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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Fiction] 섬나라의 기사 / 20.4 크로스로드
최종 수정일: 2020년 4월 22일

(일러스트레이션 : 박재령)
늦은 오후, 수영은 수확이 끝난 갈색 유채밭에 섰다. 옆에는 젊었을 때부터 수리와 개량을 거듭한 보행전차 코스모스가 서 있다. 납작한 몸통에 다리가 전후좌우로 하나씩 달린 기묘한 생김새이지만, 코스모스는 이십 년 이상 수영과 함께 해적들로부터 아라를 지켜 왔다. 그것도 오늘까지일지 모른다.
수영은 이곳이 노란 꽃으로 가득하던 시절을 생각했다. 유채꽃은 씨를 맺고, 그 씨는 기름이 된다. 그리고 그 기름은 바이오디젤이 되어, 아라를 포함한 한라산 북쪽 기슭 마을들의 발전기를 돌린다. 전기는 빛을 밝히고 공장을 돌려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 씨앗을 전부 짜서 기름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제일 좋은 종자는 남겨서 다음 번에 파종한다.
기사의 삶도 그래야 한다고 수영은 항상 생각해 왔다. 기사는 자기의 시간과 지식으로 옛 기술을 보전하고 마을을 지키면서, 어느 정도 노력은 제자를 키우는 데 기울인다. 그렇게 배운 제자는 또 기사가 되고, 역시 기술을 보전하고 마을을 지키며 다음 대의 제자를 키운다.
유채는 대가 바뀌어도 유채이지만, 제자와 기사는 서로 다른 사람이다. 아무리 가르쳐도 자기 생각이 있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오늘 같은 날도 올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수영은 서글픈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스승님. 대답하세요. 하실 말씀이 아예 없으십니까?”
유채밭 건너편에서 제자 지호의 목소리가 전차의 확성기를 타고 들려왔다. 오십 평생 키운 제자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똑똑한 아이라 특히 열심히 가르쳤는데, 그 결과가 이렇다.
아라 사람들이 거의 다 이 밭에 모여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지호의 편을 들고, 어떤 사람들은 수영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이 싸움의 향방을 궁금하게 여기고 있다. 제주에서 기사끼리의 싸움은 드문 일이다. 특히나 스승과 제자가 맞부딪친다고 하면 그야말로 대대손손 전할 이야기다.
패자는 아라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제주연방에 더 이상 기사 없는 마을이 없는 만큼, 이 마을을 떠난다는 것은 섬을 떠난다는 의미다.
“스승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나세요!”
지호의 타이거샤크는 원래 군용이다. 한때 서귀포 근처에 주둔했던 옛 캘리포니아 해군의 수륙양용 수송 차량을 개조한 물건이다. 지느러미 달린 여섯 다리의 균형을 맞추는 스태빌라이저는 수영이 직접 설계해서 선물한 것이다. 그래도 차마 배은망덕하다는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지호가 말하는 ‘잘못’에는 수영도 사실 찔리는 구석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호야. 기사는 경운기나 고치고 논에 물이나 대는 게 전부가 아니야. 앞날을 생각해야 해. 한때 여기 아라에는 대학교가 있었다. 옛 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학자와 기사들을 길러냈어. ”
“그게 낡은 사고 방식이라는 거예요. 옛 문명의 기술을 익히는 게 지금 정말로 제일 중요한가요? 지금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잔뜩 있지 않습니까?”
구경하는 주민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수영은 아라에 도는 자기 소문을 잘 알고 있었다. 농사에도, 발전에도, 태풍 대처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비싼 책과 기계를 사들이는 천하태평한 기사라는 소문이다. 지호가 말을 계속했다.
“지금 아라에, 제주에 필요한 것은 고성능 망원경이나 전자기기가 아니에요. 스승님은 경운기를 고치고 논에 물을 대는 일이 사소하게 느껴지시는가 본데,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옛 시대의 영광에 눈이 멀어서 주민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소홀히 하면 무슨 낯으로 밥을 얻어 먹는단 말입니까?”
조심스럽던 군중의 웅얼이가 동의의 웅성거림으로 고조되었다. 수영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기사의 의무를 주민이 이해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주민들도 그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기사에게 과학과 기술의 앞날을 맡기고 따른다. 자기들의 제한된 시간과 자원이 비록 당장 눈앞의 일에 쓰이지 않아도, 기사가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 줄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신뢰는 무조건적이지도 무한하지도 않다. 기사가 자기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는 주민들의 마음이 지호라는 형체로 굳어졌으면, 여기서 타이거샤크를 제압하고 결투에 이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호를 쫓아낸다 해서 앞으로 이곳에서 계속 기사로 있을 수 있을까?
해가 서쪽으로 꽤 기울어 있다. 수영은 풍경을 죽 둘러 보았다. 거리를 널찍히 두고서 두 기사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 메밀떡을 지지는 불판이 보였다. 경운기에 앉아서 이쪽을 유심히 쳐다 보는 노인도 있다. 햇볕에 얼굴이 까맣게 탄 아이들이 십여 명씩 무리를 지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두 기사를 주시하고 있다.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푸른 한라산이 솟아 있고, 그 위로는 구름이 느리게 지나간다. 수영은 이미 제주를 떠날 마음을 굳히고, 이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가 괘씸한 마음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섬을 떠날 때는 떠나더라도, 한 방 세게 먹여주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지호야. 네가 이제 기사를 그만두고 정치가가 되고 싶은 모양인데, 긴 말은 필요 없다. 아직도 기사 같은 마음이 남아 있으면 깨끗하게 승부를 내자.”
그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밭에서 새참을 알릴 때 쓰는 징을 요란하게 울렸다. 군중이 약속이라도 한 듯 뒤로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수영은 코스모스에 다가가며 손목시계의 햅틱 액정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코스모스가 다리를 굽혀 앉고 조종석 문을 열었다.
자리에 앉자 어두운 조종석에 조명이 들어오고 전방 디스플레이가 켜졌다. 마치 창문 너머를 보는 것처럼 전방의 풍경이 나오고 작은 창에 좌우와 후방이 비쳤다. 지호는 이미 타이거샤크에 탔는지, 화면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수영은 손가락 두 개를 모았다 펼쳐 카메라의 배율을 높였다. 지난 주에만도 같이 점검을 했던 전차다.
OS의 기동 점검이 끝나자 지호의 타이거샤크를 녹색 격자가 둘러쌌다. 수영은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피아 식별 코드를 바꿨다. 격자의 색깔이 주황색으로 변했다.
코스모스의 무장 상태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해적과 마지막으로 싸운 것이 작년 태풍철 직후였다. 그때 썼던 흉악한 무기들을 지금 쓸 수는 없다. 미군 기지에서 발굴해 수리한 지대지 로켓은 주민들이 말려들 위험이 있다. 레이저는 정확하지만 출력이 낮아, 장갑이 튼튼한 타이거샤크에 피해를 입히려면 조종석을 노려야 한다. 기관포는 해적 상대로 가장 유효한 무기이지만, 역시 스승과 제자의 싸움에서는 너무 위험하다.
수영은 플라즈마 커터의 상태를 점검했다. 충전은 완전히 되어 있고, 콘덴서의 상태도 양호하다. 가까이 붙어서 타이거샤크의 무기를 파괴하고, 가능하면 다리를 한두 개 정도 자를 마음을 먹었다. 타이거샤크는 비록 덩치가 크고 군용이라고 하지만, 개조는 농업용으로 되어 있다. 제주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최첨단 설비를 갖추고 꾸준히 개량해 온 코스모스라면 충분히 대적할 수 있다.
기사의 가치는 무엇을 알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있다. 싸움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기사가 고향을 떠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아라가, 나아가 제주연방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정하는 중대한 사건이다. 그런 큰 일에는 적절한 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의식에서 이기는 것이, 수영이 제주에서 이룩하는 마지막 업적이 될 터였다. 수영은 헬멧을 쓰고,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지호야, 나는 준비됐다.”
반대편에서 타이거샤크가 여섯 다리로 땅을 울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수영도 화면에 집중하면서 코스모스를 앞으로 몰았다.
————
화기를 사용하지 않는 싸움에서는 덩치가 왕이었다. 타이거샤크의 육중한 몸집과 농작물을 싣는 데 쓰는 거대한 기계팔에, 수영은 참패하고 말았다.
수영은 지호와 마지막으로 식사를 같이했다. 마을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 준 덕분에, 오늘은 밥상이 특히 잡다하고 푸짐했다. 구운 옥돔도 큰 걸로 한 마리 올라와 있다.
이제 와서 이겼어도 떠났을 거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창피스러웠다. 유채유로 밝힌 등불을 사이에 두고, 수영은 지호에게 하소연했다.
