳에 시선을 박은 채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직진했음에도 어째서인지 그중에서 아는 얼굴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없이 빠져나오는 잔머리 때문에 수시로 올려 묶던 머리, 또렷한 눈동자, 살짝 웃는 듯하면서도 다부진 입매. 내가 처음 만난, 17년 전의 재아가 떠올랐다. 인류가 이렇게까지 한 종의 멸종에 몸서리친 적이 있었던가. 생태계의 균열이 아닌 문화와 일상의 균열에 절망하는 사이에 우리는 눈덧신토끼와 매부리바다거북마저 잃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커피의 멸종을 화두로 하는 글이었다.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 너무 멀리 와 버린 인류를 향한 경고로 끝을 맺은 그 글은 대학 입학 후 처음 받은 학교신문에 실린 기고문이었다. 그 당찬 경고의 주인공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신입생이자 같은 학과 동기라는 것을 안 그날로 나는 재아를 찾아냈고, 그 자리에서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10년을 만나고, 헤어졌다.잠이 달아난 김에 태블릿을 켜고 낮에 받은 이메일 몇 개에 답을 보냈다. 자료를 첨부하기 위해 접속했던 클라우드를 닫으려던 나는 그동안 애써 외면하던 폴더에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가져갔다. 7년 전, 종적을 감추기 직전에 재아가 자신의 클라우드에 올린 자료들을 고스란히 옮겨 둔 폴더였다. 거기에서 다시 둘로 나뉜 폴더에는 각각 김우정 박사와 재아의 연구 자료가 담겨 있었다. 재아의 실종 직후 정신을 놓다시피 한 상태에서 무작위로 열어 본 방대한 자료로는 김우정 박사에 이어 재아가 진화와 관련해 무엇인가를 찾으려 한다는 것 말고는 알아낸 게 없었다. 혼란과 상처만 더 얻을 뿐이었다.몇 년 만에 그 폴더를 다시 열고 그 아래의 아래의 아래를 찾아 내려가 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될 문서 파일 하나를 열었다. 재아가 마지막으로 작성한 파일이었다. 종이 아닌 개체를 볼 것. 문장 하나가 전부인 파일이었다. 7년 전 처음 본 이후로 한시도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는 문장. 김우정 박사가 유일하게 되뇌는 한마디. “흠흠, 이건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한테서부터 내려오는 얘긴데,” 재아는 자주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아이들이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같은 것을 듣고 자랄 일이 없어진 지 오래였지만 재아만큼은 달랐다. 늘 할머니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근데 궁금한 게,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그러면 사이사이가 비잖아. 그럼 할머니들은 항상 딸은 건너뛰고 손녀한테만 얘기해 주셨다는 거야? 박사님이 정말 그 얘기들을 어머님한테는 안 들려주고 너한테만 들려주셨어?” 언제인가 재아에게 물은 적이 있다. 심각하게 물은 것은 아니었다. 재아의 말을 듣다 보니 흔히 쓰는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라는 계보에서 누락된 세대가 잠깐 궁금해져서였다.“할머니가 엄마한테 해 줬는지 안 해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엄마는 나한테 그런 얘기 안 해 줬어. 엄마는 그런 얘기 싫어했거든. 할머니가 나한테 해 주는 것도 싫어했고.”기이한 이야기를 타고 어떤 임무가 세대를 걸러 전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재아는 할머니를 뒤이어 무엇인가를 쫓듯 몰두했고 흔들렸고 사라졌다. 한 문장을 남긴 채. 모니터 속의 커서는 그 문장의 끝이 아닌 다음 줄의 첫머리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재아는 이어서 무얼 쓰려고 했던 걸까. 그 일정한 깜박임에 답이 있기라도 하듯 내 시선이 오래도록 커서에 머물렀다. “화성이 밥 먹여 주니? 바빠도 제때 끼니 챙겨. 아, 그리고 우리 집 재수생이 삼촌 때문에 생명과학 망했다길래 등짝 제대로 패 줬다. 공부 못하는 것들이 꼭 핑계야. 으이구, 삼촌 머리 반만이라도 닮을 것이지.” 한국에 들어오고도 가족 모임에 매번 불참하는 내게 종종 소식을 전하는 누나의 전화였다. 그러고 보니 2년째 입시 공부 중인 조카를 못 본 지도 한참이었다. 이상하게 올해 초 한국에서 내 이름과 분자시계 기술이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는 일이 있었다. 익히 알려진 진화계통수의 일부가 수정되면서 올해 우리나라 개정 교과서에도 실렸는데 그걸 두고 재수생들이 내게 원망을 쏟아내고 있다는 소식을 주변으로부터 듣고서야 인과관계를 알 수 있었다. 계통수의 수정, 정확히는 특정 종의 분기 시점의 보정은 몇 년 전 내가 진화생물학계에 발표한 기술이 빚은 결과였다. 생명체의 화석에서 추출한 염기서열 문자 중 유전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중립 문자들을 배제하고 최소한의 문자만으로 종의 분기 시점을 측정하는 일종의 분자시계 기술이었다. 형질의 변화가 나타나는 주기에서 수열 패턴을 찾은 나는 그것을 빅데이터화해 중립 문자의 수를 최대화하는 기술을 이끌어 냈다. 