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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CTP Plaza] 창의성과 평가 / 20.1 크로스로드

김두철 /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 前 기초과학연구원장

김두철 前 기초과학연구원장

1. 정형화된 인재  우리나라가 기초과학에서 세계에 뒤떨어졌다는 것을 말할 때, 아직 노벨과학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단골로 거론된다. 평생을 물리학의 교육, 연구에 종사하면서 살아온 본인으로서는 유구무언이다. 죄인의 심정이다. 최근에는 4차 산업혁명에서 뒤처져서는 안된다는 인식 아래 AI대학원 설립 등 다양한 정부 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여기서도 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은 선진국에 빼앗긴 채 뒤따라가려는 노력이 애처롭다. 삼성전자와 같은 제조업에서는 세계 1등을 하면서도 그 기초가 되는 기초과학에서는 세계 1등이 되지 못하고 있다.   웬만한 일에는 무덤덤한 나이지만 21세기 들어서는 티브이 뉴스 화면을 보며 이건 말도 안돼, 세상에 저런 일이 있나 하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건이 종종 있었다. 뉴욕 살 때 매일 보아 친숙한 뉴욕 무역센터 빌딩이 9.11테러로 녹아 내리던 장면, 세월호가 어린 학생들을 품은 채 가라앉는 장면 등등. 그에 못지않은 충격으로 2016년 3월, 이세돌이 5일간 알파고와의 대결 끝에 겨우 한판 건진 사건도 꼽아야겠다. 나중에 보니 이 알파고는 AI바둑의 왕초보였는데도. 이것이 나에게 더욱 엄청난 경악으로 다가온 이유가 있다. 알파고 프로그램에 사용된 신경망(neural network)에 대하여는 1980년대 후반 기초학문에서 뜨거운 주제가 되어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그룹이 연구하였고 내가 전공하는 통계물리학계에서도 열심히 연구하던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 후 그 분야의 지원이 끊긴 이유도 있지만, 연구자들도 흥미를 잃어 분야 전체가 죽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는 신념을 가지고 계속 연구를 하여 요즈음 AI에 응용되는 알고리듬을 개발해 냈고 그것이 지금 4차 산업혁명의 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모르는 사이 이 분야가 그렇게 발전했다는 것이 충격이었고, AI가 그리는 미래가 상상이 되지 않아 충격이었다. 곧 나오는 자괴감이 그럼 우리나라에서는 왜 그 연구를 외면하였고, 왜 제프리 힌턴 같은 학자를 배출하지 못했는가 하는 생각이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딥러닝을 구현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고 한다. 왜 우리는 항상 남을 쫓아가야만 하나?   물리학자들이 많이 구독하는 피직스투데이(Physics Today)라는 월간지가 있다. 미국 물리학회에서 발간하는데 새로운 학문 흐름도 소개하고 정책적인 기사도 난다. 일전에 그 잡지의 기자 토니 페더(Toni Feder)라는 분과 전화로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상황에 관하여 이야기 나누던 중 뜬금없는 질문으로 나를 당황케 하였다. “미국에서는 한국 학생들이 대개 정형화(stereotyped) 된 인재라는 평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냐?” 평소 그런 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라 완강히 부인을 못 했는데 다행히 기사화되지는 않았다. 미국 대학에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이 학위를 딸 때까지는 잘 하는데 그 후부터는 힘이 달려 더 뻗어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 속설 아닌 속설로 되어 있다. 물론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적어도 기초과학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나온 획기적인 성과가 드물다. 기초과학계의 수준이 아직 낮다는 것이다. 나는 그 근본 원인을 우리나라 문화에 정착된 잘못된 평가시스템에서 찾고 싶다. 평가시스템이 결국 창의적인 연구보다는 남을 따라가는 연구에 치우치게 만든다는 것이다. 2. 평가라는 족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을 평가의 족쇄에 묶여 살아간다. 학생 때는 공부를 재미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시험이라는 평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문제가 출제되는지 재빨리 파악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한 공부에 매달리게 된다. 고등학교의 내신을 위한 공부도 그렇고 수능을 위한 공부도 같다. 출제는 정상분포를 목표로 해야 하고, 채점은 기계적이어야 하고, 사교육을 유발하면 안되고, 하는 틀에 갇혀 시험 문제가 결정된다. 출제하는 사람들은 현실적 제한으로 배배 꼬고 문제 유형을 달달 외우는 학생이 유리한 문제를 낼 수 밖에 없다. 학생들은 그러한 문제를 풀기 위한 훈련에 길들여져 간다. 이러한 입시제도의 폐해는 누누이 지적되고 있으나 획기적인 개선은 요원하다.   