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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mirimlee

[APCTP Plaza] 코드로 그린 그림: 모호한 경계 / 20.6 크로스로드

이주행 /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공학자의 첫 전시회


<코드로 그린 그림: 모호한 경계> — 공학자의 첫 전시회 [소개] 여러분, 이렇게 지면을 통해 제 전시회를 찾아 주시니 반갑습니다. 저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스로 학위를 했고, 현재는 인공지능과 로봇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전시는 2019년 10월 대전 사이언스 페스티벌 기간에 한국화학연구원 디딤돌플라자에서 Artist NEST행사의 하나로 열렸고, 저의 첫 번째 전시입니다. 


전시 제목은 <코드로 그린 그림: 모호한 경계>입니다. 제목이 좀 어렵죠? 여기서 ‘코드’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전시된 그림들은 모두 컴퓨터로 그려진 그림들입니다.  부제로 넣은 ‘모호한 경계’는 몇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선 제가 공학자이면서 예술가로 입문하면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제가 오랫동안 컴퓨터와 수학을 공부하며 다루었던 정형적인 기호의 세계와 그림을 통해 새롭게 탐구하는 비정형적인 패턴의 세계의 만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자세한 의미는 차츰 설명을 드리기로 하구요. 이제 저와 함께 작품을 둘러 보시면서 작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픽셀스택 I] 처음으로 볼 작품은 꽃 사진과 추상화 12개로 구성되어 있는 <Pixel Stack, 2017 봄>입니다. ‘픽셀스택’ 기법으로 만든 시리즈 중 최초의 작품입니다. 이 기법의 탄생은 저의 반복적인 일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대전 한밭수목원에서 거의 매 주말 산책을 하고 꽃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점심 시간마다 요가 동호회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요가 수련을 하고 있는데, 올해로 13년째입니다. 요가를 마무리할 때는 물구나무를 서는데요, 이 때 명상을 하기도 하고 여러가지 재미있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2017년 어느 봄 날, 요가 시간에 물구나무를 서서 전날 찍은 꽃 사진들을 생각했습니다. 여기 세 장의 사진에 있는 홍매화, 산수유, 매화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세 가지 서로 다른 꽃의 색상을 선명하게 담을 수 있어서 매우 만족했습니다. 여러분들 물구나무 서기를 해 보셨나요? 물구나무 자세에서 어떤 형태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피가 거꾸로 쏠려서 그런지 꽃 사진의 픽셀들이 아래로 떨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다 무거운 픽셀이 아래로 떨어지고 가벼운 픽셀이 위로 올라가면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형태를 떠올리기는 어려웠습니다. 

요가가 끝나고 자리에 돌아와서 연구할 때 사용하는 Mathematica 툴을 써서 요가 수련 때의 상상을 컴퓨터 코드로 구현해 보았습니다. 쉽게 결과를 볼 수 있었는데, 지금 보시는 이 세 장의 이미지가 첫 번째 결과입니다. 제가 처음에 상상한 것처럼 무거운 픽셀이 아래로 떨어지고 가벼운 픽셀은 위로 올라갔다는 느낌이 드시나요? 픽셀이 무겁다는 것은 어둡다는 개념으로 대체했습니다. 그래서 바닥에는 어두운 픽셀들이 놓여 있고, 위로 갈 수록 밝은 픽셀들이 놓여 있죠. 저는 이 상상을 구현한 컴퓨터 코드를 ‘픽셀스택(Pixel Stack)’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픽셀스택은 재미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픽셀스택에 입력되는 이미지와 그 결과 이미지는 완전히 동일한 픽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픽셀은 이미지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점을 의미하죠. 두 그림의 픽셀이 동일하다는 것은 같은 레고블록으로 다양한 형상을 만들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주선을 만들던 레고블록으로 마을도 만들 수 있고, 기차도 만들 수 있습니다. 수많은 픽셀이 이동했을 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 모습을 보기 위해 픽셀들을 수작업으로 재배치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수백만 개의 픽셀들이니까요. 이럴 때 컴퓨터 코드를 사용하면 수월합니다. 사실 제가 연구에서 늘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제 그림은 항상 코드와 함께 합니다. 전시 제목 ‘코드로 그린 그림’에 맞게 그림을 그렸던 함수를 함께 표시합니다. 이 경우는 PixelStack[]이라는 함수입니다.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는 함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동작할지를 설정하기 위해 ‘파라미터’를 사용합니다. 첫 번째 상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픽셀스택에GravityBottom이라는 파라미터를 입력했습니다. 