“아무리 그래도 코스모스는 가지고 가게 해 줘야 할 거 아니냐. 내가 얼마나 공을 들인 건데.”
“스승님, 아직도 못 깨달으신 건가요? 기사의 물건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것이에요. 스승님이 코스모스를 가지고 가시면 제주 앞바다는 뭘로 지킨답니까? 게다가 코스모스는 아까 싸우다가 차체가 손상됐잖아요. 이대로는 물이 새들어 갈 거예요. 바다 못 건넙니다.”
아까 유채밭에서보다도 당당한 지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영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맨몸으로 가방 하나 짊어지고 배를 타란 말이야? 기사의 체면이 있지….”
“가물치호를 내 드릴게요.”
수영은 놀라서 입을 반쯤 벌렸다. 가물치호는 고깃배에 다리 네 개를 붙인, 전차라는 이름이 무색한 고물이다.
“야, 그건 네 제자가 연습용으로 쓰는 거잖아. 무기라고는 작살밖에 없잖아.”
“그새 총좌도 하나 붙여 놨어요.”
수영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울어 마땅할 것 같은데 자기 처지가 하도 우스워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지호가 말을 이었다.
“스승님. 제가 몇 년 전부터 계속 말씀드렸잖아요. 책이랑 기계는 계속 사들이시는데, 정작 마을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되고 있다고요. 작년 태풍 피해가 컸잖아요?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태풍이 세지는 거야 온실효과 악순환 때문이지 왜 내 잘못이냐? 그걸 어떻게 막아? 피해 복구도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했잖니?”
지호가 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태풍은 상징적인 사건이에요. 그 동안 오래 불만이 쌓였다가 터진 거죠. 좀 더 사회에 필요한 연구를 하고, 주민들의 심기를 잘 살펴야….”
수영은 말허리를 끊고 쏘았다.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정치가가 다 됐구나. 옛 문명이 왜 망했는지 알아? 다 너 같은 놈들 때문이야.”
식탁에 침묵이 흘렀다. 수영은 빙떡을 한 입에 넣었다. 제주를 떠나면 이것을 언제 또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 입안 가득 메밀향이 퍼졌다….
“그 아무 쓸모도 없는 책이랑 부품 같은 건 전부 가지고 가셔도 돼요.”
“말 안 해도 그건 내 거야. 내일 해 뜰 때 나갈 테니까, 가물치호나 부두에 띄워 놔라.”
그 뒤로는 대화가 없었다. 지호는 식탁 위의 음식을 깨작거렸고, 수영은 입에 들어가는 대로 집어 먹었다.
지호가 아침에 전송하겠다며 문을 나서자, 수영은 식탁에 엎어져서 드디어 울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원망스럽고 제자가 괘씸했다. 눈이 부을 정도로 울고 나서야, 수영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가방에 노트북 컴퓨터를 챙겼다. 대부분의 책은 그 안에 들어 있다. 그간 연구한 것들, 설계한 것들도 여기 들어 있다. 번듯한 자동공장이 있는 마을에 가서 설계도를 팔면 당분간은 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다음은 전자공학 서적들을 챙겼다. 전자는 수영이 제일 좋아하는 분야였지만, 제주에서 제일 쓸모 없는 분야이기도 했다. 원자로에 관한 두꺼운 책은 아마 어디에서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원자력 발전소는커녕 연료봉을 만들 여력이 있는 곳조차 이미 세상에 없다. 하지만 오기가 동해, 그 책도 가방에 쑤셔 넣었다.
토목과 수자원 관리에 관한 책들에는 하나같이 먼지가 끼어 있다. 수영은 자기가 이 책들을 읽기나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두고 가기로 했다.
내키지 않는 걸음을 창고로 옮겼다. 지금까지 손에 넣은 기계와 부품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브라운관 TV는 문명 말기에 이미 골동품이었지만 지금도 켜진다. 방송 신호가 없어서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희고 검은 점들이 섞여 나올 뿐이지만, 수영은 그것을 때때로 들여다 보곤 했다. 마치 그 무작위적 패턴과 잡음 속에서 옛 문명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처럼…. 홀로그램 스마트폰은 배터리가 낡아 10분밖에 버티지 못하지만, 이 또한 문명의 정점들 중 하나였다. 코스모스에 실려 있는 것보다 40% 이상 높은 효율을 자랑하지만 지금은 고장난 콘덴서, 급변하는 기후 환경 속에서 일기예보를 할 때 썼던 수퍼컴퓨터의 CPU 유닛…. 모두 지나간 세월의 영광이다. 이런 것들을 재현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수영은 지금까지 여기서 일해 왔다. 그러나 아라 사람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짐들을 챙겨서 책과 창고에 주차시켜 놓은 삼륜차에 가득 실었다. 지호가 이 집에 살며 공부할 시절 오토바이를 개조해서 만들었던 물건이다. 콘덴서도 CPU도 스마트폰도 아무 쓸모가 없는 반면, 이 삼륜차는 부두까지 짐을 나를 수 있다.
수영은 이부자리를 깔고 그 위에 누웠지만, 잠이 좀체로 오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디로 가면 좋을까? 몇 개월 전 왔던 구마모토 상인은 과학기술이 세계에서 제일 잘 보존된 곳이 밴쿠버라고 호언장담했다. 태평양을 저 쪽배로 건널 수는 없지만, 수영은 유리와 강철로 된 높은 건물들이 마치 보석 기둥처럼 솟아 있는 도시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런 곳은 이제 동영상이나 사진 속에만 있다는 것을 수영은 잘 알고 있다. 대도시는 모두 버려졌다. 왜 그런지 수영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옛날에는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있어서 그런 의문에 대답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을 보면, 경제학자가 남아 있더라도 아주 그럴싸한 대답을 얻기는 힘들지도 모를 일이다.
수영은 평생을 제주연방에서 살았다. 부산과 규슈의 상인들을 통해 세상 소식을 들어 왔지만, 정작 큰 도시를 본 적은 없다. 비록 이제 버려졌다고는 해도, 대도시에는 답이 있을 것 같았다. 질문이 무엇인지는 아직 몰라도, 여튼 답이 있을 것 같았다.
수영은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서울에 가자.”
갈 곳을 정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지만, 그래도 잠은 오지 않았다. 수영은 아침까지 뒤척이다가, 창밖에 햇살이 손톱만큼 보이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삼륜차를 끌고 집을 나섰다.
도로는 곳곳이 다양한 재료로 땜질이 되어 있지만, 지난 태풍 뒤로 새로 패인 웅덩이가 많다. 수영은 삼륜차의 짐칸이 요란하게 덜거덕거리자 혼잣말로 불평을 하려다가, 그것이 자기 책임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지호가 이런 것까지 다 꼼꼼하게 처리한다면, 수영이 떠나는 것이 아라 주민들에게는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부두는 침수된 제주 시내의 동쪽 가장자리에 있다. 아라의 영토이고, 그럭저럭 큰 시장이 서는 곳이기도 하다. 수영은 이곳의 찻집에 앉아서 외국의 문물을 실은 배가 들어오기를 하염없이, 즐겁게 기다린 추억이 여러 차례 있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 아라 주민들이 사실상 자기들이 쫓아낸 기사를 전송하기 위해 수십 명 나와 있었다. 지호도 어린 제자 민서를 데리고 서 있다. 이미 잔교에 뱃전을 대고 수영을 기다리는 가물치호가 보였다.
“기사님, 편히 가세요.”
감귤을 키우는 박씨가 추도에 가까운 인사를 했다. 지호가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민서는 절을 하는 대신 울상을 짓고 말했다.
“큰스승님, 꼭 가셔야 해요?”
수영은 최대한 인자한 웃음을 띄우고 대답했다.
“이 좁은 곳에 서로 의견이 안 맞는 기사가 둘 있어서 뭘 하겠니? 너도 열심히 배우고 커서, 오늘을 잊지 말아라.”
지호의 표정이 굳었지만 수영은 무시했다. 삼륜차의 짐칸에 실린 짐을 주민들이 한 덩어리씩 들고 가물치호에 옮겨 싣기 시작했다. 지호가 물었다.
“스승님, 갈 곳은 정하셨나요?”
“그래. 나는 서울에 갈 거다.”
주민들 몇 명이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호가 말했다.
“한반도 중부는 아직도 위험하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저는 익숙하신 규슈나 부산으로 가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규슈 부산이랑은 맨날 오락가락하는 사이인데, 그런 곳이 제주랑 뭐 그리 다르겠냐? 나는 새로운 것을 찾아 갈 거야. 내가 서울에서 제주를 뒤바꿀 기술을 찾아다 돌아올 테니, 그때 다시 한 번 겨루자꾸나. 그때는 사정 봐주지 않을 거야.”
