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imlee
[SF Review] 판데믹을 지나면서 기억해야 하는 것들 / 20.4 크로스로드
최종 수정일: 2020년 4월 22일
『행성감기에 걸리지 않는 법』
(2018, 이선 지음, CABINET)

판데믹의 시대를 지난다는 것
우리는 지금 판데믹(pandemic)을 지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지정하는 전염병 위험 단계 중 최고인 6단계, 세계적 유행이다. WHO가 창설되고 난 이후, 1968년과 2009년에 이어서 세 번째로 맞이하는 판데믹인 것이다. 1968년 홍콩독감 때는 전 세계적인 보건위생과 의료기술의 발달이 미비했고, 정보를 전 세계가 공유하기 어려웠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러한 문제에 대한 심각성이 각인되어 있지 않다.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A(H1N1) pdm09) 때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공포감이 조성되었지만 타미플루(Tamiflue)라는 치료제가 있었기 때문에 인류가 바이러스를 극복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만들어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가 맞이한 코로라 바이러스 감염증(COVID-19) 앞에서 인류는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마주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동안 꽤 자주 새로운 바이러스(Virus)의 등장을 경험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장 2000년대 이후로 한정해 보아도 2002년 11월에 급성 중증 호흡기 증후군, 이른바 SARS(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를 시작으로, 2009년에는 신종 인플루엔자가 세계적으로 유행이었다. 가깝게는 2012년에는 중동호흡기 증후군이라 불렸던 MERS(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가 유행해서 2015년까지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2019년, 우리는 COVID-19라는 새로운 바이러스의 등장을 경험하고 있다. 특히 이번의 COVID-19는 강력한 전염성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기록하면서 그동안 국지적이고 지엽적이라고 생각했던 바이러스와 관련된 문제들을 전 지구에 걸친 문제로 인식하게 만들고 있다.
미래를 상상하는데 익숙한 SF에서 바이러스는 그렇게 생소한 소재는 아니다. 오히려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하게 변주되어 온 일종의 클리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서양에서는 14세기에 2천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불러일으켰던 페스트(Yersinia Pestis)와 1910년대에 다시 2천 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기록했던 스페인 독감(Spanish influenza)의 기억들이 있었기 때문인지 SF 내에서 재난을 상상할 때 바이러스의 창궐은 제법 익숙하게 등장하는 소재였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한동안 생물학적인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보다는 발달하는 컴퓨터와 네트워크 시스템에 문제를 일으키는 바이러스에 대한 문제로 관심이 환기되었지만, 1970년대에 등장했던 에볼라 출혈열(Ebola hemorrhagic fever)의 등장은 생물학적 바이러스가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는 목소리들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바이러스를 제목으로 상정하는 작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것으로 생각했던 상상들은 바이러스를 비롯한 원인 미상 감염증의 유행으로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를 꾸준히 보내왔다. 물론 그것은 냉전 시대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디스토피아 담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인류가 기술적인 발전을 이룬다면 능히 해결할 수 있는 기술만능주의의 문제로 귀결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니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2006)에서 그랬던 것처럼 권력이 사회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거짓 정보로, 이른바 불안감을 조성해 그것을 이용하기 위한 소재로 사용되었던 경우들이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 내에서의 바이러스와 전염병에 대한 인상들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한 번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과연 한국의 SF에서는 이러한 전염병이나 바이러스와 같은 생물학적 재앙들에 대해서 어떻게 상상해 왔을까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자신들의 역사에 각인된 사건들을 모사하면서, 혹은 냉전 시기에 다양한 음모론들을 주도하던 것을 통해서 일정한 형태와 메시지를 구축했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관련된 이야기들이 어떠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이제 당연하게 제시해봐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에 재미있는 답을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 바로 본격 전원 SF라고 설명된, 『행성감기에 걸리지 않는 법』(2018)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제목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행성감기가 환기하는 것들