파라미터가 바뀌면 그림도 달라집니다. “중력의 중심이 이미지 중심에 있다면 픽셀들은 어떻게 움직일까?”라고 상상했다면 이에 맞게 파라미터를 설정하면 됩니다. 다음 그림이 중력의 중심을 이미지의 중심에 둔 경우입니다. 이를 위해 파라미터를 GravityCenter라고 설정했습니다. 이 파라미터에 대한 결과를 미리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무거운 픽셀들이 중앙에 모이겠구나.” 실제로 실험을 해 보면 상상과 꽤 유사한 그림이 만들어 집니다. 하지만 진짜 재미는 이미지의 곳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디테일들을 발견하는데 있습니다. 저는 이 재미가 ‘심볼과 패턴의 새로운 관계 맺음’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언어라는 심볼로 상상을 합니다. 언어는 논리적이고 추상적이고 폭넓지만, 복잡한 형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요즘 컴퓨터나 사진기의 발전 덕에 점점 더 복잡한 패턴을 접하게 됩니다만 이 패턴들을 정확히 언어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컴퓨터 코드는 인간과 컴퓨터가 대화하는 언어이고 심볼에 해당합니다.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는 단순한 컴퓨터 코드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면 예상치 못한 패턴이 ‘창발’합니다. 이 새로운 패턴이 ‘시각’과 같은 감각기관을 통해 입력되어 애초의 상상을 만들어 낸 심볼과 연결이 됩니다. 예를 들면, “무거운 픽셀이 떨어진다”는 추상적 심볼과 픽셀스택이 그려낸 구체적인 패턴 사이에 새로운 ‘관계 맺음’이 생기는 것이죠. 심볼과 패턴의 새로운 연결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새로운 상상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이 그림은 픽셀 스택의 세 번째 상상에 해당합니다. 여기서는 픽셀은 물에 떠 있는 입자에 해당합니다. 병에 물과 진흙을 담아 흔든 다음에 가만히 두면 무거운 입자들은 먼저 가라앉고 가벼운 입자들은 그 위에 놓이게 됩니다. 첫 번째 픽셀스택에서는 픽셀들이 한 줄을 따라 정렬되어 전체적인 모습이 복잡했지만, 새로운 픽셀스택에서는 입자들이 캔버스 전체에서 골고루 섞여서 이렇게 차분하고 고요한 패턴이 만들어 집니다. 이 때 파라미터는 Gradation이라고 설정했습니다. 동일한 코드가 만들어낸 서로 다른 파라미터에 대한 픽셀스택 이미지들을 감상하는 것도 즐겁지만, 그 ‘다름’의 원인을 생각해 보는 것 역시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면 ‘엔트로피’는 각 이미지의 서로 다른 복잡도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픽셀스택 II] 두번째 픽셀스택 작품 <Pixel Stack, 2018 가을>은 2018년도 가을에 대전 한밭수목원에서 촬영한 국화 사진의 픽셀을 입력으로 삼았습니다. 12개의 픽셀스택 이미지들이 서로 매우 달라 보이지만 모두 동일한 픽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그림에서 픽셀을 재배치하는 추상적인 아이디어는 GravityCenter로 동일합니다. 즉 이미지 가운데를 중심으로 픽셀들이 정렬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순서를 정하는 기준들을 모두 달리 했습니다. 밝기 대신 특정 색상이 정렬의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픽셀의 각 정렬 기준 별로 생성되는 이미지도 매우 다르지만, 한 이미지 안에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패턴들이 보입니다. 

저는 그림이 던지는 질문을 좋아합니다. 먼저 12개의 픽셀스택 그림들이 함께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같은 픽셀로 그려졌는데 왜 이렇게 다른 걸까요?” 그리고 그림마다 자신의 특이한 패턴에 대해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이 패턴이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설명할 수 있나요?” 작품이 던지는 이런 질문들은 연구자로서 매우 반갑습니다. 신선함 영감과 도전을 주기 때문이죠.  [픽셀스왑 I] 여기서부터는 다른 기법인 ‘픽셀스왑 (Pixel Swap)’으로 만든 작품들을 보시겠습니다. ‘픽셀스택’ 기법을 이용하면 기존 이미지의 픽셀들을 그대로 이용하여 새로운 추상화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는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픽셀의 이동을 결정하는 간단한 수학식으로 얼굴이며 꽃과 같은 복잡한 형상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방법이 바로 픽셀스왑 입니다. 픽셀스왑은 두 장의 이미지가 필요합니다. 한 이미지는 색상을 위한 픽셀을 주고, 다른 이미지는 픽셀들이 이동할 위치를 줍니다. 이렇게 두 이미지가 서로 픽셀을 주고 받으면 한 이미지의 색상으로 다른 이미지의 형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픽셀스왑에는 픽셀스택이 두 개 사용됩니다.