수영은 그 말을 하자마자 자기가 옹졸하게 느껴졌다. 후회가 되었지만, 뱉은 말은 어쩔 수 없다. 지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 고장에 도움이 되는 큰 일을 이루고 돌아오신다면 저는 당연히 물러나야지요. 아라의 기사 자리는 제가 임시로 맡은 걸로 알겠습니다.”
수영은 쑥스럽게 헛기침을 하고 잔교를 걸어 가물치호에 올랐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바로 조종실에 들어갔다.
가물치호는 작은 어선에 트럭의 다리와 제어 시스템을 붙여서 뭍에서도 다닐 수 있도록 수영의 스승이 만든 전차다. 수영은 기사가 되기 전, 가물치호의 작살을 용수철식에서 전자기 유도 방식으로 개조했다. 수영은 배에 관한 모든 것을 가물치호로 배웠고, 그 지식은 역시 수륙양용인 코스모스를 만들 때에도, 지호와 함께 타이거샤크를 개조할 때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조종실 안에는 기억에 없는 메모와 낙서가 보였다. 지호와 민서의 필체가 둘 다 있다. 배의 조종과 설계에 관해 가르친 흔적이다. 그것을 보고 수영은 잠깐 목이 메었다. 비록 자기는 이 배와 함께 제주를 떠나지만, 그래도 쌓아 온 지식은 남아서 후세에 이어지는 것이다.
수영은 조종석에 앉아 배의 컴퓨터를 켰다. 지금까지 한 번도 쓸 일이 없었던 장거리 항해 프로그램에 목적지를 입력하자 디젤 엔진에 시동이 걸리고 예상 도착 시간이 떠올랐다. 배터리 아이콘에도 작은 번개 표시가 붙어, 충전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잔잔한 파도와 낮게 부르릉거리는 엔진이 배를 기분 좋게 흔들었다. 수영은 어젯밤에 챙기지 못한 잠을 청하며 서울을 생각했다. 그럴 리 없는 줄 알면서도, 수영의 마음 속에는 야밤에도 낮처럼 빛나는 보석 기둥들의 도시가 떠올랐다. 그 사이를 걷는 꿈을 꾸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수영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귀를 울리는 확성기 소리에 잠에서 깼다. 어리둥절해서 창밖을 보니 저 너머 해안이 보였다. 부슬비가 내리고 있고, 작은 보트가 십 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각진 회색 장갑판을 두른 보트다.
<무장 선박에게 고한다. 전원 갑판에 나와 두 손을 들어라. 곧 승선하겠다.>
순간 해적인가 싶었지만, 여수 청년회라고 쓰인 깃발을 올린 것이 보였다. 작살 하나밖에 없는 배에 무장 선박이라는 말이 우스웠지만, 지호가 총좌를 하나 새로 붙였다고 말한 것을 바로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무슨 총인지 확인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수영은 조종실의 벽걸이에 걸린 노란 비닐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가 두 손을 들었다. 다가오는 보트에는 역시 노란 비닐 외투를 입은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이 세 명이 타고 있었다. 한 명은 확성기를 들고 있고, 한 명은 소총을 들고 있다. 옛 대한민국 육군이 쓰던, 지금도 한반도 전역에서 애용되는 무기다. 나머지 한 명은 해적들이 때때로 사용하는 로켓 런처를 얼추 배의 엔진 언저리에 겨누고 있다.
수영은 녹슨 쇠사다리가 뱃전에 걸쳐지는 소리에 움찔했다. 곧 두 사람이 올라왔다. 한 명이 수영에게 총을 겨누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확성기를 허리에 찬 나머지 하나가 눈에 의심을 가득 채우고 말했다.
“당신 해적이지?”
그런 오해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젊은이들, 나는 제주에서 온 기사야. 그 총 좀 내리시게.”
확성기 청년이 수영을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제주 기사분이 왜 이런 쪽배를 타고 뭍까지 나오셨는데요? 거기는 코스모스랑 타이거샤크가 있잖아요.”
수영은 공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서울에 가는 길이야. 걔들은 섬을 지켜야 하니까, 옛날에 타던 걸 끌고 나온 거야.”
두 청년이 서로 쳐다 보고 눈길을 교환했다.
“짐 확인만 좀 하고, 곧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도현아.”
도현이라고 불린 청년이 소총의 안전장치를 도로 올리더니 고물로 걸어갔다. 부슬비가 꽤 고인 파란색 방수포를 들추고 그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수영은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비 맞지 않게 조심 좀 해 주셔. 귀한 물건들이 많이 있으니까.”
확성기 청년이 소리쳤다.
“조심해서 뒤져. 이 분이 기사라는 것만 확인하면 돼.”
방수포 밑에서 소리가 들렸다. “재희야, 기술 책이 잔뜩 있는데. 기사 맞는 것 같아.”
확성기 재희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자기 배 쪽으로 손짓을 했다. 로켓 런처가 머리를 내렸다. 재희가 수영을 쳐다보고 말했다.
“몰라 뵈었네요. 여수에 다른 곳 기사분이 오시는 건 드문 일이라…. 게다가 여기는 섬들 사이로 해적이 나와서 이런 배만으로는 위험하실 뻔했어요.”
“젊은이들 배가 더 작은데?”
“저희야 빠르고 장갑이 좋으니까요. 바로 도망가면서 무전 쳐서 알리면 되지요.”
저 작은 배는 어떤 모터를 쓰는지, 어떤 무전기가 있는지 바로 궁금해졌지만, 이 사람들이 그것을 자세히 알 것 같지는 않았다. 기사는 타지에 가면 그곳의 기사와 만나는 것이 예의다. 그때 물어 보면 될 일이다.
재희는 보트로 돌아가고 도현이 가물치호에 남아 길 안내를 했다. 해수면이 높아진 뒤로 한반도 남해안에는 암초가 많다. 가물치호 정도 크기면 사실 큰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항해에 익숙하지 않은 수영으로서는 현지인이 안내해 주는 것이 더 마음 편했다.
부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사람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마흔 남짓에 키가 크고, 청바지에 체크무늬 셔츠를 입었다. 그 뒤에는 길다란 포신을 등에 짊어진 다리 넷 달린 전차가 보였다. 재희가 수영을 소개했다.
“스승님, 무전으로도 말씀드렸지만 제주도에서 오신 기사십니다.”
재희가 기사의 제자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수영이 먼저 인사를 했다.
“고수영입니다. 제주연방 아라…에서 왔습니다.”
‘아라의 기사입니다’라고 하려다가,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상기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저는 조민하고요, 여수에서 기사를 맡고 있습니다. 어서 오세요.”
여수 기사 조민하의 말씨에서 수영은 주저와 경계를 느꼈다. 아직도 해적의 앞잡이라고 의심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자가 해적 취급을 해 드려서 언짢으시지 않았는지….”
수영은 손사래를 치고 웃어 보였다. 조민하가 제자 재희와 수영을 번갈아 보고 말했다.
“손님은 우리 집으로 모시자. 고기사님도 바쁘지 않으시면 며칠 머무르다 가시죠.”
수영에게는 반가운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하룻밤만 신세를 지겠습니다. 제 전차를 뭍으로 올려도 좋을까요?”
재희가 놀란 낯빛이 되더니 가물치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냥 배 아니었어요?”
조민하가 웃고, 수영을 향해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은 부두 옆의 경사로를 통해 가물치호를 육지에 올렸다. 비록 배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물에 오래 두면 다리에 좋지 않다. 관절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은 자리에 유채유를 바르는 동안 여수 기사와 제자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여수는 물에 잠긴 제주 시내보다 상태가 좋았지만, 역시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수영은 가물치호를 타고서, 조민하가 모는 전차의 뒤를 따라 아파트 단지의 회색 폐허 옆을 지났다. 대체 옛날에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길래 이렇게 높은 건물들을 번호까지 붙여서 십여 채씩 빽빽하게 지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수영은 앞장 선 전차의 짐칸에 앉은 재희가 가물치호를 쳐다보는 것을 눈치챘다. 낡은 고깃배가 육지에서 걸어다니는 꼴이니 신기해 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얼굴에는 익숙한 다른 것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키운 제자들을 떠올릴 때마다 수영이 제일 그리워했던 표정, 눈 앞에 있는 저것에 관해 낱낱이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굶주린 호기심이 날로 드러나는 표정이다.
조민하는 작은 농장 앞에 선 큼지막한 저택 앞의 넓은 공간에 전차를 세웠다. 좌우의 별채는 무너졌지만 본관은 꽤 번듯하게 서 있다.
수영은 가방을 들고 가물치호에서 내려 재희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한쪽 구석에 <여수시 보건소>라는 글씨가 흐릿하게 새겨진 석판이 보였다.
