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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FI] 메멘토 메모리 (Memento Me, Mori) / 20.2 크로스로드

황성식 /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유지원) 혼자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자기도 모르게 한 곳만 바라보며 집중하다 보면 나머지 것들을 놓치게 된다. 중요한 하나를 지키려다 더 많은 걸 잃는 것이다. 지금 라미의 아버지가 그랬다. 그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라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미는 그런 아버지가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싶었다. 라미가 물었다. “아빠. 엄마 기억나?” 라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물론 기억 안 나겠지. 그래도 잘 생각해보면 생각이 날 수도 있지 않을까?” 대답 없는 아버지의 눈이 여전히 라미를 향하고 있었다. “설마, 내가 지금 거짓말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일이 일어난 적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여전한 침묵. 라미는 아버지가 대답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억울함을 느꼈다. 거짓말쟁이로 몰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있다 뭔가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튕겼다. “증거가 있어. 엄마가 있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지금 아빠 앞에 있는 나 말이야, 나. 엄마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 모라미.” 아버지와의 대화는 언제나 라미의 모노드라마가 됐다. 때로는 관객의 반응 없는 스탠딩 코미디 같기도 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앉아있었지만. 라미의 아버지는 요양원 침대 위에 앉아 있었고, 라미는 침대 옆에 접이식 의자를 펴고 앉아 있었다. 1인실 병실 안에는 침대를 제외하고는 가구랄 것이 별로 없었다. 벽과 천장, 바닥이 모두 흰색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더 현실에서 동떨어져 보였다. “어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응?” 라미는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는 듯이 씨익 웃어보였다. 그는 혼자서 묻고 대답하는 이 기묘한 대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근데 말이야. 지금 엄마도 아빠를 기억 못하거든. 그러니까 아빠와 엄마는 서로를 모르는 상태인데, 둘이 부부였다는 증거인 나는 지금 여기 있는 거지. 잠깐, 그러면 나는 증거로서의 가치가 있는 건가. 어떻게 내 말을 믿지?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20년 가까이 부부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말이야.” 라미는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라미가 모노드라마를 벌이는 이유는 아버지의 상태 때문이었다. 눈도 뜨고 있었고, 일으키면 앉을 수도 있었지만 의식은 전혀 없었다. 의식을 가질만한 두뇌활동이 정지한 탓이었다. 라미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아무런 기억도 없이 아버지의 머리는 백지장처럼 비어있었다. 간병인은 라미에게 계속해서 말을 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끔씩 다시 의식을 되찾는 희귀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버지는 기적이 아니면 깨어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사실상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게 예방하는 의미의 대화라고 볼 수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로 두뇌를 자극하는 정도의. “이러다 나까지 기억을 잊어버리면… 우리 가족은 그냥 남이 되는 거네?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엄마, 아빠도 내 존재의 증거라는 말이야. …그렇지.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라미는 매주 금요일 저녁, 요양원을 찾았다. 라미에게는 일주일 중 가장 괴로운 순간이기도 했다. 라미의 아버지는 텅 빈 눈으로 말없이 그의 아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라미는 스스럼없이 아버지를 대하다가도 때때로 그 눈을 마주보기가 꺼려졌다. 깊고 검은 아버지의 눈은 라미의 것과 닮아 있었다. 라미는 그 눈을 바라볼 때마다 미래의 자신과 마주한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일은 재밌어. 아니, 재미없나? 늘 똑같긴 하지만… 먹고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남들도 다 그렇게 살더라. 아빠도 그랬잖아. 아빠는 너무 지나쳐서 문제였지만.” 라미의 아버지는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직업들을 집어삼키고, 아직 새로운 직업을 내뱉지는 않은 시절의 사람이었다. 당시만 해도 보험설계사가 인공지능 시대에 살아남을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항상 자신이 선구안을 발휘해 보험설계사가 된 것처럼 이야기 했지만 사실과 달랐다. 먹고 살기 위해 허우적대다가 손에 잡힌 직업이 보험설계사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게 그의 인생에 있어 유일한 행운이었는지 몰랐다. “아빠한테는 좋은 일이었지, 안 그래? 그래서 엄마랑 만나고 결혼도 할 수 있었잖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빠는 신이 났던 것 같아. 가만히 있어도 기운이 넘쳤었잖아.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게 잘 믿기질 않아. 지금은 그런 기회가 없어. 언제나 좋은 시절은 짧기 마련이잖아. 미래가 아빠 생각처럼 되지는 않았어. 뭐, 누군들 예상했겠어.” 보험영업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소수의 직업군에 속했기 때문에 소득이 높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부가 지급하는 수당을 받는 데 익숙해졌다. 그때는 지금처럼 ‘직업을 위한 직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는 수치스러워 하면서 수당을 받았다면, 지금은 일하는 시늉을 하고 당당히 수당을 받았다. 수당으로는 생계만 유지할 뿐, 생활이 윤택해 질 정도는 아니었다. 의욕을 잃고 가상현실 게임이나 그와 비슷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빠져드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어른들은 그들을 ‘증강인간’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점점 부유해지는 감각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아빠는 조금만 더 움직이면 중산층이 될 수 있다고 믿었잖아. 그 마음 하나가 아빠를 밀어붙였던 거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평생을 다 바쳐도 가능할 것 같지 않았는데도 말이야. 그래도 아빠는 포기하지 않았어. ‘부는 진보해. 내가 못 이룬 부는 네가 이룰 거야.’ 아빠가 나한테 그랬잖아.” 그렇게 아버지는 평생 일만 하다 환갑이 되기도 전에 두뇌가 멈췄고, 요양원에 누웠다. 누적된 스트레스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어머니와 갈라선 지 넉 달만의 일이었다. 라미의 어머니는 이혼과 함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 그게 벌써 7년 전 일이었다. “그땐 몰랐지. 아빠가 이렇게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는. …어쩌면 그때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그랬으면 생명보험금이라도….” 라미는 자신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슬쩍 아버지를 보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알아들은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시커먼 두 구멍이 라미를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가만히 앉아 자신의 아들에게서, 자기 과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 설명들이 지나치게 잔인하다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이 아버지에게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것이 진짜 문제였다. 라미가 해주는 말들은 아버지 혼자서는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아버지에게 기회가 있었을지 몰랐다. 이제 아버지를 구할 수 있는 건 기적뿐이었지만 라미는 기적을 믿지 않았다. 너무 많이 기다렸고, 너무 많이 지쳐버렸다. 그가 믿는 건 머릿속에 있는 기억뿐이었다. “아빠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내 머릿속에 있어. 걱정하지 마.” 