남은 최소한의 문자로 보다 빠르고 정밀하게 분기 시점을 측정하는 기술이 핵심이었다.한 문제나 출제될까? 그 보정 내용이 입시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결코 아니었음에도 고배를 마신 아이들은 그 다친 마음을 어딘가에 쏟아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관련 기사에 달린 악성 댓글을 캡처해 보내는 짓궂은 지인들도 있었다.진화생물학계를 요동치게 한 그 기술의 발표 직후 세계 곳곳으로부터 러브콜이 쇄도했고, 그 가운데 미래 인류의 진화 모델 연구를 제안한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에 수락 의사를 밝히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무렵이었다. 난데없이 화성생명체연구소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화성에 대해서라고는 일반인 이상의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진화생물학자에게 화성을 연구하자는 제안이라니. 하지만 현재까지 축적된 화성 생명체의 유전적 정보가 미미하기는 하나 지구에서의 진화 모델을 응용하면 화성 생명체의 계통 연구에 가속이 붙을 것이라는 화성생명체연구소의 설명은 충분히 설득력 있게 들렸다. 한편으로는 막막한 것도 사실이었다. 지구에서도 화석만으로는 계통 연구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화석이 결코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으며, 생명체가 화석으로 남는 일 자체가 기적에 가깝기도 해서였다. 진화 연구에는 현존하는 생명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나사의 우주생물학 연구소를 비롯해 비교생물학, 계통분류학 등 진화생물학계 전반의 권위자들이 모여 화성의 과거를 밝히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누가 봐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를 끌어들인 것은 다른 것이었다. 앞으로 더 많은 화석이 발견되고 연구되더라도 변치 않는 사실, 즉 언제인가 존재했던 생명체들이 더 이상 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화성 생명체는 왜 멸종했는가. 화성 반려견들, 품종 간 경계 허물며 빠른 속도로 대형화 4차 이주가 안정적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소식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화성으로부터 날아온 소식이었다. 그 소식에 지구 전체가 술렁이는 가운데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지구와 유사한 환경을 갖춘 거주지역이라지만 그곳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많은 사람이 좀이 쑤셔 있었다는 증거였다.애초에 ‘지구의 리셋’을 목표로 떠난 이주민들이 반려견의 품종 따위를 애써 유지할 리도 없었겠지만, 단 2세대 만에 흔히 말하는 잡종견에 수렴하는 화성 반려견의 소식은 다시금 화성 이주에 대한 높은 관심과 우려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곧바로 이 현상을 연구하기 위한 조사팀이 꾸려졌지만 화성 이주민들은 이들의 방문을 거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버려둬 달라는 것. 4차 이주로 그 규모가 더욱 커진 이주민 집단은 보다 다양한 직군의 구성원을 갖추며 자치와 자급자족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가동한 상태였다.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했다. 실험실의 쥐가 아닌 개척자로서,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떠난 이들이었다. “인터뷰로 정신없었지요?”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카푸르 박사가 물었다. 반려견들이 보인 변화의 원인 분석 요청이 쇄도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화성에서의 시간을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측정하기 위해 분자시계 기술이 필요하다며 분자시계를 잘못 이해한 대학교수란 사람의 칼럼을 읽고 정정을 요청하기도 했다. 유래 없는 현상 앞에서 흥분하며 우왕좌왕하는 것은 대중뿐이 아니었다.“지금의 화성 기후가 영향을 줬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게 화성기후연구소 입장이라는데… 거긴 어때요?”카푸르가 물었다.“당장 유전자 표본이 필요한데 얻는 게 쉽지가 않아요. 그쪽에서 접근도 못 하게 난리라잖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법을 찾으려고요.”그러자 카푸르가 내 손목을 가만히 쥐며 말했다.“한 번만 더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세호.”