이 픽셀스왑 작품은 <Pixel Swap, 6개의 아몬드 나무>입니다. 아몬드 꽃 그림 여섯 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색상이 모두 다릅니다. 이 중에서 한 개는 원화입니다. 나머지 다섯 개는 제가 찍은 꽃 사진의 픽셀을 이용해서 원화의 형태를 만든 것입니다. 어떤 것이 원화인지 구별이 되시나요? 여러분의 답이 다양하군요. 아마도 그림의 색상이 모두 자연스럽기 때문이겠죠. 픽셀의 재배치가 잘 되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정답은 가운데 위의 그림입니다. 고흐의 <아몬드 나무 (Almond Blossom)> 입니다. 사진기를 통해 수집한 색상으로 좋아하는 명화를 채색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팝아트의 한 기법으로도 볼 수 있고, 기존의 ‘명화’와 같은 이미지를 피사체로 하는 새로운 사진 기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코딩을 이용한 적극적인 감상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픽셀스왑 II] 다음의 그림은 <Pixel Swap, 255 개의 얼굴>입니다. 가로 15, 세로 15개의 격자에 255개의 유명한 자화상과 초상화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15개는 원래의 색상을 갖고 있고, 나머지는 픽셀스왑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이미지들입니다. 어떤 이미지가 원화인지 찾을 수 있으신가요? 매우 어렵죠? 이 그림도 역시 재미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일 수 있죠. 동일한 형태에서 색상이 확연히 다른데 이중에서 원화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은 우리의 색상 기억 능력과 형태 기억 능력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지 모릅니다. 혹시 진화의 과정에서 색상보다는 형태에 민감한 편이 생존에 유리해서 형태 기억 능력이 더 우월하게 진화한 것이 아닐까요?

이 작업을 할 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고흐의 말년의 자화상 입니다. 이 자화상과 다른 그림을 픽셀스왑 해 보면, 이 자화상이 적은 색상으로도 얼마나 극적인 표현을 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고흐의 자화상이 픽셀스왑으로 다른 그림의 색상을 받으면 보통은 더 생동감이 넘쳐 보입니다. 반면에 화사하던 다른 그림들이 고흐 자화상의 색상을 받으면 매우 단조롭게 바뀝니다. 경우에 따라 우울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같은 색상들로 그려진 고흐의 원래 자화상에는 단조로움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삶의 의지가 이글거려 보입니다. 여기서 고흐의 붓 패턴의 위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픽셀스왑 III] 옆에 있는 이 <핑크 고흐>는 픽셀스왑의 가장 재미있는 예의 하나 입니다. 여행중에 제주도 여미지 식물원에서 찍은 분홍색 꽃의 색상을 고흐의 자화상에 옮겨 보았습니다. 고흐의 원화가 가지고 있는 붓 터치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화사한 꽃의 핑크 빛을 옮겨 넣을 수 있었습니다. 

<핑크 고흐>는 고흐의 작품에 대한 저의 애정, 그리고 그의 삶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마무리] 공학자의 예술 작품 전시회가 어떠셨는지요? 이번 첫 전시에서는 ‘모호한 경계’에서 즐기고, 탐구하고, 도전하고 있는 제 모습을 조금 보여드렸습니다. 아직 설명 드리고 싶은 그림들이 많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습니다. 이제 마무리 말씀을 드리며 설명을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술을 매우 좋아합니다만, 아쉽게도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습니다. 주로 개인적인 동기에서 취미로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시를 통해 작품을 공개하고 여러분들과 소통을 해보니, 전시의 매력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관람해 주신 여러분과의 소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설명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면서 저의 부족한 점이 많이 채워졌습니다. 무엇보다 공학과 과학의 축에서 주로 펼쳐지던 제 삶이 예술이라는 새로운 축을 만나 확장되고 있는 것 같아서 무척 신나고 즐겁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이 ‘모호한 경계’의 영역을 탐험하며 또 즐겨 볼까 합니다. 기회가 되면 더 넓어지고 새로워진 ‘감각의 지평’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Board=n9998&id=1557&s_para1=177&s_para4=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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