라미는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의 시선은 라미가 일어선 후에도 그가 앉았던 의자를 향해 있었다. 아버지는 라미가 사온 꽃다발처럼, 꽃병에 얌전히 꽂힌 채 그렇게 시들어갔다. 라미는 자신이 병실을 나간 후에도, 혹은 다음 주에 다시 방문할 때까지도 아버지의 시선이 거기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라미는 일주일에 한번만 그 시선 앞에 앉았다. 라미는 쓰러지기 전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라미 앞에서 훈계를 늘어놓곤 했다. 새벽 두 시쯤. 말 그대로 가끔씩만 있는 일이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훌륭한 보험설계사가 되기 위해서 중요한 건 말이다, 인간과의 소통에 얼마나 능통한가, 한 마디로 진정성과 열정이야. 보험설계사라면 전부 다 자기의 인간적인 면을 어필한다고. 그리고 그 인간적인 면을 위해서는 비인간적인 면이 필요한 거야. 알겠어?” 아버지가 말하는 비인간적인 면은 메모리 확장 시술을 말했다. 새로 나온 보험 상품의 우수성을 달달 외우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고객의 생활과 건강, 경제 패턴들은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사소한 정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중요했다. 보험회사는 고객의 모든 정보를 저장해서 빅데이터 분석을 했다. 그 분석을 토대로 고객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를 경고했다. 고객이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보험금은 차감되거나, 지급이 어려워지는 식이었다. 보험 회사의 목적은 애초에 보험금 지급을 피하는 것이었고, 고객들은 미래에 닥칠 위험을 감지하고 관리되는 삶 속에 자신을 놓아둔다는 데서 안정감을 느꼈다. 그렇게 고객과 보험회사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다. 회사는 설계사를 통해 고객에게 부지런히 경고 메시지를 보내며 잔소리를 해댔다. 말 그대로 ‘인생설계사(Life Planner)’가 된 것이다. 보험 판매는 기본이었고 판매 이후의 관리가 핵심이었다. 예측 수준도 높은 편이었다. 이미 의료부문에서는 의사보다 보험회사의 빅데이터 시스템이 더 우수한 초기 진단 결과를 보여줬다. 물론 점차 점쟁이가 되어가는 경향이 강해지긴 했다. 예를 들어, 드라마 시청 패턴을 통해 파킨슨병 발병 확률을 진단하는 식이었다. 그 둘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알지도 못했다) 그걸 알아내는 건 보험회사가 할 일이 아니었다. 고객들은 기꺼이 자신의 개인정보를 보험설계사에게 맡겼다. 문제는 정보를 ‘어떻게 얻어낼 것이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모두 기억할 것이냐’였다. 그것은 거의 과잉기억증후군 수준의 능력을 요구했다. 그리고 업계 종사자들에게는 증후군도 아쉬울 판이었다. 두뇌기능을 확장하는 시술은 산업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그중에서 보험설계사들은 극단적으로 기억 용량에 치우친 시술을 받았다. 보조기억장치를 두뇌에 심어서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용량의 저장 공간을 얻었던 것이다. 시술 비용은 전적으로 보험설계사들이 부담했다. 회사는 절대 손해를 보는 법이 없었다. 보험설계사가 퇴사를 원한다면 고객 정보를 내놓고 회사를 나가야 했다. 그것은 회사의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보험설계사는 보험회사의 살아있는 저장장치에 불과했다. 라미의 아버지가 쓰러진 건 이 시술 때문이었다. 초기 시술은 안정성에 문제가 있었다. 물론 그가 지나친 일벌레인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보험회사에서 보험설계사들의 기억에 보험을 들기 시작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시술자들이 부작용을 겪는 건 아니었다. 사후에 자신의 메모리를 유품처럼 남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은 사라지더라도 자신의 기억은 남길 수 있었다. 물론 아버지가 남긴 메모리는 텅 비어 있을 테지만. 라미를 항상 괴롭히는 공포도 그것이었다. 머리가 텅 비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래서 라미는 어떤 어른이 되었는가. 그는 보험설계사가 되었다. 물론 라미가 가업을 잇겠다는 사명감을 가졌던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그의 머릿속에 방치될 방대한 고객 정보들이 아까웠을 뿐이다. (라미에게 먹고 살만한 별다른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수집된 고객 정보들은 누군가에게 팔수도 없었다. 단지 법적인 가족 관계에 한해 상속 받을 수만 있었다. 라미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시술을 받았다. 고객 정보는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엉클어지기 직전에 무사히 라미의 머리로 옮겨졌다. “라미씨, 너무 혼자서 다 해먹는 거 아니야?” “난 라미씨 따라잡을 생각은 애당초 포기했어. 어떤 보험설계사가 그 정도의 정보량을 따라잡을 수 있겠어?” 동료들 사이에서 라미는 언제나 부러운 존재였다. 물려받은 고객들의 정보 때문에 라미는 안정적으로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고객들은 ‘대를 이은 보험설계사’라는 스토리텔링을 좋아했다. 그걸 무슨 3대째 내려오는 냉면집 육수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라미의 보험 계약 유지율은 90퍼센트에 육박했다. 기존고객들을 유지시키기만 해도 보험료의 수수료를 수익으로 얻을 수 있었다. 고객 정보의 수집은 보험 계약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가입 기간이 오래될수록 축적된 데이터가 많아졌고, 그럴수록 보험의 질이 올라갔다. 자연히 보험시장은 고객의 충성도가 높은 시장이 되었다. 고객과 보험설계사의 관계는 오래될수록 내밀해졌다. 개인정보를 다루는 일이다보니 당연한 결과였다. 설계사들의 네트워크 사용은 극도로 제한됐고, 다른 저장 장치를 이용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보험설계사는 고객의 전용 상담사가 되어 그들을 독점 관리했다. ‘전용’과 ‘독점’은 중상류층 고객들이 선호하는 서비스 방식이었다. 반면 간편함을 포기하면서까지 기피하는 ‘인공지능’같은 단어도 있었다. ‘인간은 같은 인간이 응대해주는 쪽을 더 선호한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보험회사는 그렇게 주장했다. 그것은 회사가 설계사들에게 용량 업그레이드 비용을 떠넘기는 표면적 이유기도 했다. 하지만 노인 고객들은 하나 둘 죽음을 맞았고, 영업비용과 고객 정보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라미는 바닥부터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 동료들에 비하면 분명 유리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버지의 바람대로 상류층에 들어설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게다가 영업은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열정과 진심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집세를 내지 못하거나 전기가 끊기면 없던 열정과 진심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라미는 곧 다가올 빈곤을 떠올리며 아침마다 그것들을 끌어올렸다. “미래는 저에게 맡기고 맘 편히 지내세요.” 라미가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고객들에게 평안을 선사하는 일이었다. 그는 과거와 미래, 병과 죽음을 주관하는 신(神)처럼 굴었다. 고객들은 그의 방대한 기억을 신뢰했다. 신이 내려주는 신탁(神託), 보험설계사가 고객에게 주는 조언은 그 정도의 무게감을 지녔다. 고객들은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라미를 고용했고, 라미는 마치 그런 사고를 막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과거를 모두 알고 있으면 미래가 보인다는 듯이. 물론 그는 모든 것을 알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척 할뿐. 그럼에도 미래를 보장해야 했다. ‘인간은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보다는 양자택일의 선명한 선택지를 좋아한다.’ 이것도 회사의 주장 중 하나였다. 하루 종일 고객들을 만나고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오면, 라미는 우선 그날의 기억을 정리했다. 기억처리장치는 오늘 하루 라미가 기울인 집중도에 따라 기억들의 우선순위를 매기고, 큰 범주로 나눠 라미에게 보여줬다. 라미는 빠르게 그것을 검토하고 빠진 기억이 있으면 리스트를 뒤져 꼼꼼히 채워 넣고, 그 밖의 불필요한 기억들은 지워버렸다. 시술 이후의 기억은 무조건 인공 저장 장치에 남겨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의 두뇌에는 시술 이전의 기억만이 남아있었다. 기억하는 방식을 이전으로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했다. 고객과 얽힌 기억은 마치 당시로 돌아간 것처럼 생생하게 불러올 수 있었다. 고객들의 정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은 대략적이고 희미했다. 용량을 절약하기 위한 시스템의 조치였다. 물론 기억과 함께 감정까지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것이 인공적인 저장이 가진 한계였다. 그래서 시술 이후의 기억은 생생함을 얻는 대신 묘한 불쾌감을 남겼다. 그것은 분명히 내 기억이지만, 나 아닌 누군가의 기억 같기도 했다. 