“의술도 아십니까?”
조민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의 모르지요. 약이 그다지 없어서 관련 서적도 별 도움이 안 돼요. 완도에서 배양하는 항생제를 사다 쓰고는 있어요. 그건 제주도 마찬가지지요?”
LED 등으로 밝혀진 보건소, 아니 기사 저택의 복도를 걸으며, 수영은 역시 기사의 집은 밝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하는 제주의 기술 상황에 관해 묻고 여수의 현실과 비교했다. 가까운 곳인 만큼 처지가 비슷했지만, 해적 문제는 아무래도 연안인 여수 쪽이 조금 더 심한 듯했다. 자동공장은 제주와 규격이 같지만, 성능은 더 좋은 모양이다. 가져온 설계도를 여기서 팔아, 서울에 가는 데 필요한 물자를 보급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손님 방에 도착하고 나서도, 수영과 민하는 문 앞에 멈춰 서서 이야기를 더 했다. 재희는 질문이 산더미라는 마음이 얼굴에 다 드러났지만, 기사들의 대화에 끼어들기를 꺼리는 듯했다. 어차피 식사 때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먹은 것이 전혀 없다. 책과 기계를 챙기느라 식량을 챙겨 오는 것조차 잊었다. 민하가 말했다.
“곧 식사를 준비할 테니 좀 쉬시지요. 바다가 험했지요?”
“내내 자느라 전혀 몰랐네요.”
민하가 방문을 열어 들어가라는 예의바른 손짓을 했다. 수영이 들어가려는데 재희가 급히 말했다.
“물 가져다 드릴까요? 목 마르지 않으세요?”
말을 들으니까 문득 또 목이 말랐다.
“아, 그래 주면 좋을 것…”
수영이 말하는데, 민하가 등을 두드리며 웃었다.
“손님 너무 귀찮게 하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나간 뒤, 수영은 방을 둘러 보았다. 침대 하나와 옷장, 책상이 있는 깨끗한 방이다. 지호가 제자로서 집에 같이 살 시절에는 방을 이렇게 깨끗하게 썼었다. 반면 아라에 있는 집은 지호가 독립한 뒤로 잡동사니가 쌓였다. 수영은 두고 온 집을 떠올렸다.
컴퓨터를 꺼냈다. 가물치호의 전기 소켓에 문제가 있었는지, 그새 전혀 충전이 되어 있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벽에 있는 소켓에 플러그를 꽂아 보았지만 역시 전기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컴퓨터를 열고 설계도 폴더의 파일들을 점검했다. 오늘 식사 자리에서 분명히 거래 얘기가 있을 것이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물병과 잔을 가지고 재희가 들어왔다.
“에구, 고마워라.”
수영이 그렇게 말했는데, 재희는 잔에 물을 따르지도 않고 물어 왔다.
“고기사님, 저기, 그, 타고 오신 배… 전차 있잖아요.”
“응, 가물치호.”
재희의 눈이 반짝거렸다. 수영은 지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지호는 저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 때 이미 기사가 되어 아라의 서쪽을 관리했는데, 이 젊은이에게는 마치 어린 제자들 같은 호기심이 있다.
“작살 그거 리니어 모터로 쏘는 거죠? 그렇게 무거운 걸 쏘려면 전압이 얼마나 돼야 해요?”
수영은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침대에 앉아서, 옆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자기 유도의 원리에 관해 재희가 알고 있는 지식을 먼저 확인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을 설명한 뒤, 질문에 대답을 했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 궁금한 것도 늘기 마련이다. 작살의 무게, 콘덴서의 용량과 재료, 코일의 재질과 수명…. 재희는 딱 해야 할 질문들을 연달아 했고, 제자를 가르쳐 본 지 오래된 수영은 즐겁게 대답했다. 작살 하나만 가지고도 밤을 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일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는데 몸과 머리에 힘이 돌았다. 재희가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센 작살로 뭘 잡나요? 그 정도면 웬만한 전차 장갑도 뚫을 것 같은데.”
수영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참치 같은 거나 잡지. 짬 날 때마다 개량하다 보니까, 좀 쓸데 없이 세기는 해.”
재희가 말했다.
“리니어 모터로 위성을 쏘아 올리는 생각을 전부터 했어요.”
그 말을 듣자 이 젊은이는 좋은 기사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좋은 기사가 되어도 또 자기처럼 쫓겨나지 않을까? 그러면 누가 위성을 쏜다는 말인가? 수영은 한숨을 한 번 쉬고 침을 삼켰다.
“위성은 어디 쓰게?”
“음…. 일기예보에도 도움이 됐다고 하고요. 아주 먼 곳하고도 대화를 할 수 있고요. 어쩌면 그… 인터넷도 복구할 수 있을 거고.”
“위성 하나로 그게 되나?”
재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하면 또 누가 하겠죠.”
수영은 목이 메었다. 일어나서 재희를 등지고 잔에 물을 따라 마셨다. 눈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다른 사람은 그런 걸 하지 않는다고, 너를 시대에 뒤떨어진 기사로 볼 뿐이라고 말해 버릴 것 같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재희가 말했다.
“스승님이 상 차리는 거 도와드려야 해요. 내려가 보겠습니다.”
수영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물잔을 내려 놓았다. 물병의 물을 빈 세숫대야에 조금 따르고 얼굴을 씻었다.
수영은 식사 자리에 컴퓨터를 들고 갔다. 조민하와 재희가 앉아 있다가 수영이 도착하자 일어났다. 빈 의자 하나에 노트북 컴퓨터 한 대가 이미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이 자리에서 거래를 예상했음을 알 수 있다.
식탁에는 작은 생선 몇 마리와 처음 보는 나물, 갓김치, 콜라비 겉절이, 보리가 섞인 밥과 미역국이 올라 있었다. 유채나물이 빠지지 않는 제주 밥상과는 달랐고, 갓김치도 오랜만이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익숙했다. 밥 냄새를 맡으니 주린 줄도 몰랐던 배에서 소리가 났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세요. 밥은 더 있습니다.”
수영은 민하가 눈짓을 한 방향을 보았다. 부엌 한쪽에 새것처럼 깨끗한 전기밥솥에서 김이 조금 올라오고 있었다.
밥상에서의 대화는 주변 정세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제주와 여수는 물론, 동아시아의, 어쩌면 세계의 모든 해안이 겪는 문제가 해적이었다. 평소에는 멀쩡하다가도 농한기가 되면 복면을 쓰고 노 략질에 나서는, 마치 바이킹 같은 마을들이 곳곳에 있다. 조민하는 이 분야에 관해 특히 할 말이 많았다.
“… 그래서 청년회가 순찰정을 타고 앞바다를 돌아요. 정찰하러 온 배를 끊는 게 제일 효율적이거든요. 제 전차가 포를 쏠 일도 없고…. 해적 정찰수들이 어선으로 위장하는 경우가 꽤 있어서 아까 그런 오해를 한 거지요.”
수영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도, 재희가 순찰정에 타고 있었던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기사의 지식을 익히는 것은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다. 모자란 식량과 자원을 순전히 공부만 하는 사람에게 투입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기사는 제자를 한 번에 많아야 두어 명, 보통 한 명 가르친다. 기사의 제자가 집을 떠나 기사와 함께 사는 것도, 집에서 지내면 농사나 잡일에 동원되느라 공부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건강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해안 순찰에 굳이 기사의 제자가 나서는 것을 수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묻는 것은 무례한 일일 터이다. 수영은 해적 이야기에서 화제를 돌렸다.
“여수에 오니까 제주랑은 많이 다르더군요. 순찰정도 전차도 훌륭하지만, LED 등을 이렇게 많이 갖고 계시다니….”
수영은 천장을 낮처럼 밝힌 조명을 손으로 가리켰다. 민하가 겸손을 떨었다.
“얼마 전에 우연히 발굴이 돼서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고, 저희 공장에서 생산은 아직 못합니다. 제주 기사분들이야말로 솜씨가 좋으셔서 좋은 물건들을 만드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좀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이제 거래의 시작이다. 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충전 중인 컴퓨터를 식탁 위로 옮기고 의자를 들어 민하의 옆자리로 옮겼다. 재희가 밥그릇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자기 의자도 들어서 민하의 반대쪽 옆에 놓았다.
수영은 다목적 캐드 프로그램을 띄웠다. 프로그램을 제작사에서 직접 구입했을, 지금은 죽고 없을 옛날 어느 기사의 이름이 제목 아래로 떴다. 수영은 민하가 버전 정보를 확인하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이 근방의 거의 모든 기사가 같은 버전의 프로그램을 쓰고 있을 것이다. 같은 프로그램의 신판도 돌고 있지만, 구판 데이터를 변환하는 업그레이드 기능이 망가져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코스모스는 대부분 고기사님이 직접 설계하신 건가요? 대단하십니다.”