『행성감기에 걸리지 않는 법』은 지구에서부터 2,700광년이나 떨어진 베델스크 행성계의 라비다 행성에서 행성감기로 인해서 발생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에서 농사전문가를 자신의 행성으로 데려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라비다 행성의 농업 사령관 ‘띵’이 지구에서 데려간 이들은 농경 예능을 찍고 있던 배우와 스태프들이었고, 설상가상으로 다른 행성에 반강제로 끌려가게 된 그들이 행성감기의 원인으로 몰리면서 복잡한 사건들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이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의 전체 설정으로 본다면 이 작품은 그저 가볍고 조금은 황당한 설정의 나열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문체들도 기존의 전염병이나 생물학적 재앙에 관한 이야기의 논조들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가볍고 아기자기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게다가 베델스크 행성계, 그중에서도 라비다 행성과 이웃 행성인 데리다 행성 식량 사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소군)’은 동물이면서 식물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작품 내 일러스트 등을 통해 보여주는 모습 자체가 굉장히 귀여운 팬시 캐릭터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야기 전체의 형태들이 심각함과는 거리가 멀다. 라비다 행성에는 행성감기가 창궐하여 행성 인들이 검은 콧물을 흘리고 건강의 문제가 생겼으며, 생태계의 이상으로 인해 식량문제가 심각해졌기 때문에 육체를 공유해서 하나의 몸을 세 명의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는 ‘육체공유법’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게다가 식량문제를 해결해 줄 농업 전문가들이라고 오게 된 지구인들은 그저 예능 프로그램을 찍기 위해 모였던 이들이며, 실제 위기상황을 해결해 줄 전문가는 전혀 없는 상태라는 설정은 전형적인 코미디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1960년대 미국 SF에서부터 촉발되었던 뉴웨이브들이 보여주었던 블랙 코미디와 사회 풍자의 서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행성감기에 걸리지 않는 법』도 이렇게 가볍고 장난스러운 설정을 통해 구조의 이면에 있는 다양한 부조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낸다. 베델스크 행성계가 속한 은하에서의 행성 간 이동은 자유로우며, 언어의 장벽 또한 없다는 설정에 “단, 이에 필요한 기술과 비용은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39쪽)라는 조건이 붙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교양과 선의를 가진 베델스크 행성인들 역시 지구인들과 다를 바 없이 모순되고 양면성을 가진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 또한, 대상과 대상이 서로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과정에서 타자화의 전형을 보여주며 우리가 서로를 인식하고 있는 다양한 편견과 왜곡의 시각들을 객관화해서 드러내기도 한다.
베델스크 행성 인들은 지구인들을 철저하게 대상화해서 바라보는데, 그것의 기저에 존재하고 있는 시각은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감각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구인에 대한 보고서에서는 지구인들의 생활방식에 의미를 부여해 귀엽다고 여기기도 한다. 이는 우리가 현재 반려동물이라고 부르는 대상들을 대하고 있는 태도와 별반 다른 것이 아니다. 지구인들 역시 베델스크 인들을 우리에게 익숙한 외계인에 대한 편견을 통해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들은 사실 행성감기보다 훨씬 더 작품 내에서 큰 문제를 야기하고 위기상황을 촉발하는 원인이 된다. 행성 단위의 재난 상황이 닥쳤을 때, 기술의 발달이나 새로운 이식을 통해 극복하기 위해 다른 행성까지 갈 수는 있지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근본적인 부분들까지는 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단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행성감기는 표면적으로는 식량부족까지 촉발해 문제의 원인이 되는 재앙이지만, 의미론적으로는 이를 통해 행성인 들의 민낯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특히 원인 모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색을 위해 이성적이고 제도적인 절차 등을 중요시하고,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행성인 들의 변화는 의미심장하다. 지구인을 통해서 행성감기가 전염되는 것이라는 소문이 전파되자마자 소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행성인 대다수가 문제의 원인을 지목된 대상에게 쉬이 전가하면서 지극히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언론 등을 통해 제시된 대상들에게 너무 쉽게 문제를 전가하면서 사태의 해결을 종용했던 것처럼 말이다.