업그레이드 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라미의 용량은 벌써 한계치를 앞두고 있었다. 당분간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테지만 조만간 목돈이 들어갈 것이다. 좀 더 큰 용량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했다. 언제까지 이 업그레이드 경쟁을 벌여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고객들의 정보는 우주처럼 팽창하고 있었다. 그 우주 속에서, 라미는 자신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 보곤 했다. 아마 소행성 정도가 아닐까. 라미는 자신의 직업이 남의 기억을 대신 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객이 많아질수록 개인의 삶은 사라졌고, 친구는커녕 일주일에 아버지 한 명을 만나는 것만으로 용량이 부족했다. 가끔씩 보던 어머니와의 만남은 최근 들어 더욱 뜸해졌다. 보험설계사라면 누구나 그랬다. 라미는 삭제 버튼을 선택했다. 삑 하는 전자음과 함께 무거웠던 머리가 조금은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상실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었다. 때로 위로가 되기도 했다. 매일 같은 피로감 속에서도 깊이 잠들 수 있는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라미는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도 기억을 지우고 위로를 얻었다. 심지어 아버지도 그럴지 모른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천장을 보고 누운 라미는 잠시 자기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고객들에게는 모든 걸 아는 사람처럼 굴었지만 정작 자기 미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몇 가지 경우의 수가 있었지만, 거기에 최소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미래는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걸 원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일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까지도, 라미는 아무것도 몰랐다. *** 고마음은 이혼 전문 법률상담사로, 라미보다는 두 살 연상이었다. 그녀의 직업도 인공지능보다 인간에게 더 적합하다고 알려진 일이었고, 벌써 5년 차였지만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아 힘들었다. 기분이 더러울 때가 많았다. 마음은 숱하게 봐왔다. 구역질나는 케이스들. 어제까지는 분명히 부부였거나 평생을 약속했지만, 다음 날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배신하는 인간들. 배신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상대를 파멸시키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 인간 몰래 따로 현금을 마련하고 있어요. 현금은 추적이 안 되잖아요.” “이혼 하자는 말을 끌어내는 방법 같은 게 있나요? 녹취는 항상 하고 있는데.” 그녀는 운명적인 사랑을 믿지 않았다. 운명적인 사랑은커녕 운명도 사랑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혐오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깊이 신뢰하고 사랑할수록 상처만 커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사랑에 대한 욕망을 억눌러야 했다. 그녀도 동화에 나올 법한 헌신적인 사랑을 꿈꿨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동화 같지가 않았다. 마음에게 사랑은 독이 든 성배였다. 차라리 외로움이 배신보다 나았다. 외로움은 혼자 감내하면 되는 안전한 감정이었다. 사랑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좀 더 뻔뻔한 것이었다. 어떤 것도 보장해주지 않은 채 모든 걸 요구한다는 면에서 그랬다. 그녀는 사랑을 하느니 노후를 위해 종신보험을 하나 들어놓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보험은 돈이 남지 않는가. 보험회사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 정도의 믿음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분노가 치솟았다. 마음은 자신이 상대하는 고객들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그 정도의 보장도 못하면서 무슨 사랑이야. 아니, 그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인가?’ 마음도 두뇌 시술을 받았지만 용량을 늘리기 위한 시술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빠른 업무 처리와 네트워크 활용을 위한 시술이었다. 물론 마음이 받은 시술도 시술 이후에 자연스러운 기억을 포기해야 했다.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될 모양으로 기억이 다듬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인간의 기억은 모호하고 복잡한 형태를 띠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기억 용량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었다. 보험설계사들처럼 폐쇄적인 메모리를 사용하는 건 드문 경우에 속했다. 자유롭게 자신의 기억을 공유하고, 클라우드 서버에 올리는 쪽이 더 보편적이었다. 그녀는 일터에서 겪은 일들을 빨리 잊고 싶어서 항상 깨끗한 메모리 상태를 유지했다. 마치 먹기 싫은 반찬을 억지로 머금고 있다가 이내 뱉어버리는 아이처럼, 집에 들어오는 즉시 기억을 비워냈다. 대신에 기억들을 글로 옮겨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올렸다. 실명을 지우고, 직업을 적당히 바꿔주면, 누가 누구여도 상관없는 자극적인 이혼 사례 하나가 만들어졌다. 마음은 매일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혹은 픽션을 능가하는 사례들을 정리해서 올렸고, 사람들 사이에서 블로그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나중에는 마음이 살짝 걱정을 해야 할 정도였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 신원을 알 수 없도록 정보를 왜곡했다. 그렇게 한참 기억을 주무르고 있으면, 마음은 마치 그 기억이 자신의 기억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속이 편해졌다. 한 사람의 기억은 왜곡되고, 편집되고, 텍스트화 되어 불특정 다수에게 공유되었다. 어쩌면 마음은 자신의 괴로움을 희석시켜 모두에게 나눠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고통은 공유될수록 가벼워졌다. 사람들은 괴로워하기는커녕 즐거워했다. ‘그래. 보험을 들자. 혼자 사는 게 안전해.’ 천장을 보고 누운 마음은 다시 보험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보험을 들려고 하니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졌다. 그녀는 만약 사랑을 하게 된다면 어떤 사람과 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드라마 속 완벽한 주인공이라면 좋겠지만, 현실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딱 한 명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마음은 라미를 떠올렸다. 물론 그의 이름이 라미라는 건 몰랐다. 그저 그의 얼굴과, 그가 어느 금요일 저녁 꽃을 들고 지하철을 탔던 사실만 기억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억을 탐색했다. 그녀가 떠올린 기억은 지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한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퇴근길 지하철에 타고 있던 마음은 멀찌감치 떨어져 라미가 든 꽃다발을 보고 있었다. 누구를 위한 꽃일까? 그 정도 궁금함이 전부였다. 그때, 시각 장애를 가진 걸인이 옆 칸에서 넘어오는 게 보였다. 걸인이 허리춤에 찬 스피커에서는 우렁찬 찬송가 연주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열차에서 내리려고 준비 중이던 라미는 걸인이 들고 있던 바구니에 지폐 한 장을 넣고는 황급히 열차에서 내렸다. 라미가 이미 내린 것도 모른 채 걸인이 정중히 말했다. “고맙습니다. 꽃향기가 참 좋네요.” 그때였다. 마음은 문이 닫히기 직전, 망설이던 라미가 꽃다발에서 꽃 한 송이를 빼내 맹인의 돈 바구니에 던지는 것을 보았다. 라미가 걸인의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마음은 그걸 보고 꽃다발이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마음은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갑자기 그 남자가 떠오른 걸까. 딱 한 번 봤을 뿐인데. 이름도 모르는 그런 남자를. 마음은 생각을 떨쳐내려 했지만 한번 떠올린 생각은 사라지기는커녕 커지기만 했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마음은 라미에 대한 기억을 지우지 않았다. 라미는 마음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매주 목요일 점심시간마다 그녀를 보았다. 고객을 제외한 타인의 정보는 장기 저장되지 않는 까닭에, 마음의 모습은 그저 몇 시간 정도, 흐릿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사라질 뿐이었다. 