온화한 카푸르의 얼굴 안에서 암갈색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불합리와 부조리를 겪을 때면 노기로 일렁이던 젊은 시절 카푸르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카푸르가 아닌 재아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카푸르를 대할 때면 재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셋의 오랜 인연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시 절지동물의 체화석이 발견된 뒤로 같은 지역에서는 물론이고 인근 지역에서도 조금 다른 형태의 체화석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이들 화석 집단끼리의 근연 관계는 차차 밝힐 일이었지만 형태상의 분류만으로도 월등히 고등해 보인다는 사실에 화성생명체연구소는 다시금 술렁였다. 원시동물 외에도 어디에선가 더욱 고등한 생명체의 흔적을 찾고 마침내 지적생명체의 흔적까지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행성의 한때’라는 제목의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나돌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교체된 화성 이주본부 홈페이지의 대문 사진으로, 이주민들의 주거지인 거대 돔 안에서 찍은 것이었다. 유리벽 바깥으로는 멀리 우뚝 솟은 올림포스 산과 그 위에 드리운 산호빛 저녁 구름, 그리고 유리벽 안쪽으로는 제법 잘 조성된 조림지와 야트막한 공동주택 지구도 보였다. 다른 각도이긴 했지만 그동안 공개된 몇 장의 사진들이 대체로 비슷비슷한 풍경사진이었던 것과 달리 이 사진은 멀리서나마 처음으로 이주민들의 일상을 담았다는 점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제는 지구인들에게도 제법 익숙한 풍경을 배경으로 돔 내부의 들판에서 어른과 아이들이 어울려 공을 차는 이 사진은 순식간에 전 세계에 공유되며 수많은 댓글을 불러왔다. 역광으로 인해 윤곽 광선으로 표현된 사람들, 그들 사이에 떠 있는 공,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어슬렁거리거나 자기들끼리 어울려 뒹구는 대형 반려견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낯설면서도 평화롭고 목가적인 생활을 연상했다. 듣던 대로 급격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반려견들의 모습을 놓고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들의 섭식과 사육 환경에 대한 자연스러운 궁금증이 폭증하는가 하면, 화성에 가고서야 본래 모습을 찾은 반려견들을 본보기 삼아 지구에서도 이제라도 품종 유지라는 이름의 학대와 그것에 빌붙어 이득을 취하는 각종 반려견 산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큰 힘을 얻기도 했다. 한편 누군가가 지구와는 미묘하게 다른 거주지역의 대기압과 중력을 사람들의 자세와 공의 위치에 적용해 공의 속도와 운동 방향을 추측했고, 뒤이어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토대로 한 시뮬레이션 동영상을 제작해 올렸다. 그러자 ‘화성에서 축구 하면?’을 시작으로 ‘화성에서 야구 하면?’, ‘화성에서 헤엄치면?’ 같은 가상 시나리오와 애니메이션이 꼬리를 무는 등 각종 화성 시리즈가 잇달았다. 그동안 베일에 싸인 채 인류에게 들려주었던 신화와 미스터리를 모두 거두어들이는가 싶던 화성이 이제는 민낯을 드러내고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 것이었다.개발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화성 이주본부가 이러한 일련의 현상을 이주에 대한 제법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받아들이며 안도할 무렵이었다. 그 안도를 무색하게 하는 또 한 장의 사진이 돌기 시작했다.‘표정 잃은 이주민들’누군가가 그 사진에서 역광을 걷어내고 이주민들의 얼굴을 복원했다며 올린 사진의 제목이었다. 확대해 보면 또렷하지는 않아도 이목구비 정도는 알아볼 수 있는 그 사진 속에서 이주민들의 표정은 보면 볼수록 어딘가 어색했다. 단체 촬영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선 경우라면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공놀이에 열중한 순간에 한두 사람도 아닌 모든 사람의 표정이 어색하다는 건 의아한 일이었다.의아함은 의아함으로 끝나지 않았다. 억지로 연출된 사진이라는 추측에서 시작된 댓글과 각종 SNS 게시물은 순식간에 이주민들의 실상에 대한 의혹 제기로 이어졌다. 화성 거주지의 환경이 지구와 유사하다는 것은 거짓이며, 이주민들은 가혹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고, 안정적이라고 보고되는 그들의 생활상도 지속적인 모집을 위한 미끼일 뿐 이주민들이 개척자원으로 소모되고 착취당하고 있다는 추측이 들불처럼 번졌다. 더는 두고 볼 수 없게 된 이주본부가 진화에 나섰지만 이번에는 이주민들의 가족과 지인들이 들고일어났다. 대부분의 이주민들이 신상 정보의 공개를 원치 않은 까닭에 그들의 가족 역시 그동안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혹독한 환경과 착취, 거짓 보고의 의혹 앞에서만큼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화성에 가 있는 가족과의 직접적인 통신이나 대면을 요구했고, 심지어는 가족의 귀환을 요청하기도 했다. 여기에 인권단체까지 가세하면서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거세졌고, 결국 이주본부는 5차 이주 예정자들의 출발을 잠정 연기하는 것으로 급한 불을 끄기에 이르렀다.