요즈음은 영재교육이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느낌이나 영재교육 활성화의 일환으로 국제올림피아드에 한국대표를 파견하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 들어와서이다. 국제물리올림피아드의 경우, 초창기에는 전국의 교장 선생님에게 영재급 학생을 보내달라고 애걸하여 그렇게 추천받은 소수의 학생들을 모아 개인 교습 형태로 훈련시켜 참가시키고는 하였다. 그러다가 국제올림피아드 참가 실적이 대학 입학에 반영되면서부터는 또 다른 시험 생태계가 형성된다. 학부모들로부터 대표 학생 선발의 공정성, 객관성을 요구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훈련반 모집부터 대표 선정의 모든 절차가 객관적 시험에 의존하도록 제도가 변하게 되었다. 시험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나 객관적 시험으로 선발하려면 시험 문제가 창의성 있는 학생을 선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짧은 시간 내에 그런 문제를 출제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본인의 경험이다. 2004년에 우리나라에서 유치한 국제물리올림피아드에 필요한 문제 몇 개를 만드느라 16명의 대학교수가 2년간이나 고심하며 작업을 한 것으로 보아도 제대로 된 출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출제가 부실하면, 결국 대학 과정 수준의 선행학습을 한 학생이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창의적인 학생을 선발한다는 목표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그런 시험을 위해 사교육이 번창하였고 이런 부작용 때문에 결국 올림피아드 참가 실적은 대학 입시에 반영되지 않게 되었다.  대학교육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족보니 뭐니가 판친다는 것 자체가 시험에 의한 평가의 한계를 보여준다. 다만 소규모 그룹에서의 토론이나 팀 프로젝트 방식이 그나마 획일적인 평가를 보완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을 해도 인사고과, 동료평가, 다면평가가 평생을 지배한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연구자의 길에 들어서면 어떨까? 연구는 창의적인 활동이고 그 결과는 연구논문으로 발표되어 사회의 평가를 받는다. 진정한 의미의 연구는 눈에 보이는,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연구가 아니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 안에 연구 결과를 내어 박사학위 심사를 받으려면 대부분 결과가 눈에 보이는 연구를 할 수 밖에 없다. 결과가 눈에 보인다는 말은 남 (지도교수 혹은 해외 학자) 들이 이미 해놓은 연구에 조금 더 진전을 보아 논문을 쓴다는 것이다. 졸업을 하고 학자의 길로 가겠다고 포닥 생활을 해도 당장 수년 앞의 취직이 걱정되어 논문 압박에 시달린다. 우선 취직에 유리한 연구를 하게 몰린다. 그래서 몇 편의 논문을 가지고 연구소나 대학에 이력서를 들이민다. 평가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 또는 위원회는 연구자의 연구실적을 어떤 방식으로든 평가해야 한다. 논문이 실린 학술지가 얼마나 권위있는가 하는 지표 -학술지 마다 임팩트 팩터(Journal Impact Factor, JIF)라는 수치가 있다- 와 다른 연구자들이 얼마나 그 논문을 읽고 써먹었는가 하는 지표 -개별 논문 마다 피인용수(citation number)라는 수치가 있다- 와 같은 정량적 수치가 활용되는 현실이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평가 수치가 어느 정도 연구업적의 수준을 말해주기는 하나 진정 혁신적인 창의적인 결과물을 알아보고 골라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2012년에는 생명과학 노벨 수상자들이 주축이 되어 샌프란시스코연구평가선언(DORA)이란 것을 했다. 연구성과 평가에 JIF를 고려하지 말자는 운동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네이처, 사이언스에 실린, JIF 높은 논문을 무조건 더 쳐주는 – 그 내용은 불문하고- 관행을 고치기에는 역부족이다. 따라서 연구자는 그러한 수치에 유리한 연구를 하게 되고 그런 시스템에 잘 적응한 사람이 살아남게 된다. 그나마 이런 정량적 평가를 보완하는 것이 추천서 제도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존 내쉬가 대학원 입학을 위해 받은 추천서는 그냥 “그 사람 수학천재야”라는 짧막한 문장이었다고 한다. 요즈음은 최소 두 세 장의 추천서에서 구구절절이 그 사람의 능력을 강변한다. 소위 동료평가라는 것이다. 쓰는 사람이나 그것을 읽는 사람이나 주관과 행간을 해석하는 요소가 들어가나 한사람에 대한 여러 명의 추천서가 합쳐져 적절한 최선의 판단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적 특성으로 추천서에 의한 평가 방식이 작동하지 않는다. 대학에서 교수를 채용할 때도 추천서는 형식적인 보조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포닥하는 동안 논문이 없었어도 그 사람의 가능성을 보고 교수로 뽑을 수 있어야 진정 혁신적인 연구가 가능하다. 198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켄 윌슨은 조교수 시절 논문이 하나도 없었지만 학부장의 배려로 정년보장을 받았고 (1970년), 그 다음 해에 노벨상 업적이 될 논문을 발표했다. 이번 정부들어 지침을 만든 블라인드 채용을 연구계에도 적용하는 것은 세계의 웃음거리이다.  