그것이 보험설계사가 가진 비극이었다. 때문에 라미는 마음이 미어져라 음식을 입에 밀어 넣는 모습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매주 목요일마다 그 모습을 보고 똑같이 감탄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식을 씹을 때의 그 압축된 입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음식을 씹었다. 입 안 전체를 통해 맛을 느끼는 것 같았다.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눈썹이 팔(八)자가 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라미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꼈고, 그날 식사는 더 맛있게 할 수 있었다. 그날도 라미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또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며 감탄하던 라미는 그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녀가 내 고객이 된다면 기억할 수 있을 텐데. 라미는 생각했다. 잠시 동안 그녀가 먹는 모습을 훔쳐본 라미는 곧 자기 식사에 집중했다. 마음이 라미를 알아본 것은 두 사람 모두 식사를 마쳤을 즈음이었다. 그녀는 그를 본 순간 이것이 운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도 없는 기회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았다. 라미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설 때를 기다려 그녀는 라미의 뒤를 쫓았다. 횡단보도 앞에 선 라미는 통화 중이었다. 마음은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라미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때 라미의 통화소리가 들렸다. “고객님 정보는 제 머릿속에 저장되니까 유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보험 정보는 모두 그런 식으로 관리되거든요.” 그는 보험설계사였다. 마음은 그 역시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조심스럽게 시험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보험은 꼭 필요해. 노후를 위해 종신보험을 들어야 해. 그러는 김에 이 사람을 더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보험을 들고 싶은데요.” 보험은 낯선 사람을 통하기 보다는 지인을 통해 가입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길거리에서, 그것도 보험설계사가 아니라 고객이 먼저 보험 가입을 제안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 당황한 것도 잠시, 라미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기억을 통해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일사천리로 계약이 맺어졌다. 그녀가 서명을 마치자 라미는 그녀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라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기적을 믿지 않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라미의 머릿속으로 마음에 관한 정보가 해일처럼 밀려들어왔다. 그는 오랜만에 용량 걱정도 잊고 온몸으로 그 해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환희는 오래가지 않았다. “부디 계약을 해지해 주십시오.” 한 달 만에 라미가 마음에게 한 요구였다. 그녀에 대해 알게 될 수록 라미는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졌다. 그것은 마음도 마찬가지였지만 고객을 관리하는 보험설계사 입장에서는 훨씬 곤란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라미의 말은 솔직한 고백과도 같았다. 좋아합니다. 그러니 부디 계약을 해지해 주십시오. 도무지 고객으로서 냉정하게 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솔직한 말에 마음의 마음은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기쁘기도 했지만 겁이 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라미의 고백은 승부수가 되었다. 졸지에 마음에게 결단을 요구하게 된 셈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은 한 달 남짓 그를 봐오며 보험설계사로서는 그를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인으로서는 확신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 더 시험해 보고 싶었다. “보장할 수 있어요?” “네? 뭘요?” “저를 좋아하는 그 마음, 보장할 수 있느냐고요.” 라미는 잠시 동안 멍해져 있다가 급하게 대답했다. “무, 물론입니다!” 대답하기까지 약간의 공백이 마음에 걸렸지만 마음은 한걸음 더 내딛어 보기로 결심했다. “그럼 우리, 한 번 만나 봐요.” “만나… 요?” “네. 우리… 정식으로 만나보자고요.”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는 라미에게 마음은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앞으로 주기적으로 만나되, 만남의 기억을 매번 지우자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보아온 숱한 사례들 때문에 라미의 마음을 완전히 받아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라미를 포기하기도 싫었다. 첫 만남을 가진 이후로 그녀는 매일 밤 천장을 보고 누울 때마다 방법을 강구했다. 그래서 결국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빨리 그 방법을 시험해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 방법대로만 하면 언제나 두 사람은 시작하는 연인이 될 수 있었다. 모든 만남이 첫 데이트일 테니 말이다. 추한 꼴을 보일 필요도 없고, 상처 입힐 일도 없다. 언제나 첫 데이트의 설렘만 있을 것이다. “좋, 좋습니다!” 라미는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마음이 자기 마음을 받아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번 주 토요일, 오후 4시에 근처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 기억만큼은 지속될 것이다. 매번 첫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마음은 가상 디스플레이까지 띄워 서로가 보는 앞에서 시스템 설정을 하게 했다. 시스템은 앞으로 날짜에 대한 모순 없이 두 사람을 속여 줄 것이다. 마음은 웃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라미는 그 모습을 몇 번이고 되뇌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 두 사람의 첫 데이트는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라미 입장에서는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일단 그가 꼼꼼하게 준비해 온 데이트 일정 자체가 엉망이었다. 그녀는 유원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폭력적인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프랜차이즈 식당을 좋아하지 않았다. 걷는 건 좋아했지만 오르막길을 싫어했다. 그렇게 많은 고객정보를 가졌어도 그녀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라미에게는 마음에 대한 그런 사실 하나하나가 중요한 정보였다. “그, 저, 저녁 식사는 제가 알아보니까……” “저 평소에 가보고 싶던 식당이 있어요. 거기 가보지 않을래요?” 마음은 라미와는 달리 순간순간을 있는 그대로 즐기고 있었다. 라미가 어떤 실수를 하건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모든 기대치를 내려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딱 하루만큼의 깊이밖에 없었다. 낭떠러지 같은 관계만 보아오던 마음은 그만큼의 높이에 안도했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빠르게 흘렀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 마음은 라미에게 약속을 꼭 지키라고 당부했다. 라미는 꼭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라미는 도무지 첫 데이트의 기억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중요한 일부만 남겨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기억이 없었다. 이건 안 돼. 이것도 안 돼. 결국 지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을 지울 수도, 남겨 둘 수도 없는 상황에 라미는 괴로웠다. 라미는 일단 다음 데이트까지만 기억을 지우지 않기로 자신과 타협했다. 일주일은 금새 지나갔고, 진짜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 번째 ‘첫 데이트’가 있기 전날, 라미는 언제나처럼 아버지를 찾아갔다. 내일이면 기억을 지워야 한다는 생각이 라미를 짓누르고 있었다. 라미는 첫 데이트의 기억을 끄집어 내 되짚어 보았다.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던 그는 무심코 아버지에게 데이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을 만났어. 