하지만 어디를 가나 이주민들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대중과 달리 내막을 제법 알 법한 화성생명체연구소 내부에서조차 연구를 주제로 시작한 대화가 화성 이주로 끝나기 일쑤였다. 이주 실상의 의혹보다는 그에 대한 여론이 화제라는 점에서 다르긴 했지만. “화성 이주민 왕따설, 도피설이라. 이건 좀 심한데요.” “올 게 왔네. 내가 그랬잖아. 좀 있으면 이주민들이 공격당할 차례라고. 이제 봐. 신상 털리고 난리도 아닐걸.” “신상까진 모르겠고, 들춰 보면 하나씩은 문제 있는 사람들일 거라고는 하더라고.” “이주 심사가 얼마나 까다로운데. 이주본부에 본인은 물론이고 사돈의 팔촌 신상까지 탈탈 털리고 간 사람들이야.” “법적으로 말고, 사회생활이나 성격에 하자 있었을 거다 그런 얘기죠. 유기견들만 모아서 데려간 거 갖고도 처음엔 신인류다운 아름다운 동맹이네 뭐네 그렇게 찬사를 보내더니 이젠 뭐라는 줄 알아요? 끼리끼리라나.” “진짜 못 하는 말이 없네. 화성에서 들으면 뭐라고 대꾸도 못 하고 얼마나 속 터지겠어.”“속 터질 거 있나. 지구에서 짖거나 말거나 신경 끊고 오히려 속 편하지.”“가족들이 괴로우니 문제죠.”지구에 남은 가족들이 악성 댓글을 비롯한 온갖 수모를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를 비롯해 별별 이야기가 다 돌았다. 사람들은 이주민들이 화성을 향한 이유보다 지구를 떠난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화성 생활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은 만큼 그들이 살다 간 지구에서의 삶을 캐내고 흠집을 내지 못해 안달이었다.그러던 중, 공격의 화살이 이주민들에게로 향한 배경에 커피 종자 복원 사업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등장했다. 소위 업계 소문이었다. 강원도의 종 복원 연구소 뒤에 브라질의 거대 자본이 있으며 이들이 얼마 전 화성기후연구소, 지질연구소 등을 통해 화성에서의 대량 재배 가능성 여부를 타진했다는 것이었다. 대혁명 이후 획득한 정치적 안정과 천연자원을 등에 업고 차곡차곡 성장하고 있는 브라질이 아라비카 복원과 대량 생산을 백방으로 모색하던 중 화성에까지도 눈독을 들였다는 대목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채식 자원의 100% 자급자족을 눈앞에 두고 있을 만큼 충분한 농업 환경과 인력을 갖추었음에도 커피 재배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주민들의 거센 반발이 종 복원 자본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으리라는 추측이 나올 만도 했다.‘화성에서 난 것은 화성에서 소비한다.’이주민들이 내건 구호는 얼핏 이기적으로 들렸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인류의 오랜 열망과 탐구와 노고의 결실을 자기들만 누리겠다는 것으로 보일 만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를 두고 괘씸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마디로 누구 덕에 거길 가 놓고 유세를 떠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이주민들을 지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이 살다 간 삶은 어떤 형태로든 지구에 남아 지구의 내일이 될 것이기에 그들은 지구에 빚진 것이 없으며, 그들의 땅에서 난 것은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그 땅에서 소비하지 않을 것을 생산하는 것은 결국 그 땅을 황폐하게 할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화성 개발 반대론자들뿐 아니라 이주민들까지 화성의 희토류와 귀금속 채취에 강력히 반발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주민들에 따르면 화성은 인류에게 둘 다일 수 없었다. 미래의 거주지인 동시에 현재 지구의 자원 공급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 둘의 병행은 지구 멸망에 대비한 안식처를 시작부터 파괴하는 모순된 행위였다. “그래도, 그 사람들 표정은 정말 수수께끼야, 안 그래?” 거기에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든 풍문의 시작인 그 사진을 떠올릴 때면 정말로 화성에 어떤 거대한 음모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순진하고 대책 없는 의문이 충분히 들 만했다. 하지만 정작 화성 이주민들은 그 논란을 직접 들을 일도, 거기에 일일이 대꾸할 일도 없었다. 지구인들의 피로만 늘어 갈 뿐이었다. 뒤늦게 지구에서의 상황을 간략하게나마 전해 들은 그들은 짧게 답변을 보내 왔다.지구에서는 지구의 삶을 살아가시라. 인류의 갈등이 지구를 벗어나 수천만 킬로미터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해지는 동안 나는 나대로 진척 없는 연구 때문에 속을 태우고 있었다. 미세한 형태적 차이를 보이는 몇 개의 화석 집단 간의 관계에서 논리적 오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염기서열 시퀀싱 결과 이 집단들은 근연종이 아닌 동일한 혈통으로 드러났는데, 문제는 그 순서였다. 