대학 사회에서는 일단 교수가 되어도 학부생의 강의 평가, 대학원생의 실험실 평가의 눈치를 보며 살게 된다. 연구중심대학에서는 학생 인건비와 실험실 유지를 위한 연구비 확보가 교수의 절실한 과제다. 이때 연구계획서에 대한 평가가 학자의 인생을 좌우한다. 특히 다른 분야끼리 경쟁하는 집단연구 선정에는 그 평가 시스템이 정량적 평가에 치우쳐 도전적인 연구를 하는 것은 꿈에도 꾸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연구비를 따서 성공적으로 훌륭한 연구 성과를 쌓은 소수의 사람들은 각종 상이나 명예로운 단체의 회원이 되기 위해 또 다시 업적평가를 받는다. 여기서도 종종 겉핡기 식, 정량적인 평가가 눈에 보이는데 앞으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러한 평가의 시스템 속에 살아가는 연구자들은 자연히 평가 잘 받기 위한, 남 따라가는 연구에 치중하게 된다. 그것은 진정한 독창적인 연구, 앞서가는 연구, 세계를 이끌어갈 연구를 하는데 저해 요소가 됨이 분명하다. 3. 창의성을 위한 평가를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기초과학 발전을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우선 평가의 목표가 창의적, 선도적인 연구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는 철학을 분명히 해야 한다. 여태까지의 따라가는 연구를 계속해서는 기초과학 후진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초과학에 투자하는 세금을 낭비하는 결과만 가져온다. 분명한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평가자로 모이면 같은 학과 같은 연구실 출신끼리는 봐줄 것이니 제외한다는 소위 상피제도의 제척 사항을 엄격히 따질 필요가 없다. 은퇴한 원로 연구자를 평가자로 더 많이 활용하는 것도 방안이다. 절대평가로 예산은 10명을 지원할 수 있더라고 적격자가 적으면 5명만 지원하기도 해야 한다. 사람 잘못 뽑으면 그 조직이 망하는 것을 넘어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친다. 이런 평가의 철학을 정립하고 걸맞은 문화를 정착시켜 사회의 신뢰를 얻는 것은 과학자의 몫이다.  다음으로는 평가 주체가 평가에 더 투자해야 한다. 평가자는 시간과 정성을 더 투자해야 한다. 연구비라면 연구 제안에 대해, 인사적인 일이라면 과거 업적에 대해 충분히 공부하고 필요하면 평가 패널 다자간 토론의 기회를 가져야 바람직하다. 평가를 위촉하는 기관은 더 충분한 예산 배정, 공정한 평가팀 구성, 평가 방식 개선 등 평가시스템의 혁신이 필요하다. 외국 기업체나 대학에서 사람 하나 쓰기 위해 들이는 정성은 꼭 본받아야 할 부분이다. 큰 연구비에서는 2013년부터 운영되는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의 예를 참고할 만하다. 기초과학연구원에서는 연구단의 성과평가에 외국인 석학 중심의 전문가 패널이 구성되어 운영된다.

IBS-Royal Society Conference 개막식에서 인사말 전하는 김두철 前 기초과학연구원장  마지막으로는 이 모든 과정을 가능한 한 투명하게 공개하자는 것이다. 피평가자와 평가자의 토론 기회가 있으면 피평가자의 이의제기도 적어짐을 볼 수 있다. 평가자가 소신 있게 평가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그 명단을 공개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점점 공개 범위를 넓혀가는 추세이기도 하다. 논문 심사마저 네이처 등 권위 있는 학술지에서는 심사자가 원하면 투고자들에게 신분을 밝히고 토론을 한다. 주요 학술상 시상식에 가보면 행사 자료에 심사위원 명단이 나와 있다. 한국연구재단에서도 요즈음은 평가자 공개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평가자는 책임감을 느끼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4. 과학선진국으로 가는 길  평가의 질곡에서 살아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평가는 공정하고 합목적적이 되어야 한다. 최근 기업체 채용에는 AI가 많이 동원되는 모양이다. 그쪽 전문가가 아니라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연구과제의 창의성을, 또는 연구자의 창의적 발전 가능성을, AI가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지 않을까 싶다. 평가를 인간이 하니 불완전할 수 밖에 없기는 하다. 최선을 다할 뿐이다.  기초과학 연구는 거의 다 정부의 지원 즉 국민 세금에 의하여 유지된다. 기초과학 정부연구비도 많이 증가했다. 그에 따라 과학자의 윤리 및 책무감도 증가해야 한다. 진정 우리나라가 과학 선진국이 되어야 그간 세금으로 지원된 과학이 사회에 보답하는 것이다. 과학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남을 따라가는 연구는 그만해야 된다. 아니면 세금 낭비다.  정확한 평가를 통해서 창의적이고 선도적인 연구를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가 과학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다. 출처: 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id=1509&s_para1=172&Board=n9998&admin=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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