많이 만난 건 아니지만…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버지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라미는 자기 말에 빠져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아버지에게 데이트의 모든 디테일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처음 보는 식당으로 날 끌고 가는 거야. 내가 얼마나 당황했겠어! 그때부터 모든 계획이 어그러져버렸어. 정말 예측할 수가 없는 사람이야. 그렇지 않아?”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행복한 감정에 푹 빠진 라미는 면회 시간이 다 된 줄도 몰랐다. 그는 그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아버지를 보았다. 그 순간 아버지와 눈을 마주친 라미는 갑자기 숨이 막혀오는 걸 느꼈다. 아버지의 검은 두 눈 속에서 그만 자신의 미래를 보고만 것이다. 라미의 머릿속에서 아버지와 자신의 무능한 모습이 겹쳐졌다. 이대로라면 나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 것이다. 본능적인 공포가 라미를 감쌌다. 그는 모든 것을 감수하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아빠. 난 절대, 절대 아빠처럼 되지 않을 거야.” 라미는 다음 날이 되었어도 첫 데이트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다. 마음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그의 고객이기도 했다. 고객의 정보를 함부로 지울 수는 없다. 그는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렇다고 죄책감까지 사라지진 않았지만. 남겨진 기억들 때문에 라미는 마음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갔고, 계속해서 그 기억들을 보관했다. 계속된 ‘첫 데이트’는 점점 매끄러워졌다. 경험치가 쌓이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는 걸 라미는 실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알아간다는 사실 자체에 감동했다. 라미는 마음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식이라면 언젠가는 정말 완벽하게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녁 식사는 마음씨가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는 맛집 없어요? 평소에 가보고 싶었다든지.” 완벽에 가까워진 데이트에도 불구하고 라미의 괴로움은 오히려 커졌다. 이 완벽한 데이트를 그녀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루 이상의 기억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루에서 이틀로, 이틀에서 사흘로, 그리고 일평생까지. 사랑에 빠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라미는 매 데이트마다 마음을 조금씩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 다음 주까지 기억을 지우지 않는 건 어때요? 아니면 내일까지 만이라도.” “왜요?” “그, 그냥요. 너무 아쉽잖아요. 오늘이 오늘뿐이라는 게.” “그러니까 지금에 더 집중하세요. 내일이나 다음 주까지 걱정할 시간이 없어요.” 불안했는지 그녀는 헤어지기 전에 라미에게 진지하게 당부했다. 기억을 지우자는 약속을 꼭 지켜달라고. 라미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기억을 지우기는커녕 기억에 집착했다. 그는 모든 건 자신이 마음의 신뢰를 얻어내기만 하면 해결될 일이라고 여겼다. 상대에게 미래를 보장하고 안도감을 주는 것이 라미의 직업이지 않은가. 그는 설득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모든 기억이 자신의 손에 있었고, 운명은 그의 조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미는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를 찾아가 데이트 이야기를 했고, 그건 그에게 묘한 위로와 독려가 되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나는 잘 하고 있다. 아버지가 듣지 못한다는 건 알았지만, 라미는 열과 성을 다해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언젠가 꼭 마음의 마음을 얻어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와 기억을 공유하게 되었다고. 아버지와는 다르게 난 내 사람을 지켜냈다고. 한편 마음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녀 또한 라미에게 설득 당하고 있었다. 마음은 라미가 그동안 자신이 꿈꿔온 바로 그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그런 사람 말이다. 라미의 눈에 그녀의 경계심이 점점 사라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가까스로 자신의 성급함을 경계했다. 라미가 계속해서 기억을 남기자고 제안할 때마다 마음은 언제나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우리는 그저 하루 만난 사이잖아요.” 라미는 속이 탔다. 내가 열심히 한다면, 조금만 더 열심히 한다면 두 번째 데이트에 도달할 수 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두 번째 데이트를 위해 잊지 말아야 할 메모리가 계속 쌓였다. 그렇게 지우지 않은 데이트 메모리들은 라미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임박하고 있었다. 버티고 버티던 그는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고객들의 정보를 조금씩 지워나갔다. 위기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암이라고요, 암! 어떻게 암인 걸 모를 수가 있어요?” 50대 남자 고객이 위암 선고를 받았다. 1기도 아니고 3기였다. 완쾌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예측은커녕 어떤 사전 경고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 고객은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라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암에 걸린 건 일일 드라마를 보다 잠드는 버릇 때문일까, 아니면 아침에 잠자리 정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인공지능 시스템은 분석하기에 정보가 모자라다는 메시지만 반복해서 보여줬다. 보기 좋게 고객 한 명을 잃었다. 기억 용량을 늘려도 모자를 판에 줄여나가니, 고객 관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수십 건의 약속이 깨어졌고, 수십 통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간신히 성사된 미팅이더라도 제대로 된 상담을 할 수 없었다. 라미는 기억하는 것이 많지 않았다. 계약 해지가 줄을 이었다.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한 계약 유지율 60퍼센트가 무너졌다. 고객들은 라미가 제대로 된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며 불평했다. “모라미씨, 요즘 뭐하는 거야? 57퍼센트가 무슨 말이냐고, 57퍼센트가. 메모리가 아깝지도 않아?” 회사에서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라미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일과 후에 잔업 하는 시간을 늘렸다. 다른 저장장치에 기억을 옮기는 건 금지됐기 때문에 라미는 남몰래 텍스트화 한 고객 정보를 출력하기 시작했다. 광대한 정보들은 종이 위에서 하나같이 축약되었고 겨우 알아볼 법한 암호가 되었다. 하지만 새카맣게 고객의 정보를 옮겨 놓는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필요할 때 불러올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의 공간은 턱없이 부족했고 그것을 활용하는 일은 더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도 라미는 미련하게 버티며 마음의 기억을 지켰다. 그는 어쩌면 마음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상황을 예감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기억하지 못하는 보험설계사는 무용한 존재일 뿐이었다. 신(神)이었던 그는 한낱 무지렁이가 됐다. 라미는 자신이 보험회사에 연결된 살아있는 메모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선배님, 메모리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긴 거 아닙니까?” “맞아, 늦기 전에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 가족력일 수도 있다던데….” 라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상태가 그렇게 나빠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때의 일이었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마주한 아버지가 라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가 가족 중 겨우 이름을 불렀던 존재는 집에서 키우던 개 몽실이였다. 그것도 목에 걸린 이름표 때문에 겨우 아는 척 한 거였는데, 문제는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통에 몽실이는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는 이혼을 선언했다. 