방사능탄소연대측정 결과 오래된 화석일수록 조금 더 발달한 기관이나 새로운 기관을 갖추며 고등한 형태를 띠는 것이었다. 위치적으로도 더 깊은 지층에서 발굴된 화석이 보다 고등했다. 맛보기 위해 수박을 삼각뿔 모양으로 잘라내듯 화석의 지층을 잘라내 180도 뒤집어 놓으면 납득이 될 순서로 화석이 매장돼 있는 것이었다. 화성에 특별한 지각 변동이 있었거나 지층 형성 과정에서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처럼.하지만 보정을 위한 OSL지층연대측정 결과도 탄소연대측정 결과와 일치했다. 화석 주변에서 채취한 수많은 지층 표본마저 화석이 쌓인 순서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표본 수나 데이터의 부족으로 나타나는 연구 초기의 불확실성을 넘어 이제는 멀리 떨어진 여러 지역에서 채취된 화석 집단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개체 차원에서 일어나는 환원유전이 아니었다. 집단 전체가 보이는 말도 안 되는 이 흐름은 말도 안 되는 딱 한 가지 가설로밖에는 설명되지 않았다. 화성 생명체는 고등한 상태에서 하등한 상태로 퇴화했다. 재아가 들었다면 환호했을까. 나도 모르게 속으로만 되뇐 생각이었지만 누구에게 들킬세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종 단위가 자연선택을 피하는 동시에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어떤 종도 그 시작이 고등한 형태일 수 없었다. 창조되지 않는 한. 이성을 되찾아야 했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지금까지의 모든 데이터를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몇 년 만에 내 발로 휴가를 떠나 말로만 듣던 대로 누구도 만나지 않고 무엇도 하지 않는 날들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내고 돌아왔다. 그리고 인공지능에게 화석의 형태를 학습시키는 일부터 다시 시작할 때였다. 며칠에 한 번 동료 연구원들과 잠깐씩 갖는 티타임에서 누군가가 화성 관련 가설 하나를 던졌다. 잊을 만하면 한 사람씩 가벼운 농담을 던지고 다 같이 웃어 주는 것이 팍팍한 연구소 생활의 작은 일상으로 자리 잡는 중이었다. 그날의 가설은 화성 이주민의 표정 근육 퇴화설이었다. 포유류 가운데에서도 영장류의 얼굴만이 뼈가 아닌 진피 아래에 붙은 섬세한 표정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포식자를 발견하고 젖이나 먹이를 먹는 데 쓰는 안면근육 외에도 소통을 위한 근육을 추가로 발달시킨 결과였다. 이주민들이 그 표정 근육을 잃고 있다면 문제의 사진이 설명되지 않겠느냐는 연구원의 말에 같이 있던 연구원들이 일제히 토끼 눈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말을 꺼낸 연구원도 함께.“오늘의 누가 누가 멀리 가나는 여기까지. 내일은 또 내일을 가설을 듣고, 일하러들 갑시다.”여느 때처럼 가벼운 웃음으로 마무리된 그 자리를 하나둘 떠나고 마지막으로 그 연구원과 내가 휴게실을 나설 때였다. 웃음기 가신 그의 얼굴이 조용한 혼란과 의문에 잠기는 것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낯설지 않은 그 표정은 뒤집힌 발굴 순서의 화석 무더기 앞에서 내가 짓고 있었을 표정이었다.연구실로 돌아온 나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면서 아무것도 손에 잡을 수가 없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화성 반려견들이 빠르게 대형화하며 늑대 개가 되어 가는 것은 이주본부에서도 인정한 사실이었다. 내 눈앞에는 폐기하려던 가설을 뒷받침하는 화석들이 역순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화성 이주민들이 표정 근육을 잃고 있다면…. 그동안 휘청이며 딛고 있던 모호하고 물컹한 바닥이 갑자기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현기증 대신 두려움이 밀려왔다. 마구 머리를 털던 나는 한참 동안 눈을 감은 채로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마지막까지 풀지 못한 오지선다 문제의 보기들을 읽고 또 읽듯 내 앞에 놓인 터무니없는 보기들을 곱씹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들 사이에 숨은 반증을 찾아냈다. 바로 화성 현지 연구원들이었다. 거주지역과 유사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연구원들에게서는 지구와 화성을 오가는 동안 발생하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골밀도 감소와 사지 근육 소실 이외의 다른 현상은 보고된 바가 없었다. 표정 근육 퇴화 같은 일은 더더욱.한번 이성을 회복하고 나자 낭설을 일축할 힘이 솟았다. 애초에 사진 한 장에 담긴 순간으로 이주민들의 상태를 추측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출발이었다는 단순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잘못된 가설 또한 반드시 바로잡을 수 있다는 믿음도 생겼다. 실로 오랜만에 찾은 마음의 평화였다. 이제는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한두 번인가 보고 말았지만 그때마다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던 문제의 그 사진을 다시 열었다. 