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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CTP Plaza] 과문위에서의 11년 / 19.11 크로스로드

김상욱 / 경희대학교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연구센터(이하 아태센터) 과학문화위원회(이하 과문위)를 떠나자마자 소회를 글로 남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크로스로드의 plaza 꼭지다. 과문위를 떠난 사람에게는 언제나 글을 요청했던 터라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글을 쓰자니 막막한 느낌이 든다. 원래 이런 종류의 글이 쓰기 쉽지 않은 법이다. 내가 그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을 괴롭혀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과문위 위원들도 나중에야 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는 담담한 에세이를 쓰려한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2005년 크로스로드가 탄생하던 순간, 정재승 교수 손에 이끌려 자의 반 타의 반 시작한 일이다. 건강상의 이유로 중간에 4년 정도 빠진 것을 고려해도 햇수로 만 11년이다. 처음에 정말 나이브한 이유로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이공계위기가 사회적 이슈가 되던 때였다. 우수한 학생들이 더 이상 이공계 대학에 지원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개인이 알아서 최선으로 판단한 것이니,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것은 아니었다. 당시는 우리, 아니 나라도 뭔가 해야 한다는 주제넘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2005년은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 번역되어 ‘융합’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시기이기도 했다.  적어도 나에게 ‘크로스로드’라는 이름은 이렇게 과학계몽이라는 시대착오적 사명감과 융합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오롯이 반영한 작명이었다. 솔직히 당시 과문위의 일이 나에게 아주 재미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과학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나조차도 명확한 생각이 없었다. 다른 학문 분야와의 융합을 통해 그 목표를 이루어야했는데, 이에 대해 나 자신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더구나 조교수 시절이라 재계약 및 승진을 위한 연구업적 압박에 스트레스를 받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마 정재승 교수가 아니었으면 이 모임에 오래 참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부득이 위원회를 그만두었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2010년 과문위에 다시 참여하게 된다. 참여제안이 왔을 때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덥석 수락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2010년의 대한민국은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인 사회로 퇴행하는 중이었다. 곧이어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비민주가 아니라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무법천지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세상이 이성과 합리를 잊어버린 듯 보였다.  역사적으로 서양사회에 이성의 가치를 일깨우고 합리적 사고방식을 자리 잡게 한 철학 사조는 ‘계몽주의’다. 물론 21세기, 계몽주의는 철지난 구닥다리 철학이다. 누가 누굴 계몽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과연 우리는 계몽주의라도 제대로 소화한 것일까? 우리는 정말 비합리적 전근대를 벗어난 것일까? 자연과학이 계몽주의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듯이, 사람들이 좀 더 과학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사회가 나아지지 않을까하는 소박한 생각을 했다. 그렇다. 당시 생각에 문제는 과학이었다.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과학은 객관적이고 재현 가능한 물질적 증거에만 의존하여 결론을 내리는 방법이다. 증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일반화하여 몇 가지 원리로 압축하기도 한다. 이렇게 압축된 것을 법칙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귀납법에 의존하고 있는 한 과학은 본질적으로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기존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거가 쌓이면 과학자는 새로운 법칙을 수립하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바로 이런 과학의 정신이 사회에 스며들게 하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사뭇 거창한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는 여기저기 사회성 짙은 칼럼을 쓰고, 대중강연 요청이 오면 기꺼이 시간을 냈다. 결국 이 당시 쓰인 글들은 훗날 <김상욱의 과학공부>라는 물리와 물리 아닌 것이 반씩 뒤섞인 에세이 같은 책으로 출판된다. 당시 출판사는 ‘철학하는 과학자, 시를 품은 물리학’이라고 책을 홍보했지만 내 생각엔 사회에 대한 개인적 열망을 부적절하지만 멋지게 과대 포장한 것에 다름 아니다.  아태 과문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크로스로드라는 웹진과 여러 가지 오프라인 행사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만나는 일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웹진뿐만 아니라 모든 글을 쓰는 매체가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필자다. 한때, 여러 과학자에게 기회를 주어 필자로 만드는 시도도 해보았으나, 결국 글 잘 쓰는 과학자에게 맡기는 편이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작가의 풀이 작다는 문제가 있었으나, 다행히도 교양과학 출판계의 필진이 늘어나 이제는 원고 수급에 큰 문제는 없게 되었다. 특히 SF는 크로스로드의 자랑이라 할만하다. 10년 가까이 SF 신인작가 등용문의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SF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주는 거의 유일한 매체인 적도 있었다. 이제 SF 문학상도 여럿 생기고 시장도 확대되었으니, SF에서 크로스로드의 역할도 새롭게 진화하는 중이다.  과문위의 오프라인 활동은 강연이라는 익숙한 방식이외에 ‘소백산천문대 창작자 워크숍’ (이하 소백산워크숍)‘과 ‘올해의 과학도서’와 같은 특별한 행사를 포함한다. 아태 과문위는 대규모 예산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과학문화 확산을 전업으로 하는 전문가들이 모인 조직도 아니다. 그렇다면 웹진 이외에 중점에 둘 목표는 과학문화 확산의 허브가 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었다. 즉, 우리가 모든 걸 나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연결해주자는 거다.