그녀는 보험설계사와 고객만도 못한 관계를 잊기 위해 기억 제거 수술까지 받았다. 재혼한 어머니는 이제 라미가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 정도만 기억했다. 라미는 그녀가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라미는 생각했다. 나는 행복한가. 앞으로 마음과 함께한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을 잃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무능한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없다. 그건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 감당해내지 못하면 끝이다. 아버지는 실패했지만, 나는 아니다. 라미는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를 찾아가던 발걸음이 끊긴지는 오래였다. 산처럼 쌓인 종이 뭉텅이에 치이던 라미는 사무실에서 먹고 자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가 처음으로 마음과의 약속을 깜빡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라미에게는 수많은 데이트 중 한 번이었지만, 마음 입장에서는 ‘첫 데이트’에 바람을 맞은 것이다. 며칠 밤을 새며 자료 정리를 하던 라미는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곯아떨어졌다. 마음에게서 몇 번의 전화와 문자가 와 있는 걸 발견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그제야 그 날이 토요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라미는 마지막 문자를 확인했다. 불과 몇 분 전에 보낸 것이었다. 〈기억은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나봐요.〉 라미는 다급히 마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꺼져있었다. 라미는 모든 일을 뒤로 하고 마음의 집으로 달려갔다. 미친 듯이 초인종을 눌렀고, 한 뼘만큼만 열린 문틈으로 마음이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세요?” 라미를 보는 마음의 눈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라미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기억을 지웠다. “누구시냐고요.” 라미는 생각했다. 마음에게 나는 누구일까. 누구여야 하는가. “보험설계사입니다.” 라미는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속였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더 큰 문제는 마음 자신이 보험을 들었었다는 사실마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점이 라미를 더욱 미심쩍은 존재로 만들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일은 일어난 적 없었던 일과 마찬가지였다. “근데, 요즘 보험설계사들은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 집으로 찾아오고 그런가요?” 마음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나타냈고, 보험회사 측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차갑게 문이 닫혔다. 라미는 알았다. 마음은 공격적으로 쏘아붙였지만 사실은 공포에 질려있다는 사실을. 마음에게 라미는 그저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 횡설수설하는 낯선 남자에 불과했다. 계약서에 의하면 계약 해지 신청 후 확정일까지 3일간의 유예가 주어졌다. 3일만 지나면 마음이란 사람과 있었던 모든 기억이 사라질 것이다. 그녀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대로 기억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 생각 하나에 정신이 팔린 라미는 계속해서 마음에게 연락을 했다. 몇 번이고 사정에 가까운 사과를 하며 계약 연장을 부탁했다. 라미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며, 어떤 사람보다 신뢰할 수 있는 보험설계사이고, 그것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라미는 무섭고 믿을 수 없는 이상한 남자가 됐다. 그렇게 하루가 갔다. 마음은 라미의 전화번호를 수신 거부해 버렸다. 그러고 나자 라미는 말을 잃었다. 그저 집에 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그의 두 눈은 깊고 어두운 구멍처럼 보였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얼굴이 왜 그래?” 마지막 셋 째날, 집으로 어머니가 찾아왔다. 한동안 방문하지 않은 아버지의 요양원 때문이었다. 요양원은 라미에게 연락이 닿지 않자 어머니에게까지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많은 걸 캐묻지는 않았다. 본인이 사온 도넛상자를 내려놓더니, 그중 하나를 집어 손으로 조금씩 뜯어먹기 시작했다. 벌어진 입으로 내용물이 보였고, 씹는 것도 건성이었다. 그걸 본 라미는 어딘지 모르게 답답함을 느꼈다. 그 사람이었다면 한 입에 넣고 열성적으로 우물거렸을 텐데. 라미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뭘 그렇게 봐? 엄마 먹는 거 처음 봐?” 어머니의 말에 라미는 애써 미소 지으며 얼버무렸다. “아니, 보기 좋아서.” 어머니는 새삼스럽다는 반응이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처음 자신에게 반한 이유였다고 했다. 여성스럽게 먹는 모습이 우아해 보였다나. 라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아들의 생각도 모르고 어머니는 아들 얼굴을 처음 보는 것처럼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넌 어째 나이가 들수록 니네 아빠랑 똑같아지니?” 라미는 뭔가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아빠 기억 다 지운 거 아니었어?” “연애할 때 기억은 남아있어. 그때만 해도 괜찮은 사람이었거든. 요즘도 종종 기억을 돌려보곤 해. 그땐 좋았지.” 라미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것도 좋은 모습만. 라미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떻게 좋은 기억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과 재혼할 수가 있었느냐고. “내가 니네 아빠랑 어떻게 헤어졌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서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근데 그때 했던 다짐 하나는 머릿속에 남아있더라. 슈퍼맨인 척 하는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자기 혼자서 다 짊어지려는 사람은 결국 그렇게 되는 거야. 지금 엄마 남편이 네 아빠만큼 잘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 그리고 나한테 얼마나 충실한지도.” 라미의 어머니는 절반밖에 먹지 않은 도넛을 내려놓았다. 남편과의 저녁 약속 때문에 오래있을 수 없다고 했다. 배웅 나온 라미에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꼭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라미는 끝내 어머니에게 고민을 털어놓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어머니의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라미는 자신이 아버지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라미는 항상 부모님의 이혼이 아버지의 무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아버지가 모든 숙제를 혼자 감당하려 했던 것이었다. 라미는 아버지를 보러 요양원으로 갔다. 늦은 저녁이었고, 아버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라미는 아버지 앞에 앉았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라미는 마음과의 기억을 다시 불러와 처음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라미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자신이 슈퍼맨이 아니라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것이 그가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이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은 그저 잊는 존재였다. 라미는 생각했다. 신(神)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그는 분명 완벽한 보험설계사일 거라고. 그리고 보험설계사라면 조언을 해줄 수 있을 터였다. 아버지를 앞에 두고 라미는 어느새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기도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라미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기도가 저절로 완성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그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고개를 숙였다. 제발 기적을 보여주십시오. 