민하가 설계도들을 훑어보다가 말했다. 수영은 기뻤지만 겸손을 떨었다.
“보시다시피 기존 부품들을 재활용한 거라 그렇게까지 칭찬받을 것은 아닙니다.”
전차의 설계는 말하자면 아라의 군사 기밀인데 팔아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서울에 가려면 우호적인 기사에게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야 한다. 제주에는 미안하지만, 기사를 쫓아냈을 때 그 정도 생각은 했을 것이다.
민하가 코스모스의 설계도를 쓱 보고 다음 파일을 열었다. 유채밭에서 사용하는 수확기다. 씨앗과 잎을 함께 걷어서 분류하는 물건이다.
“이건 경운기에도 그냥 붙여 쓸 수 있네요. 들깨 수확할 때 굉장히 유용하겠군요.”
수영은 음식이 얹힌 것처럼 속이 불편했다. 분류수확기는 지호가 기사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설계했던 물건이다. 민하가 수확기의 규격과 수명, 재료 특성에 대해서 질문을 해 왔다. 수영도 자동공장이 시제품을 제작할 때 감독했기 때문에 대답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민하가 코스모스를 무시하고 넘어간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음에 민하가 눈을 둔 것은 지호의 전차 타이거샤크에 붙이기 위한 스태빌라이저였다. 보행차량은 평형을 유지하는 기능이 좋지 않으면 멀미 유발 장치나 다름 없다. 이것도 수영의 자신작이었지만, 민하는 그냥 넘어갔다.
“더 좋은 게 있으신가 봐요?”
“아니요. 이쪽이 확실히 더 기동성에는 좋을 것 같은데, 저희는 방위를 바퀴 달린 차량에 더 의존하고 있어서요.” “나중을 위해서라도….”
민하가 웃었다.
“그보다는 도로를 정비해서 바퀴가 구르게 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요.”
수영이 아끼는 설계들은 모두 거르고, 민하는 분류수확기와 자동그물을 골랐다.
“제 설계도 좀 보여 드릴까요?”
민하가 자기 컴퓨터를 올려 놓았다. 수영은 입맛을 다시고 대답했다.
“구경은 하고 싶지만, 당장은 서울까지 가는 데 쓸 물자가 더 급해서요.”
제주에서 가져온 것만으로는 식량은 물론 발전기에 넣을 기름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가는 길에도 아마 더 구할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하면 타향에 머물며 일을 해 줘야 한다.
“그러고 보니 고기사님은 서울에 가신다고 했지요. 거기는 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데….”
“큰 도시는 어디나 마찬가지지요.”
“서울 지역은 넓다 보니 특히 더 심해요. 농사 지을 땅이 있는 변두리를 빼면 그저 콘크리트와 유리의 사막 같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가는 길이 위험해서….”
수영은 위험이라는 말에 흠칫했다. 가물치호로는 떼도적을 상대할 수가 없다. 민하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계속했다.
“전쟁 때 사용하던 자율전차가 지리산 언저리를 아직 돌아다닌다더라고요. 저도 들은 얘기입니다만서도.”
수영은 두려우면서도 호기심이 동했다.
“누가 정비도 충전도 안 해 주는데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밝혀지지 않은 뭔가가 있겠지요. 무지한 사람들은 유령전차라고들 합니다만…. 레이더에도 안 잡힌다고 하니 어쩌면 정말 뜬소문인지도 모르지요. 뭐, 광주나 진주 쪽으로 좀 돌아서 가시면 안전하겠지만요.”
수영은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산속을 배회하는 전차들을 생각하고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여행길은 짧을수록 좋기 마련이다. 도적은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영은 미친 AI 전차 몇 대보다는 곳곳에 박혀 있을 농한기 도적촌들이 더 두려웠다. 도적이 아니더라도, 가는 곳마다 여수처럼 자기를 환영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
민하는 식탁 옆의 책장에서 접힌 지도를 꺼냈다. 옛 대한민국 때의 지도에 색연필로 이곳저곳 가필을 한 것이 보였다.
“여수 북쪽으로는 언덕이 많아서, 옛길을 따라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여기서 북쪽으로 가시면 고속도로 흔적이 보이니까, 그걸 길잡이로 삼아서 가세요. 지리산을 피하실 것 같으면 순천에서 서쪽 길을 따라 광주로 가시면 되겠네요.”
지도를 보면, 순천에서 북쪽으로 뻗은 길에 비해 상당히 돌아가는 경로다. 수영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도적은 많이 나올까요?”
“순천까지는 안전합니다. 그 뒤로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철이 철이라….”
농한기라는 얘기다. 수영은 지도를 다시 들여다 보았다. 전주, 대전, 천안… 가는 길에 있는 곳들이 모두 들어본 도시들이다. 특히 대전에는 큰 기사 학교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새로운 기계나 적어도 책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민하가 마을의 창고에 있는 물자의 내역을 찾겠다며 스프레드시트를 열었다. 수영은 장부에서 눈을 돌리고, 밥그릇을 들고 부엌에 가서 전기밥솥의 보리밥을 반 주걱 퍼 담았다. 그리고 돌아오며 자연스럽게 민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재희는 아까까지 눈을 빛내며 수영의 설계들을 함께 열심히 들여다 보기는 했지만, 그 동안 말이 전혀 없었다. 민하가 재고를 확인하는 사이, 수영은 아까 궁금하게 여겼던 것을 재희에게 물었다.
“아까 낮처럼 바다에 순찰을 자주 나가나?”
재희가 대답했다.
“해적철에는 이틀에 한 번 정도요. 저도 청년회에 있으니까요.”
“공부할 시간도 모자랄 텐데….”
민하가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기사는 공부도 해야 하지만, 자기 공동체를 지키고 돕는 게 첫째 의무지요. 얘는 머리에 헛바람이 좀 들어서, 마을에 봉사를 좀 하라는 의미에서 권하고 있습니다.”
수영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물었다.
“헛바람이요?”
“별 쓸모도 없는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너무 많아요.”
재희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렇지만도 않거든요, 스승님. 다 나중에 언젠가는 소용이 있을 거예요. 아무 쓸모가 없으면 옛 사람들이 왜 만들었겠어요?”
민하가 타이르는 투로 말했다.
“재희야. 다 좋지만, 아직도 때때로 굶는 사람들이 있잖니? 밥을 먹는 게 중요하니, 아니면 네가 맨날 하는 얘기처럼 위성을 쏘는 게 중요하니?”
자기를 쫓아낸 지호를 여기서 또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수영은 속이 쓰려왔다. 분명 세상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대화가 반복되고 있을 것이다. 민하가 계속 얘기했다.
“너 아주 어렸을 때지만, 내가 여기 기사가 됐을 무렵 기억 나니? 시내가 아니면 도로가 다 망가져서, 다리 없는 차나 수레는 다니지도 못했지. 그렇다고 몇 대 없는 보행 트럭이 잘 돌아갔던 것도 아니야. 망가져서 녹슬어 가는 경운기도 잔뜩 있었고. 비효율적은 농기구를 억지로 써서 일하고 있었지. 겨울이 되면 별로 춥지도 않은데 다들 방에 틀어박혀서 이불만 뒤집어 썼어. 할 일이 없으니까.”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 오시기 전에는 여수에 기사가 한참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어떠니? 주민들은 훨씬 덜 일하고도 더 잘 먹고 잘 입고 살잖아. 그렇게 아낀 시간으로 길을 돌보고 집을 고치고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어. 고장난 발전기를 고쳐서 전기를 더 만드니까 사시사철 작물을 키울 수 있고. 다들 손이 바쁘니까 사회가 평화롭지. 재희야, 기사는 그렇게 해서 사람을 구하는 거다. 고기사님도 한 말씀 해 주시죠.”
수영은 머릿속에서 말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제자는 스승 말을 잘 들어야지.”
수영은 잠깐 물끄러미 쳐다보는 민하의 눈길을 애써 피했다. 다른 지방의 다른 기사가 자기 제자를 교육하는 것에 토를 달 수는 없다.
그 후로, 수영은 마음이 공연히 어수선했다. 민하가 설계의 대가로 제안하는 물자를 거의 흥정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하루 더 묵고 가라는 권유도 사양하고 짐이 가물치호에 실리는 대로 떠나기로 했다.
거래가 끝났다. 민하가 구경이라도 하라고 보여준 설계들은 대부분 간단하고 실용적인 기계였다. 개중 흥미로운 것이 전파 방송 설비였다. 민하가 설명했다.