어색한 표정을 감안하더라도 붉은 저녁 구름을 뒤로 한 채 뛰노는 사람들의 모습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한 역동감과 여유로움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옮겨 가던 내 시선이 한순간 블랙홀을 만난 듯 어느 한 곳에 꼼짝없이 붙들렸다.재아였다. 의심과 혼란을 걷어내고 무심히 바라본 사진 속에 재아가 있었다. 7년의 시간과 수천만 킬로미터의 거리가 일그러뜨려 놓은 시공간 속에서도 나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머리를 올려 묶으며 공을 향해 달려오는, 재아라고 믿은 순간 더 이상 재아가 아닌 그 누구일 수 없는 사람을. “재아야.”헤어진 뒤 처음으로 소리 내어 재아를 불렀다. 그러자 이해하려는 일도 찾는 일도 포기했다고, 그저 안녕하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생각했던 재아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파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기고문을 읽고 처음 만난 날의 재아부터 무섭도록 과제에 몰두하던 재아, 옛이야기를 들려주며 그 속에 스스로가 한없이 빨려들던 재아까지, 하나의 파도가 그다음 파도를 불러오며 나를 잠기게 했다. 나는 더 이상 떠올릴 것이 없을 때까지 마음껏 재아를 추억했다. 내 안에 가득 찬 파도가 눈물이 되어 넘치도록.나는 한 번 더 재아를 찾으러 가야 했다. 캄캄한 진공을 가로지르는 날들이 계속됐다. 출발 전에는 강도 높은 훈련과 교육을 받고 화성 왕복선에 탑승한 뒤로는 날마다 안정제와 각종 보조제를 투약하고 있었지만 수시로 불안과 소화불량과 무력증이 엄습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화성을 꿈꿔 본 적이 없어서 더 그럴 거라는 농담으로 연구소 동료들이 초행인 나를 격려했다. 이걸 견디면서까지 화성에 갔을 재아를 생각했다. 모든 이주민을 생각했다. 홀로 잠수정을 이끌고 심해로 내려간 김우정 박사를 생각했다. 김우정 박사와 재아가 남긴 무수한 자료가, 재아가 옮겨 다닌 자취들이 너무도 뻔히 가리키고 있기에 나로서는 설마 했던 것을 재아는 정말로 찾고 있었다. 그 너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역진화 혹은 퇴화, 그 자체였다. 두 가지 표현 모두 용납하지 않았던 재아에 따르면 그저 또 다른 진화를. “이 진화는 틀렸어.”진화가 우연의 산물이라고 믿은 재아는 인류의 진화에 극히 회의적이었다. 심지어 최상위 포식자로서의 생태계 지위에 일종의 죄책감마저 느끼는 것 같았다. “진화가 우연의 산물이라면서 어떻게 가치를 부여하나. 우연에 옳고 그름이 어딨다고.” 재아와 달리 나는 인류 대신 파충류든 다른 집단이 우연의 매 순간에 행운을 손에 넣고 생태계의 최상위에 이르렀대도 그들과 생태계의 관계는 결국 현재의 인류와 생태계의 관계에 수렴했으리라는 데 동의했다. 우리는 버지스 셰일의 화석들을 두고 논박을 주고받은 두 진화학자, 굴드와 모리스처럼 팽팽히 맞서곤 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이 세계를 향한 재아의 날카롭고도 너그러운 시선이었음에도 그것들이 종잡을 수 없도록 폭주할 때면 감당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어제 일도 아닌 수십억 년에 걸쳐 일어난 일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일 자체에 회의가 들었다. 이미 일어난 일에서만도 우리가 밝혀야 할 것들은 차고 넘쳤기에.“인류가 그 진화의 어디쯤에 그냥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그 말에 내가 뭐라고 대꾸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얼굴이 붉어지도록 맞서던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용히 물러날 줄 알게 되었다. 격렬히 섞였던 탓에 하나의 액체인 줄 알았던 세계가 물과 기름처럼 조용히 분리되는 시간이었다. 결코 평균값에 이를 수 없는 두 개의 비중이 언젠가는 선명한 경계면을 이룰 것을 예감했으면서도 재아가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질 줄은 몰랐다. 세계의 물리적인 분리는 말할 수 없이 당혹스러웠다. 재아를 찾아 헤맨 것은 어쩌면 그 선명한 경계면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재아를 만난다면, 아니, 만나지 못한다 해도 그 경계면 너머의 재아가 끝까지 놓지 않은 줄다리기에서 이겼기를, 재아가 그토록 찾으려고 했던 것이 부디 거기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왕복선이 착륙을 알리고 있었다. “먼길 오셨습니다.” 검역소를 지나 연구단지에 들어서자 화석 발굴과 연구를 맡은 팀의 수석 연구원이 나를 포함한 본부 연구원 일행을 맞았다. 박유라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화성에서 맨 처음으로 생흔화석을 발견해 지구로 귀환했던 연구원이었다. 앞으로 참관할 연구에 대해 들은 뒤 시설을 둘러보기 위해 회의실을 나서는데 그가 나를 따로 불렀다. “의심 가는 현상이 있다고 미리 귀띔하셔서… 혹시나 제 분석이 도움이 될까 싶어 말씀드려요. 최근 발견된 화석들 성분이 좀 별나요. 화성 지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원소들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주로 고등한 생명체 화석에서요. 