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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CTP Plaza]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허(許)하라 / 19.12 크로스로드
언어가 다른데, 어찌 하오리까?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은 어느 분야에서나 중요하다. ‘언어’ 장벽이 있다면 외국인과 의사소통할 때처럼 커뮤니케이션의 난이도가 높아진다. 누군가 상대의 언어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니까. 과학 분야에서의 커뮤니케이션도 이와 비슷하다. 일반 대중과 과학자 사이뿐만 아니라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소통을 위해서는 그 분야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같은 단어를 보고도 서로 다른 뜻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염소’라는 단어는 동물 이름도 있지만, 원소 이름도 있다.
과학기자로 일하던 시절, 과학기사를 쓸 때 선배나 팀장으로부터 되도록 ‘전문 용어’를 쓰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과학 분야의 전문 용어를 하나 더 쓸 때마다 기사의 독자가 줄어든다고. 이처럼 과학 분야의 전문 용어는 경제나 스포츠 분야의 전문 용어와 달리 따로 설명이 필요할 정도로 일반 독자에게 낯선 존재인 셈이다. 선물(先物)이나 홈런은 설명할 필요가 없는데, 왜 양성자는 설명해야 할까.
필자는 학부와 석사 때 천문학을 전공한 뒤 <별과 우주>라는 천문학잡지에서 과학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동아사이언스에 입사해 <과학동아> 기자 및 편집장, <수학동아> 편집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중간에 3년여 동안(이 기간에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을 겪기도 했다) 과학기술부 출입 기자로서 <동아일보>의 과학 분야를 담당하기도 했다.

(서울대 이호영 교수와 인터뷰하는 이충환 이사(왼쪽), ⓒ 남덕우 )
사실 일간 신문과 잡지에 쓰는 과학기사는 여러모로 다르다. 분량에도 차이가 있지만, 글을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신문에서는 면 톱기사가 아니면 과학 분야의 어떤 내용이든 ‘수박 겉핥기’를 할 수밖에 없다. 때로 취재원인 과학자나 일반 독자로부터 오해를 사기도 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잡지에 싣는 과학기사가 쓰기 쉽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잡지는 논문을 싣는 저널이나 기관에 제출하는 보고서가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내용이라도 기사를 딱딱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아이템이 참신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글을 풀어가는 방식도 흥미로워야 한다. 신문이든 잡지든 독자가 읽지 않으면 안 되니 말이다.
<과학동아>에 게재한 기사 중에서 지금도 기억 나는 기사가 있다. 일반기사로는 2007년 6월호에 실린 ‘파일럿이 두려워하는 메가 번개’이고, 기획기사로는 2001년 5월호 특집 ‘특명 우주 밖 생명체를 찾아라-우주생물학이 추적하는 외계인의 흔적’이다. 메가 번개(megalightning)는 지상으로 치는 일반 번개와 달리 성층권에서 위로 치는 대규모 번개를 말하는데, 국내 과학잡지에서 처음 다룬 아이템이라 독자들 반응이 뜨거웠다. 그리고 우주생물학은 태양계, 은하, 우주에서 생명체가 어떻게 존재할지에 대해 다루는 천문학의 신생 분야였는데, 당시 이 분야를 깊이 있게 소개하는 것은 처음이라 나름대로 의미 있는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기사에서 영문 ‘astrobiology’를 어떻게 우리말로 바꿀까 고심한 끝에 ‘우주생물학’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과학 커뮤니케이션이 실패하는 이유
기자로 근무하면서 과학언론학에 관심이 있어서 이 분야의 박사 과정을 밟기도 했다. 현장에서 과학보도에 대한 어려움을 느낀 바를 바탕으로 ‘과학보도 실패에 대한 ANT 사례 분석’이란 제목의 학위논문을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동료 과학기자들에게 설문조사와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고, 과학보도 실패 사례 2가지를 행위자네트워크이론(Actor Network Theory, ANT)으로 분석했다. ANT에서는 과학자, 기자 같은 인간 행위자뿐만 아니라 보도자료, 기사 같은 비인간 행위자도 중요하게 작동한다. 과학보도 실패 사례를 분석한 결과, 과학자, 홍보 관계자, 기자 등 다양한 행위자가 과학보도를 둘러싸고 각각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가운데, 과학기자는 과학자에 의존하기 쉬우며, 보도자료 같은 비인간 행위자도 인간 행위자의 예상을 벗어난 행위능력(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과학은 이해하기 어렵다. 편견이 아니라 실제 그렇다. 과학자와 대중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생각보다 크다. 보통 과학기자는 이 간극을 메우는 매개자로 간주된다. 