“제가 젊었을 때 구상한 겁니다. 부품들은 비교적 구하기 쉬워서 만들려면 만들 수도 있기는 한데, 신호를 보내 봤자 수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수영은 설계를 들여다 보며 말했다. 무거워서 집에 두고 온 브라운관 TV를 떠올렸다.
“그러면 전파 수신기를 대량으로 만들어서 보급해야겠군요. 그건 방송 설비보다 비교적 간단할 테니 자동공장에서 쉽게 생산할 수 있겠고요.”
민하가 웃었다.
“다른 마을 일을 누가 그리 알고 싶을까요? 제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집집마다 이런 걸 갖출 정도로 느긋한 사람은 이 부근에는 없네요. 공정은 간단하다고 해도, 전자 부품은 아무리 간단한 것도 대량생산을 할 정도로는 찾기 어려워요.”
수영은 오기가 동했다.
“부품도 못 만들 건 아니지요.”
“그런 데까지 쓸 자원은 없어요.”
수영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왜 안 되는 쪽으로만 생각을 하느냐고 쏘아 주고 싶었지만, 민하가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나 모든 것이 부족하다. 그것을 개선하는 것이 기사의 의무인 것도 백 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옛 문명의 영광은 책과 사진과 동영상으로 남아 있다. 민하도, 그리고 지호도, 분명 거대한 비행기 수십 대가 세워져 있는 공항을 보았을 것이다. 이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막대한 양의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소들의 사진을 보았을 것이다. 화성에 세워졌던 거주지에 관해 읽었을 것이다. 홀로그램 스마트폰은 한때 세상 사람 거의 모두가 가지고 다녔던 물건이니, 민하도 아마 직접 보았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존재했음을 알고도 추구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지호는 끝까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은 주민들과 함께 수영을 내쳤다. 수영은 재희를 쳐다보았다. 이런 아이가 이런 스승에게 배우느라 과거 문명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수영은 식사 대접에 감사하는 인사를 한 뒤, 바닷길에 익숙치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방으로 돌아갔다. 밖에는 이미 해가 졌고, 방의 천장에 붙은 LED 등이 번쩍 들어왔다. 수영은 더욱 착잡한 심정이 되어, 책상머리에 턱을 괴고 앉아 온갖 생각을 했다.
시간이 꽤 지나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하자 재희가 쟁반에 새 물병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스승님이, 혹시 안 주무시면 몸 괜찮으신지 보고 오라고 하셨어요.”
수영은 거짓말을 했다.
“뱃길 오느라 속이 뒤집어졌는데 급히 먹어서 체했던 모양이야. 이제 괜찮아.”
수영은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재희를 불러 세웠다.
“얘, 재희야.”
재희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네?”
“너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네?”
“여기 있는 게 아까워서 그런다.”
재희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고기사님, 그러면 여수랑 제주 사이에 전쟁 나요.”
“설마 조기사님이 거기까지야 하시겠냐.”
“뭣보다, 저는 여수에서 하는 일이 있어요. 배우던 것도 있고….”
수영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분한테 배우면서 너 리니어 모터는 언제 연구할래? 위성은 언제 쏠래?”
재희가 인상을 아주 조금 찌푸렸다.
“저희 스승님은 훌륭한 기사세요. 그리고 꼭 제가 위성을 올려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까는 네가 하면 다른 사람도 한다더니, 네가 안 하면 누가 한다는 말이야?”
재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일을 시작하면 제가 가르치는 제자들이 이어서 하겠죠! 아까도 위성 하나 갖고 되냐고 하셨잖아요?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닌데 제가 서둘러서 어쩌겠어요?”
수영은 말문이 막혔다. 일을 이을 제자를 원해서 재희를 데려가려던 것인데, 재희는 바로 그것이 자기가 여기 남을 이유라고 말한다.
실은 정말로 따라오겠다고 했어도, 쫓겨난 수영에게 제자를 둘 여유는 없었다. 공장이나 전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번듯한 전차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설비가 갖추어진 작업실은커녕 당장 잘 곳조차 마땅치 않고, 무장도 빈약한 가물치호를 타고 서울에 가야 한다.
재희가 수영을 제주의 기사라고 여겨 설령 처음에 마음이 동했더라도, 거기까지 얘기하면 따라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수영은 자기가 그걸 뻔히 알면서 말을 꺼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호와 아라 마을을 잃은 충격 때문에 생각이 제대로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재희가 다시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수영에게 당부했다.
“저도 아무 말 않을 테니까, 저희 스승님한테는 이 얘기 하지 마세요. 괜히 서로 얼굴 붉히시지들 않게요.”
수영은 재희가 닫고 나간 문을 잠시 쳐다보다가 자리에 누웠다. 오늘도 밤잠을 설치겠구나 싶었지만,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졸음이 금세 실망을 덮었다.
일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이 밝아 있었다. 어제 수영의 추태를 잊어버린 듯, 재희는 밝은 얼굴로 더운물을 받은 대야와 비누, 수건을 방까지 가져다 주었다. 재희가 대야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짐은 다 실어 놓았어요.”
“오늘 오후에나 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제가 간밤에 마쳐 놓자고 했어요. 일찍 출발해야 밤길 안 가실 테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수영은 재희가 자기를 빨리 내보내고 싶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세수를 했다. 수건에는 ‘전염병 예방을 위해 비누를 꼭 사용해 주세요. 여수 청년회’라는 자수가 놓여 있었다. 아직 사람 사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여수는 비누를 항시 사용하고 수건마다 수를 놓을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모양이다. 그것도 아마 기사를 잘 둔 덕분일 터이다.
하늘은 맑고 날은 따뜻했지만, 수영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 동안 정말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재희의 말대로, 옛 시대를 일부나마 재현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성급하게 생각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날은 갈수록 더워지고, 바닷물은 서서히 올라온다. 태풍은 해가 갈수록 세진다.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마을들이 사라져 간다. 문명의 지식과 기술도 빠른 속도로 잊혀져 간다. 그것은 비누와 수건과 도로 땜질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가오는 암흑보다 더 빨리 앞으로 나가야 한다. 재희의 제자의 제자는 과연 인공위성의 꿈이라도 꿀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런 것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옛 과학과 기술은 대단했지만, 당초에 세계가 몰락하는 것을 막을 정도로 대단하지는 못했다. 그런 것을 이제 와서 되찾아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면에서는 스마트폰과 TV 또한 수건과 비누나 마찬가지일 터이다.
수영은 스스로를 비웃고 싶어졌다. 마을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쫓겨난 기사가 혼자서 인류의 미래를 고민하는 꼴이었다. 더 생각하기가 괴로워,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고 나갈 채비를 했다.
조민하와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재희는 어디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식탁에는 어제 저녁 때 먹었던 밑반찬들과 더불어, 생선 대신 제주에서 보기 힘들었던 계란말이가 나와 있었다. 수영은 짧게 감사 인사를 하고 말 없이 밥을 먹었다. 민하는 식탁에서 기술 얘기와 지방 소식을 더 교환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수영은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수영은 밖에 나와서, 가물치호에 깔끔하게 적재된 화물을 보았다. 곧게 닦인 넓은 길을 따라 앞마당까지 들어온 네 바퀴 트럭이 옆에 세워져 있다. 화물칸의 기계팔이 눈에 띄었다.
재희가 가물치호에 올라, 실린 짐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었다. 대부분 연료와 식량이다.
“짐칸이 꽤 푸짐해 보여요. 도적떼를 조심하셔야겠네요.”
다들 농사로 바쁠 봄이나 여름에 쫓겨났으면 그 걱정을 덜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수영은 속으로 웃었다.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조기사님.”
“네.”
“신세 많이 졌습니다. 가기 전에 재희한테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민하가 웃으며 그러시라고 했다. 재희가 가물치호의 뱃전에 걸린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수영은 주머니에서 메모리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가물치호 작살에 쓰는 리니어 모터 설계도야. 처음 만들고 나서 수십 년 동안 개량을 거듭한 거다. 잘 보고 더 크고 더 좋은 걸 만들어라. 네가 못 해도 네 제자는 위성을 쏠 수 있게.”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메모리 카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허락을 구하는 눈으로 민하를 쳐다보더니,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다.
“고맙습니다.”
수영은 고개를 몇 차례 끄덕였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어색해 질 것 같아, 가물치호의 뱃전에 걸쳐진 사다리를 올랐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잘 닦여진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갔다. 논에서 걷이의 뒷정리를 하는 농부들이 일을 멈추고 일어나 이쪽을 쳐다보았다. 순천을 지날 때는 여기도 한 번 들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해가 너무 길었다.