제발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마음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 라미가 첫 데이트를 잊은 그 날, 차갑게 문을 닫은 마음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현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문밖에 아직도 라미가 서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입을 틀어막고 숨죽여 울었다. 기억을 지우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라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데이트 약속, 그리고 첫 데이트를 바람 맞기까지의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렇게도 피하고자 했던 사랑의 상처가 그녀를 엄습했다.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라미가 미웠다. 더 큰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만큼 아직도 그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보험을 해지해 버렸다.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잔인한 복수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녀의 복수는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지우지 않은 라미에 대한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던 것이다. 언제까지 이 기억을 안고 살 수는 없었다. 며칠 동안 기억을 되새기던 마음은 점차 자신이 실수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가 너무 지나쳤던 것일까. 한 번의 실수도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아니야, 애초에 그런 사람과는 관계를 맺어선 안 돼. 하지만, 정말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으면 어쩌지? 계속해서 확신을 얻을 수 없었던 마음은 시험 삼아 자신의 사례를 블로그에 정리해 올렸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드백이 올라왔다. 대부분은 남자를 탓하는 댓글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걸 아쉬워했다. 마음은 역시 자신이 옳았다고, 역시 잘한 일이라고 안도했다. 이제 기억을 지워도 되겠어. 하지만 그렇지 않은 댓글들도 있었다. 〈그렇게 남자가 마음을 증명해주기를 바랐으면서, 그 여자는 왜 자기 마음을 증명하지는 않았을까요?〉 마음은 겨우 얻어낸 확신을 다시 잃어버렸다. 그렇게 많은 댓글들이 그녀의 선택이 옳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가 기억을 지우자고 제안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책임을 지지 말자는 선언이었다. 그녀는 상처받을까봐 서로를 책임지는 게 무서웠다. 하지만 책임을 지지 않으면 사랑은 성립할 수 없었다. 마음은 자신이 책임질 기회조차 잃어버린 게 아닐까 겁이 났다. 그것은 자신이 상처를 받을 자격도 없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결론이 날 수 없었다. 그녀는 라미를 만나서 그의 기억을 확인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기억에는 그의 마음도 기록돼있을 것이다.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되어줄 터였다. 그녀는 보험 해지 취소를 신청했다. 하지만 기한이 지나 해지 처리가 완료되었고, 기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친절한 상담사가 말했다. “기억은 모두 폐기되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른 보험설계사를 연결해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마음은 전화를 끊었다. 이미 모든 게 끝났다. 그녀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모든 게 끝나버렸다. 끝. 마음은 화가 났다. 도대체 뭐가 끝났다는 것일까. 그녀의 고통은 그대로였다. 라미가 이대로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됐다. 그 혼자 망각의 위로를 누린다는 건 파렴치했다. 그를 찾아가야했다. 마음은 라미를 처음 봤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그때 꽃다발을 들고 어디를 가고 있었을까. 금요일의 바로 그 시간대에 맞춰 마음은 라미가 내렸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마음이 문득 자기 모습을 돌아보았을 때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한참동안 승강장을 뛰어다니고 난 뒤였다. 거기 라미는 없었다. 하지만 마음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라미로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라미를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녀의 분노는 사랑의 동의어였다. 그녀는 자신이 운명 비슷한 것을 믿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라미를 우연히라도 만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이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운명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제는 알았다. 그것이 허황된 개념임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부여잡게 됐다.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사랑을 끝내는 것뿐이었다. 마음은 이제 진짜로 끝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 이 승강장 벤치에서 일어나 집으로 가자. 그래도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또 다른 열차가 도착했지만 마음은 그것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라미를 놓칠 뻔했다. 라미는 그동안의 기다림을 만회라도 하듯, 마음을 마주보고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방향을 바꿔 승강장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마음은 침착 하려고 애썼다.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라미의 얼굴을 보자 마음은 다시 분노가(혹은 사랑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그녀는 라미의 뒤를 쫓았다. *** 라미는 아버지 앞에 앉아 있었다. 쉴 새 없이 떠드는 소리가 병실 밖으로 흘러나왔다. 마음은 살짝 열린 병실 문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떠들고 있는 사람은 라미가 아니라 라미의 아버지였다. “내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어. 맞아…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지금 거짓말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일이 일어난 적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라미의 아버지는 온전한 정신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의식이 있었고, 횡설수설할 때가 많았지만 끊이지 않고 떠들어 댔다. 물론 라미와 자신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자신의 과거 연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의 표정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꽤나 상세하게 자신의 경험을 기억해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어. 그 사람 먹는 모습에 반했다고 하면 믿겨져? 나도 참 놀라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가만히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미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저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더라…. 물론 어머니에 대한 묘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분명히 익숙한 다른 상황이 있었다. 그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편 마음은 또다른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라미의 아버지가 떠올리는 기억들은 지나치게 현대적인 배경이었고, 라미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자에 대한 묘사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보험을 들고 싶은데요. 그녀가 그랬어. 정말 희한한 일이지만 사실이야. 길거리에서 고객이 먼저 보험이 들고 싶다고 했다고! 정말 예측할 수가 없는 사람이야. 그렇지 않아?” 마음은 미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우연을 가장했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건 그녀가 만들어낸 우연이었어. 왜 그걸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을까……. 그래도 그녀가 나에게 보험을 들고 싶다고 얘기했을 때, 그건 분명히 작업 멘트였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마음은 그제야 깨달았다. 