일부에서는 과학 대중화를 과학기자가 과학자의 대변인으로 연구성과를 대중에게 해설해주는 것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과학기자는 어려운 과학을 다루거나 과학연구를 응원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과학자 편에 서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언론의 생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대중은 교육을 통해 과학을 이해시켜야 하는 대상쯤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사실은 대중은 우중(愚衆)이 아니다. 대중은 단순한 일반인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일반인이다. 이 중에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도 있고, 심지어 다른 분야의 과학자도 있다. 과학 대중화에 앞장선다면서 일방적으로 대중을 가르치려 들다 보면, 그런 커뮤니케이션은 실패하기 십상이다. 과학 대중화를 대중과의 소통이라고 본다면,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에 대해 좀 더 고민해야 하며, 다양한 층위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과학콘텐츠 만물상’을 꿈꾸며
현재 필자는 동아사이언스 출신이 모여서 만든 과학콘텐츠 소기업 ㈜동아에스앤씨에서 일하고 있다. 동아에스앤씨(Donga S&C)는 동아사이언스 앤드 커뮤니케이션(Donga Science & Communication)의 약자로, 다양한 과학 관련 기관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과학으로 소통하는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고객사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기초과학연구원(IBS),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재료연구소, 과학기술인공제회, 한국과학창의재단, 한국에너지정보문화재단, 서울물연구원, 국가마우스표현형분석사업단 등이 있다.
사실 동아에스앤씨는 여러 종류의 과학콘텐츠를 다루고 있는 ‘만물상’이다. 학생기자들의 취재 및 글쓰기를 돕는 데서부터 회원 대상(일반인, 연구원 등)의 정보, 기관에서 필요한 정보를 생산하고 가공하며 배포하기까지 다양한 일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과학콘텐츠는 웹진, 뉴스레터, 카드뉴스, 만화 및 일반 단행본, 기관소식지, 성과사례집, 백서, 국문 및 영문 기관홍보매거진 등으로 다양한 틀에 담긴다.

(동아에스앤씨(Donga S&C) 제작물)
일을 시작하기 전, 고객사와 협의할 때 맨 먼저 하는 질문이 있다. 이 콘텐츠의 독자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흔히 우리는 일방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는 경우를 본다. 고객사에서도 본인들이 전달하고 싶은 내용만을 얘기하며 일을 의뢰하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은 상대와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가능하므로, 상대를 고려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고객사가 만들고자 하는 과학콘텐츠도 누구한테 전달하고 싶은지에 따라 그 콘텐츠의 난이도, 형태 등을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고학년생부터 중학생까지 볼 수 있는 만화 단행본, 엄마와 아이가 함께 부엌에서 요리할 때 볼 수 있는 일반 단행본, 일반 국민이 재밌게 볼 수 있는 과학 이야기를 담은 뉴스레터, 동료 연구원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관매거진 등이 탄생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고객사는 우리가 만든 콘텐츠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과학의 언어를 깊이 있게 이해한 뒤 원하는 독자를 대상으로 맞춤형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 고객사와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이때는 상정했던 콘텐츠의 독자를 자꾸 바꾸거나(또는 일반인부터 연구자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요구하기도 하는데,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실무자와 협의된 사항을 윗사람이 흔들어 놓는 경우가 흔하다. 커뮤니케이션을 고려한 콘텐츠 제작 방향이 틀어지는 것이다. 이런 경우 윗사람이 원하는 콘텐츠를 만들 수밖에 없으며,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은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 물론 과학 커뮤니케이션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강조한다. 과학과 커뮤니케이션 모두를 이해하고 있으니 고객사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다고. 우리에게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허(許)해 달라고.
출처: 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id=1506&s_para1=171&Board=n9998&admin=y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