마치 고대의 성벽터 같은 고속도로의 잔해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광주, 북쪽으로 가면 지리산 옆을 지나게 된다. 수영은 민하의 조언에 따라 광주로 갈지, 아니면 서울까지 가는 직선에 가까운 북쪽 길을 택할지 망설이다가, 반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북쪽 길을 택했다.
순천을 지나자 갈수록 언덕이 많아지고 길의 상태가 나빠졌다. 수영은 잠시 내려서, 가물치호의 발에 붙여 둔 고무 밑창을 제거했다. 스파이크가 드러났다. 더 흔들리고 더 느려질 테지만, 미끄러져서 넘어지는 것보다야 낫다.
해가 질 무렵, 왼쪽으로 큰 숲이 보였다. 유령전차가 배회한다는 소문 때문에 그런지, 아까부터 한참 동안 사람이 없었다. 수영은 가물치호의 다리를 접고, 여기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발전기에 유채유를 붓고 스위치를 켜자 녹색 불이 들어오고 안심되는 부르릉 소리가 들렸다. 기름이 떨어질 무렵이면 충전도 필요한 만큼 끝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햇빛에 의지해서, 수영은 숲과 산자락 사이를 지나는 고속도로를 보았다. 저 도로가 있었다면 다리 달린 보행전차가 아니라 바퀴로 가는 승용차를 달려 지금쯤 서울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수영은 매끈한 고속도로 위로 거침 없이 굴러가는 은색 바퀴들을 상상했다.
발전기의 냉각수가 조종실의 라디에이터로 흘러들어왔다. 수영은 따로 난방을 켜지 않고 조종실 찬장에서 색바랜 담요를 꺼내 덮었다가, 지호가 붙였다는 새 총좌가 생각나 가물치호의 컴퓨터를 확인했다. 메뉴를 한참 뒤져도 찾지 못하고 있다가, 의자 팔걸이 옆면에 붙어 있는 동그란 회색 버튼을 눈치 채고 혹시나 싶어 눌렀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앞쪽 갑판의 작살 앞쪽 바닥이 열리고 묵직한 쇳덩이가 삼각대에 얹혀 올라왔다. 로터리 기관포다. 앞쪽에는 카메라까지 달려 있다. 조종실의 앞창 위에서, 있는 줄도 몰랐던 접이식 스크린이 통 하고 펼쳐졌다.
“조준은 어떻게 하는 거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버튼을 매만졌다. 손끝에서 부드럽게 구르는 것이, 그냥 버튼이 아니라 트랙볼이다. 기관포가 트랙볼에 맞추어 회전했고, 펼쳐진 접이식 스크린 위에서 포착 격자가 목표물을 찾아 움직였다. 수영은 총좌의 반응 속도와 영상 인식의 정확성에 감탄했다. 지호도 그저 경운기를 고치는 생각만 하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스크린에는 잔탄수도 나와 있었다. 백수십 발밖에 되지 않는다. 십 초 정도 쏘면 바닥이 날 양이다. 연습 사격 같은 것을 할 계제가 아닌 것이 아쉽지만, 이런 무기가 있으면 적어도 당분간은 도적떼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제주를 떠난 이래 처음으로 기운이 좀 났다.
수영은 담요를 두른 채 배 뒤편으로 가서 방수포 밑의 짐을 뒤져, 기린 모양의 탁상용 LED 램프, 그리고 소설이 수백 권 들어 있다는 전자책 단말기를 꺼냈다. 둘 다 여수에서 받은 물건이다. 조종실로 돌아와 의자의 등받이를 젖히고 담요를 덮은 뒤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을 읽을 때, 수영은 이해하지 못할 풍습이나 문물, 사고 방식이 나오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정당이라거나, 다국적 기업이라거나, 출퇴근 버스라거나,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는 휴가라거나 하는 요소들이 과거에 관한 상상을 자극하는 것이 좋았다.
해가 질 대로 지고 사방이 어두워졌다. 발전기는 배터리를 80% 좀 넘어까지 채우고 꺼졌고, 조종실 안에는 한기가 스몄다. 체온으로 덥혀진 담요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느껴, 수영은 난방용 보일러에 기름을 넣으러 다시 조종실을 나섰다.
들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큰 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수영은 소리가 나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지리산등성이에 붉고 푸른 불빛이 보였다. 다시 굉음이 들렸다. 이번에는 사이렌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빛까지는 꽤 거리가 있다. 수영은 숨을 죽이고 몸을 낮추었다. 시선은 불빛에서 떼지 않았다. 저것이 전쟁의 끝을 모르고 배회하는 유령전차인 모양이었다. 불빛은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도는 상당히 느리지만, 저대로 가면 곧 시야를 벗어나게 된다. 여기 조용히 있으면 아마 안전할 것이다.
수영은 그때 선택의 기로에 섰다. 여기서 가만히 아침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저 유령의 뒤를 따라갈 것인지? 저 전차에는 이제 잊혀진 기술들이 가득 들어 있을 것이다.
기사가 아닌 사람에게라면 당초에 선택지가 아니었을 것이고, 기사라고 해도 어지간하면 한 번 상상만 하고 쓴 웃음을 지으며 안전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지를 고민하는 사이, 수영은 자기가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마을에서 쫓겨난 기사였다. 도와야 할 주민도 없고, 가르쳐야 할 제자도 없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머리가 핑 돌며 눈에 눈물이 고였다.
배터리는 아까 보았을 때 80%를 넘겨 있었지만,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수영은 발전기에 기름을 다시 꽉 채우고 조종실에 들어갔다.
가물치호의 전원을 켰다. 모터가 도는 소리와 함께 컴퓨터 화면이 켜지고 계기판 곳곳에 불이 들어왔다. 레이더에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
붉고 푸른 불빛은 저 멀리서 천천히 산등성이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수영은 불빛을 향해 선수를 돌렸다. 한때 고기 잡는 배였던 가물치호가 완만한 산자락을 타기 시작했다. 튼튼한 선체가 앙상한 나무들을 이리저리 밀치면서 전진했다.
수영은 산속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면서, 잠시라도 불빛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제대로 작동하는 전차라면 분명 지금쯤 가물치호를 포착했을 터이다. 그러나 센서가 고장났는지, 아니면 가물치호를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았는지, 전혀 이쪽을 눈치챘다는 기색이 없다. 그저 능선을 타고 느릿느릿 걸을 뿐이었다.
가는 길 한 쪽에 다른 전차의 잔해가 보였다. 잠시 멈추어서 전조등을 비추고 살폈다. 불타서 검게 그을린, 가물치호 정도 크기의 다리 여섯 개짜리 전차다. 옆면에는 뭔가가 폭발한 것 같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을음 사이로 글씨라고 짐작되는 자국이 보였지만 읽기에는 손상이 너무 심했다. 지금 쫓고 있는 전차의 사냥감이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내려서 더 살펴 보고도 싶었지만, 유령전차는 시간을 그만큼 지체해도 다시 쫓아갈 수 있을 정도로 느리지는 않았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수영은 마치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여기서 미친 AI의 공격을 받아 자기도 저렇게 객사할지 모른다. 목숨을 건지더라도, 길을 전혀 모르는 지리산 산중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저 전차를 따라가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달리 살아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첫 번째 전차의 윤곽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어림잡아 가물치호보다 조금 큰 덩치지만, 다리가 길어 키가 더 컸다. 아직도 레이더에는 반응이 없다. 오랜 시간 얼마나 순찰을 반복했는지, 지나간 자리에 넓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수영은 두려움과 기대를 동시에 품고 유령전차의 뒤를 밟았다.
어두워서 보이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유령전차는 야간 센서가 있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길을 찾아갔다. 수영은 차마 가물치호의 전조등을 켜지는 못했다. 대신 자동 주행을 켜 놓고, 기린 LED 램프를 들고서 갑판에 나가 앞에 가는 구시대의 전차를 살폈다. 차체 위와 양옆에 큼지막한 포가 달려 있고, 장갑이 떨어져 노출된 센서 모듈이 작은 탑 같은 구조물 위에 붙어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너무 가깝다. 수영은 침을 삼키고 조종실에 도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속도를 늦췄다.
그것이 실수였다. 자동 주행을 켠 상태에서 보폭과 속도를 조정하는 데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가물치호의 걸음이 꼬여 크게 휘청거렸다. 수영은 자리에서 튕겨져 나갈 뻔했지만, 팔걸이를 꽉 붙잡아 버티고 늦게나마 안전벨트를 찼다.
그때, 지금까지 가물치호가 없는 듯 무시하고 앞길을 가던 전차가 잠시 멈췄다가 이쪽으로 뒷걸음질을 쳐 왔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붉고 푸른 조명들이 전설 속 괴물의 눈처럼 이쪽을 비췄다. 수영은 전차의 시야에서 벗어나려고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안 그래도 꼬인 걸음을 가다듬던 가물치호는 더욱 휘청거렸다.