라미의 아버지가 회상하는 기억은 분명 라미와 마음의 기억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은 그렇게 확신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고, 결국 마음은 자기에게 없는 기억까지 듣게 됐다. 수많은 첫 번째 데이트들. 라미는 그저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라미 혼자서 겪었던 고군분투를 깨달았다. 라미는 기억을 지운 적이 없었다. 그때 아버지의 입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말이 전해졌다. “내가 힘들다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나 혼자 바보처럼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같이 방법을 찾아봤으면 어땠을까. 나도 그 사람처럼 똑같은 사람인데. 왜 그때는 모든 걸 혼자 떠안으려고만 했을까. 그러지 않았다면 더 행복했을 텐데…….” 아버지의 기억은 그 자신의 경험과 뒤섞인 상태였다. 하지만 마음은 그 말의 일부가 라미의 고백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누구신지?” 마음을 발견한 아버지가 말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병실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라미는 뒤를 돌아 마음을 보았다. 여전히 마음을 알아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울먹이던 마음은 라미를 보며 말했다. “모라미씨.” 라미의 얼굴에 당혹감이 지나갔다.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자신이 잊어버린 고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띄며 대꾸했다. “제가 아는 분이던가요? 어디서 뵀던 것도 같은데….” “그랬죠. 제가 보험을 들고 싶다고 했거든요.” 병실 밖에서 라미를 대면한 라미는 눈에 띄게 미안해했다. 자신이 기억을 지운지 얼마 안 되서 오류가 났을 수도 있다며 말이다.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라미는 사과했다. “인간이 하는 일이라 분명히 실수가 있었을 겁니다. 피해를 끼쳐드렸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라미는 최근 계약 유지율이 32퍼센트로 곤두박질 쳤다가 다시 80퍼센트대로 복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대량의 기억이 왜 지워졌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마도 가족력이 아닐까 싶어요. 아빠도 예전에 머릿속 메모리 때문에 의식을 잃었었거든요. 병원에서는 제 머리에는 이상이 없다고 하지만….” 마음은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늘어놓은 연애담이 실은 모두 자신과 라미의 이야기라고. 라미는 처음에는 깜짝 놀라더니, 의외로 진지하게 마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라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기적이 일어난 건 얼마 전이었어요.” 라미의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든 건지 의료진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메모리 안에는 상당한 용양의 기억까지 들어있었다. 라미는 마음의 이야기를 듣고 깨달았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마음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이식한 것이다. 라미는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을 기억하지 못했고, 아버지가 늘어놓는 말들이 그저 부모님의 젊었을 적 연애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손상된 아버지의 두뇌는 이식된 기억에 대한 이질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디테일하게 순차적으로 기억하진 못했지만, 파편적으로는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기억은 더 진짜처럼 느껴졌다. 라미가 불현듯 아버지의 텅 빈 머릿속을 떠올렸을 때, 라미는 그것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지 알지 못했다. 그저 마음에 대한 기억을 차마 지울 수 없어서, 아버지의 텅 빈 메모리를 빌린 것뿐이었다. 심지어 마음의 기억을 다시는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자기 손으로 지워버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런데 그렇게 이식된 기억이 아버지를 살려냈다. 어떤 기억도 없이 자신을 잃었던 아버지는 행복하게 자신의 과거(라고 생각하는 기억)를 회상했다. 라미는 본의 아니게 아버지의 의식을 되살려 놓았다. 의사도, 보험회사도 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라미는 마음에게 다시 사과했다. 그 사과는 보험설계사로서의 사과와 달랐지만 또 같았다.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분명히 실수를 했을 것이다. 상처 준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 마음은 라미가 그렇게 쉽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놀라웠다. “그래도, 어떻게 제 이야기를 그렇게 쉽게 믿어요?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잖아요.” 마음은 아직도 불안해하고 있었다. 라미는 이윽고 묘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줬다. 어떤 이유에선지 최근에 기억이 지워진 후에, 메모리 속에 ‘절대 지우지 말 것’이라는 이름의 텍스트 파일이 남아있더라고 했다. 그의 기억에 없는 파일이었다. 그 안에는 단 하나의 단어가 들어있었다. 〈마음〉 라미는 4바이트 밖에 안 차지하는 이 단어를 자신이 왜 남겨놨을까 궁금했다. 그 파일은 지워지지 않게 잠금 설정까지 되어있었다. 그것이 마음이라는 사람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라미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건지 확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라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분명했다. 라미는 마음에게 말했다. 아마도 그 두 가지 모두를 의미했던 게 아닐까요. 마음은 과연 용량에 쪼들리는 보험설계사답다며 웃었다. 마음은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일말의 불안감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제야 마음은 자신도 실수를 했다며 라미에게 용서를 구했다. 라미는 물론 마음을 용서했다. 라미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누군가 대신해서 기억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말이다. 그 기억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의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서로의 존재를 증명할 증거. 그리고 서로의 관계를 증명할 증거. 그 후 라미와 마음은 다시 ‘첫 데이트’를 했다. 앞으로도 용량에 쫓길 거라는 사실은 여전했다. 하지만 이제 라미는 데이트의 기억을 지우지 않고 아버지에게 이식했다. 아버지는 기억이 더해질수록 호전되어 갔다. 수다가 더 많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데이트 이야기를 들려줬다. 마음은 블로그에 자신의 데이트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별 이야기를 올릴 때에 비해 방문객은 급감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주었다. 마음은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더 많은 사람이 기억해 줄수록, 그리고 그 기억에 대해 말해 줄수록 마음은 안도했다. 혼자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일들이 있는 법이니까. 그녀는 이제 라미가 기적을 믿게 된 것처럼 운명적인 사랑을 믿었다. 물론 운명과 사랑도 개별적으로 모두 믿었다. 마음이 숱하게 봐왔던 커플들은 더 이상 서로를 떠맡지 않으려는 사람들이었다. 한쪽이 먼저 그렇게 되면 나머지도 곧 지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마다 떠맡을 수 있는 용량은 달랐다. 하지만 마음은 이제 알았다. 서로 최선을 다해 지탱한다면 모자를 일도, 넘칠 일도 없을 거라고. 그녀는 이제야 자기 일에 익숙해졌다고 느꼈다. 라미는 금요일마다 아버지를 찾아갔다. 여전히 꽃다발을 들고 말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자신의 데이트 이야기를 들었다. 라미는 두 사람의(아니, 세 사람의) 기억이 거기 무사히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안도했다. 그는 자기 기억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기억 같기도 한 그 이야기들을 듣는 게 좋았다. 그건 더 이상 모노드라마도, 스탠딩 코미디도 아니었다. 출처: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id=1519&s_para1=173&Board=n9998&admin=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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