근데 아시죠? 본부에선 여기 분석 결과 탐탁찮아 하는 거. 어차피 보고는 안 할 거지만요.”보고는 하지 않겠다면서도 어쩐지 확신에 차 있는 듯한 그의 말에 머릿속이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본부의 귀환 명령에 불복하고 끝내 생흔화석을 찾아내게 한 것도 이런 확신이었을까.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아가 김우정 박사에 이어 그토록 간절하게 쫓다가 마침내 찾아낸 것이 진화의 역행이라 해도 그 맨 처음이 고등한 생명체라는 것만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창조가 아니라면 남은 것은 하나뿐. 화성으로 오는 동안 줄곧 의심했던 그것이었다. 박유라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밝혀지려면 한참 걸리겠지만, 저는 이쪽에 걸게요. 여기 화성에서 발견된 생명체들의 맨 처음 조상이…” 나는 뒤이어 그에게서 듣게 될 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외계에서 왔다는 데.”한 점 가루가 된 내가 아득한 진공 속으로 빨려드는 것만 같았다. 도무지 잠들 수 없는 화성에서의 첫 밤이었다. 그들은 어디로부터 그 오래전에 이곳을 찾아왔을까. 재아를 만날 일만으로도 피할 수 없던 불면이 이 행성을 찾아와 스러져 간 존재들의 잔영으로 깊어만 갔다. “거주지역 내부 방문은 완전히 불가해요. 저희 쪽에서 이주민 대표들 접견할 때 개방되는 장소까지만 안내해 드릴 거고요. 어렵게 연락은 해 뒀는데, 글쎄요. 그분이 나오실지는….” 이주본부 소속의 화성 현지 직원 하나가 소형 비행체로 나를 실어 가며 일렀다. 거주지를 둘러싼 거대 유리 돔 입구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착륙장과 검역소를 거쳐 접견 장소 앞까지 나를 안내한 직원은 밖에서 대기하겠다며 나를 들여보냈다. 화성에 도착해서부터 들려오던 기압 유지 장치의 옅은 소음이 몇 배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내 심장 소리 같기도 했다.머지않아 반대편 문이 열리고 재아가 들어섰다. 그 순간이 프레임을 잘게 쪼갠 영상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17년 전, 처음 만난 그날처럼. 다만 재아의 표정만큼은 달라 보였다. “오랜만이네.” “정말 오랜만이네.”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목소리라지만 7년 만에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지구를 완벽히 재현하지 못한 대기 성분과 기압 때문이었을까. 소리도 중력의 영향을 받는 것일까.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면 재아라고 믿기 어려운 목소리였다. “늦었지만 사과할게. 그렇게 떠난 거.” 재아가 먼저 침묵을 깨고 자신이 왜 갑자기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히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잠깐 정신이 돌아온 적이 있었어. 흐릿하던 할머니 눈이 갑자기 그렇게 또렷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러고는 할머니가 손을 들어서 창밖을 가리켰어. 밤하늘을.”재아는 김우정 박사가 가리키는 밤하늘을 보며 처음에는 아무것도 연상할 수 없었다고 했다. 김우정 박사는 의아해하는 재아를 보며 싱긋 웃고는 밤하늘을 향해 뻗은 손을 살랑살랑 움직였다. 물고기의 움직임 혹은 새의 날갯짓처럼. 그 순간 재아는 기억해 냈다. 언제인가 그렇게 함께 누워 쏟아질 듯한 별을 보며 김우정 박사가 자신의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던 밤을. 해녀였던 그 할머니는 손녀와 함께 누워 밤하늘을 가리키며 자신의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우리는 언젠가 저 하늘의 어느 별로 돌아가 편히 쉬게 되리라고, 그때는 이렇게 잘난 사람의 모습이 아니어도 좋으리라고, 물고기라도 좋고 새라도 좋으리라고.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첩까지 모시며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멈출 수 없는 물질로 생계를 이어야 했던 할머니의 고단함을 채 알지 못했으면서도 어린 김우정 박사는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에게 섬에 남지 말고 뭍으로 가라는 할머니의 말에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얼마 뒤 할머니는 바다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한동안 정말로 자기 할머니가 물고기가 된 줄 알았대.” 김우정 박사의 연구 일생은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은 자신의 할머니와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재아의 연구가 김우정 박사의 삶과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그날 또렷하던 할머니 눈에서 봤어. 할머니가 어떤 세계를 확신한다는 걸. 그래서 시작한 거야. 할머니의 연구 순서를 따라가기를. 할머니가 남긴 설계도를 따라가기를.” “여기도 박사님 계획에 있었어?” “지구에 없다면 지구 밖. 