진부한 것과 중요한 것
이야기는 대단한 기술적 전회나, 백신의 개발 등이 아니라 주변에서 식량으로 여기지도 않았고,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리고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려나 마이너리티라고 여겨졌던 데리다 행성의 식물을 통해서 행성감기를 해결하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그 사이 지구인들은 라비다 행성 인들에게 소멸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행성 내 정치적인 세력 다툼과 은폐되어 있던 욕망이 뒤엉키기도 하지만 결국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재의미화하는 것이 서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SF 작품으로서의 긴박감이나 과학적인 사고실험의 신선함, 기술 발달에 대한 사고실험의 긴밀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오로지 시뮬라크를 통해 전시할 수 있는 이러한 상상력들은 오히려 지금 판데믹을 지나고 있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지점들을 시사하고 있기도 하다.
먼저 대상에 대한 인식의 전회가 현재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일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COVID-19는 중국 우한에서 먼저 확인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우한 바이러스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WHO는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특정 지역이 대상화되는 명칭을 지양하는 지침을 따라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로 명명했다가 최종적으로는 ‘코로나 바이러스19’라는 명칭으로 확정을 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특정한 지역이나 국가, 혹은 인종 들이 대상화되어서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인해 드러날 수 있는 문제들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소설에서는 지구인들이 행성감기의 원인이라는 증명되지 않은 정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지금부터 환경 재난 경보를 발령한다. 행성감기 바이러스 오염 물질인 지구인들이 라비다 행성을 활개치고 다니고 있는 비상상황이다.”(392쪽)라고 호도하기도 한다.
현재 일부 국가 및 언론에서 COVID-19에 대해 우한 바이러스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것의 정정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소설과 같이 극단적인 수사를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언어는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된 단어들은 결국 비슷한 문제들을 이미 야기하고 있다. 유럽 및 미주권에서는 바이러스 전파 초기에 동양인들에 대한 명백한 대상화들이 사회적으로 가시화되어 나타났고, 얼마 전 호주에서는 한국인이 바이러스를 옮기는 사람이라며 폭행을 당했던 사건이 보도되기도 했다. 인류가 그동안 발달시켜 온 의료시스템을 비롯한 과학 기술로 인해 이번 판데믹을 극복한 방법을 마련하는 동안, 사람들의 민낯, 그동안 진보하지 못한 인식의 문제와 같은 것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바이러스의 전파만큼이나 심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기술의 발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며,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SF 서사에서 수없이 경고했던 것처럼 질병으로 인한 멸망이 아닌,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인류가 스스로 멸망에 자신들을 내던지는 미래를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 한국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BBC와 인터뷰에서 대상화하고 혐오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대상화가 아닌 주체적인 존재로서의 인식의 전회가 있어야 하는 것은 이전에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더 나은 세상과 같은 이상론이 아니라 인류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부분이라고 비로소 여겨지게 된 것이다.
『행성감기에 걸리지 않는 법』이 제시하고 있는 결론적인 메시지도 역시 그러하다. 행성감기를 극복하는 방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라비다 행성의 (소군)과 기술력, 그리고 야만적인 행성이라고 여겼던 데리다 행성의 인식과 방법,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새로운 형태로 바꾸기 위한 지구인이 필요했다. 이러한 것들이 갖춰졌을 때 결과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것을 대단한 발명과 같은 것이 아닌 소박하고 일상적인 것들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과 혐오를 내려놓고 대상을 명확하게 인식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론들은 판데믹을 지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통해 대상에 대한 의미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들을 종용받고 있는 이때, 우리는 어쩌면 근본적인 선택의 갈림길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히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문제가 아닌 생존에 대한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
원본 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Board=n9998&id=1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