(2019년도 과학과 문화예술 소통워크숍Ⅰ)  소백산워크숍은 작가, 방송인, 예술가 같은 창작자와 과학자를 직접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이다. 1년에 두 번, 소백산천문대라는 천혜의 고립지역에 사람들을 가두고 서로 소통하도록 강제하는 무시무시한(?) 기획이지만, 이틀 밤을 함께 지새우며 이야기하다보면 서로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마술 같은 모임이다. 이 행사를 통해 얻어낸 성과를 정량적으로 계산할 수는 없다. 과학에 관심이 있어 과학계를 기웃거리던 여러 분야의 사람들에게 과학자와 소통할 기회를 주고, 다른 분야에 관심이 많은 과학자에게 창작자들을 접할 기회를 주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렇게 뿌려진 씨앗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시간만이 답을 알 것이다.  올해의 과학책은 오직 과학책만 대상으로 우수도서를 선정하는 기획이다. 모든 책을 대상으로 하는 여타의 올해의 책과 차별성이 있다. 선정된 책을 가지고 다음 해에 여러 가지 행사를 하게 되어, 저자들에게도 도움이 되고자 했다. 과문위 초기만 해도 대개 국외 작가의 책이 선정되었으나, 최근에는 국내 작가들이 강세를 보여 신인 우수 작가를 알리는 홍보의 창구도 되고 있다. 그래서 작년부터는 올해의 책 시상식을 국내 과학책 저술가들의 연말 축제로 성황리에 치루고 있다. 이 역시 과문위가 과학문화 확산의 허브가 된다는 취지에 부합하는 기획이다.

(2017년도 APCTP 선정 과학도서 10선 도서강연회)  끝으로 앞으로의 과학문화 활동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최근 과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과학기술에 대한 단순 흥미나 자녀교육 차원의 관심이 아닌, 과학을 교양의 하나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뜻이다.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과학이 인문학보다 멀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많은 교양강좌나 인문학 프로그램에도 과학이 종종 들어가는 것을 보면, 과학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각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과학문화 확산을 본업으로 삼으려는 청년들도 나타났는데, 이는 현재 왕성히 활동하는 과학문화 전문가들(?)의 이력을 볼 때 새로운 현상이라 할만하다. 과문위가 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하다.  과학이 교양으로 자리 잡으면 그 다음은 문화가 되는 것이 자연스런 순서일 것이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음악이 교양이라면, 극장에 가서 연주를 즐기는 것이 문화다. 과학이 문화가 되려면 과학을 즐길 수 있는 대중의 저변 확대도 중요하지만, 문화로 즐길 만한 수준 높은 양질의 콘텐츠가 제공되어야한다. 하지만 과학이 문화라고 할 때, 예술과 같은 공연, 전시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원래 과학은 물질적 증거, 즉 실험에 근거한 학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실험과 결합된 활동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기위한 깊이 있는 내용의 콘텐츠 제공에도 고민을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즉, 고급 콘텐츠의 개발을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문위를 떠나며 지난 일을 돌이켜보니 고생한 것보다 행복했던 시간들이 더 많이 기억난다. 지난 10여 년 과문위 활동을 하다 보니 나도 평범한 과학자의 삶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길을 걷게 된 것 같다. 나는 이 길을 가는 것이 재미있었고, 앞으로 만날 사람과 마주칠 사건들이 기대된다. 이 길을 뒤따라오는 사람들도 나와 같은 기쁨을 느끼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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