할머니 계획은 거기까지였어. 그다음부터는 내 몫이었고. 여기가 아니라면 또 다른 어딘가일 거고.” 김우정 박사의 뒤를 잇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그를 따라잡고 마침내 그의 계획을 뛰어넘어 이곳에 이른 재아. 뭍으로 가라던 할머니의 말씀대로 이른 나이에 섬을 떠난 김우정 박사. 어쩌면 자신의 할머니를 대신해 조금 더 멀리까지 갔을 김우정 박사의 할머니…. 그들은 어딘가를 가리키는 지도를 이야기에 숨겨 후대에 전한 끝에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일까. 하지만 재아는 어째서 화성 연구소로 오지 않았을까. 어째서 이주민이 되어 이곳에 있는 걸까. 아무런 장비도 도구도 없는 곳에서 대체 무얼 하려고. “관찰이나 연구 같은 걸 하러 온 게 아니야.” 재아가 내 의문에 답했다. 목소리가 아까와는 또 달라졌다고 느끼며 재아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재아의 눈에서 흰자위가, 오로지 인간만이 가지는 흰자위가 사라진 채 커다란 눈동자가 안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동안 동물원에서, 사진에서, 영상에서 무수히 스친 유인원의 눈이었다. 내게는 한낱 짐승의 시각기관이었던, 무언가를 담고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에 있을 세계를 간절히 좇았고 마침내 그곳을 제 안에 가득 담은 눈이었다. “종이라는 이름으로 진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그 흐름에 끼지 못했을 개체들의 세계를 만나고 싶었어….” 재아의 말이 점점 느리고 어눌해졌다. 발성 기관도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상보다 나아지지 못한… 종의 이름으로 기억되지 않는… 하지만 낙오됐든 잡아먹혔든… 그 순간까지 제 생을 온전히 살다 갔을 개체들….” 종이 아닌 개체를 볼 것. 재아는 이곳에서 몸소 그다음 문장을 쓰고 있었다. 재아는 이러려고, 이렇게 되려고 온 것이었다. 그렇게 찾던 세계, 그것이 되려고. “할머니 얘기를 들을 때마다… 아주 오래전의 내 얘기 같았어…. 사무치게 그리워서… 돌아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어…. 할머니도… 그랬을… 거야….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 머… 니… 도….” 굳어 가는 성대와 입술로 한 어절, 한 음절씩 힘겹게 내뱉는 그 말이 아마도 재아에게서 듣는 마지막 말이 될 것 같았다. 내 눈물을 천천히 닦아 주는 재아의 손바닥이 따뜻하고 거칠었다. 그 손으로 재아가 내 손을 잡고 가만히 끌어다 펴게 했다. 그리고 내 손바닥에 점 두 개를 찍은 다음 그 아래에 천천히 커다란 호를 그렸다. 나는 그 웃음이 그려지는 동안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웃음을 그리는 재아의 손등과 팔뚝에 자라기 시작한 갈색 털을. 재아는 무엇인가를 더 말하려는 듯하다가 목구멍을 긁듯 올라오는 거친 소리를 꿀꺽 삼켰다. 더 이상은 말을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이제는 재아를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재아와 손을 잡은 채 재아가 들어왔던 문 앞까지 함께 걸었다. 그리고 손을 놓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재아의 미소를 손에 꼭 쥔 채. “잘 가. 그리고… 잘 있어.” 재아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멀리서 어슬렁거리던 늑대들이 재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열린 문을 통해 보였다. 그들은 재아를 알아본 것 같았지만 재아를 향해 달려오지는 않았다. 재아와 늑대들은 멀찍이 떨어진 채 서로를 의식하며 조림지를 향해 걸었다.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듯. 잠시 후 늑대들이 하나둘 속도를 내자 재아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마침내 늑대들이 모두 달리기 시작했고, 재아 역시 달리듯 땅을 박차며 빠르게 몇 걸음을 뗐다. 그리고 갑자기 멈춰 섰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재아가 천천히 상체를 굽혔다. 그리고 구부정한 채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네 발이었다. 그때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의 상체가 하나둘 굽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든 사람이 선 채로, 걷는 채로 네 발이 되었다. 사진에서처럼 하늘 빛깔과 대비를 이루는 보색 구름이 낮게 깔린 저녁이었다. 나는 두 발이 붙박인 채 한참 동안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 또한 오래전에 그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출처 :

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id=1489&s_para1=170&Board=n9998&admin=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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