수영은 눈을 부릅뜨고 트랙볼을 움직여 로터리 기관포를 눈 앞의 전차에 조준했다. 기관포 전용의 접이식 스크린위에서 목표 격자는 새까만 어둠만 더듬고 있었다. 기관포에 붙은 카메라는 야간에 아무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수영은 육안으로 대충 위치를 잡고 쏘았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수십 발의 총탄이 발사되었다.
그러나 두꺼운 장갑을 두른 전차는 빗발 같은 총격에 아랑곳 않고,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가물치호를 향해 포탑을 돌렸다. 수영은 급히 피하려 했지만, 아직도 균형을 잡고 있는 가물치호는 움직 임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급전진하여 엄청난 속도로 전차에 부딪쳤다가 튕겨 나왔다. 수영은 조종석에서 온 방향으로 흔들렸다.
가물치호는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기울어 갔다. 이대로는 저 경사 밑으로 떨어지고 만다. 유령전차가 먹이를 노리는 표범처럼 닥쳐왔다.
수영은 그 모든 순간이 느리게 느껴졌다. 지금 취할 수 있는 대처 수단들이 머리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자기도 모르게 왼주먹으로 팔걸이 끝의 빨간 버튼을 내리쳤다. 지난 수십 년간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물고기를 잡기에는 출력이 넘쳐도 한참 넘치는 리니어 모터가 탄소나노튜브 밧줄을 단 작살을 앞으로 쏘았다.
고속으로 발사된 육중한 작살이 어느 총격보다도 요란한 굉음과 함께 유령의 장갑을 꿰뚫었다. 수영은 작살의 밧줄에 급히 브레이크를 걸었다.
굴러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러기에는 브레이크가 너무 늦었다. 가물치호의 스태빌라이저는 드디어 균형 잡기를 포기했고, 배는 계곡으로 가는 가파른 내리막을 향해 쓰러졌다. 유령전차는 작살에 제어부를 다쳤는지, 아니면 짐을 가득 실은 배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는지, 가물치호와 함께 구르기 시작했다.
배와 유령이 밧줄로 이어져 아무도 없는 산비탈을 굴렀다. 수영은 좌석에서 이리 뒤집히고 저리 흔들리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폈다. 유령전차가 마치 약 먹은 바퀴벌레처럼 여섯 다리를 미친 듯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 다리가 나무에 걸릴 때마다 추락의 기세가 줄어들었지만, 보행전차 두 대가 함께 떨어지는 것을 멈추기에 경사는 너무 급했고 나무는 너무 앙상했다.
마지막으로 텅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수영은 몸을 X자로 꽉 조여 오는 안전벨트 때문에 전신에서 숨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여기서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가물치호는 그것으로 추락을 멈췄다. 배는 완전히 뒤집혀, 수영은 조종석에 앉은 채로 거꾸로 매달린 꼴이 되었다. 수영은 팔걸이의 스위치를 눌러 전조등을 켰다. 똑같이 몸이 뒤집혀서 일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유령전차가 눈앞에 보였다.
수영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몸이 조종실의 천장에 떨어졌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아직 버젓이 움직이는 유령전차를 앞에 두고 쉴 틈은 없었다. 수영은 비틀거리며 조종실을 나갔다.
유령전차가 다리를 움직여서 몸을 좌우로 기울이며 일어나려고 발악하고 있었다. 모터 소리가 마치 비명처럼 들려왔다.전조등 불빛만으로 보면 이곳은 세 방향이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의 제일 안쪽이다. 수영은 유령전차에서 눈을 떼지 않고, 이제 움직이지 않는 가물치호의 선체를 엄폐물 삼아 다가갔다. 가물치호는 우현에 구멍이 나 있었다. 구르는 동안 유령전차의 사격에 맞은 모양이다. 수영은 오는 길에 보았던 그을린 전차를 떠올렸다.
유령은 포탑 세 개가 모두 가물치호를 향하고 있었지만, 계곡에 추락한 뒤로는 한 발도 쏘지 않았다. 이미 움직임을 멈춘 가물치호를 더 이상 위협으로 여기지 않는 모양이라고, 수영은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가물치호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알 수 없었다.
앞으로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는데, 뒤집힌 유령전차의 파랗고 붉은 불빛들이 일제히 주황색으로 변했다. 수영은 타이거샤크의 계기판에서 비슷한 색깔을 본 적이 있었다. 비상 복구를 위해 OS를 재기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이 자율전차가 타이거샤크와 같은 신호 체계를 사용하는지, 설령 그렇더라도 이렇게 바깥에 드러낸 색깔이 과연 같은 것을 의미하는지, 수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걸음은 가물치호의 잔해 그늘을 떠나 유령전차에게로 향했다.
수영은 뒤집혀서 주황색 불빛을 발하는 전차 앞에 섰다. 작살은 아직 박힌 채다. 완전히 뒤집힌 가물치호를 뒤돌아보았다. 가득 실었던 짐은 아마 비탈에 산산이 흩어졌을 것이다. 생소한 산속에서 조난을 당한 셈이지만, 그런 생각은 마음의 저 뒤쪽에 있었다. 수영은 마치 오래 헤어져 있던 가족이라도 만나는 것처럼 유령전차에 다가갔다.
주황색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리둥절해 있는데, 다시 파란 불빛이 들어왔다. 다리를 움직여 어떻게 해 보려던 아까와 달리, 몸통의 무언가가 회전하면서 유령전차의 자세를 바로잡기 시작했다. 수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유령이 일어섰다. 여섯 개의 다리가 마치 파도를 타듯 움직였다. 전차가 불빛들로 수영을 잠시 비추었다가, 계곡 안쪽을 향해 가물치호를 끌고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수영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전차는 수십 미터 정도를 걷다가 계곡 안쪽 벽을 바라보고 멈췄다. 수영은 그때, 끌려오는 가물치호가 비추는 계곡의 풍경에서 기이한 점을 느꼈다. 전차가 바라보고 있는 앞쪽 풍경이 아주 잠깐씩 깜빡이는 것 같았다. 마치 고장난 홀로그램 스마트폰 같다고 생각했을 때, 앞쪽의 산비탈이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커다란 회색 철문이 나타났다.
“154사단 제3자율기동부대 무인정비보급창. 관계자 외 출입엄금.”
수영은 문에 쓰인 흰 글씨를 자기도 모르게 소리내어 읽었다. 유령전차가 신호를 보냈는지, 문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리를 내며 좌우로 열렸다. 안에 조명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전차는 가물치호를 매단 채로 그 안에 들어갔다. 수영은 혹시라도 문이 닫힐세라 달려서 그 뒤를 따랐다.
안은 마치 거대한 자동공장 같았다. 생산 유닛이라고 생각되는 복잡한 설비가 공간의 절반을 차지했다. 나머지 절반에는 기계팔들이 여럿 달린 철골 구조물 아래로 전차 네 대가 들어갈 자리가 있었다. 두 자리는 비어 있고, 두 자리는 이제 절대 움직일 일이 없으리라 생각되는 전차의 잔해로 채워져 있었다. 가물치호까지 안에 들어오자 문이 닫혔다.
모든 것이 거대해서 그런지, 수영은 유령전차가 주차 공간에 자리를 잡고 나서야 입구 반대편에 있는 작은 문 하나를 발견했다. 문패가 붙어 있었지만 글씨의 흔적을 알아볼 수 없었다. 뻑뻑한 문 손잡이를 돌렸다. 안은 책상 둘이 있는 사무실이었다. 바닥에 군복을 입은 해골 두 구가 보였다. 하나는 머리에, 하나는 가슴에 총을 맞은 자리가 있었다. 수영은 몸서리를 치고, 해골을 밟지 않도록 조심해서 걸었다.
두 책상 중 하나에는 평범한 컴퓨터가 있었지만, 다른 하나에는 생산 유닛을 제어하는 큼지막한 전용 터미널이 있었다. 제주의 자동공장에 있는 것과 비슷한 생김새다.
터미널은 키보드의 키를 하나 누르자 곧 켜졌다. 수영은 터미널 화면에 붙어 있는 메모지의 색 바랜 글씨를 보고, 거기 적힌 로그인과 패스워드 정보를 입력했다. 이 정비보급창의 모든 것이 펼쳐졌다. 재고 부품과 물자, 생산 가능한 품목들과 그 설계 자료, 전차들의 정비 상태, 지열 발전기의 운영 상태, 비상식료품이 담긴 잔량과 보존 상태 등등이 일목요연하게 한 화면에 표시되었다.
수영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가능성을 앞에 두고 손끝을 떨었다. 유령전차의 회로를 수정해서 당장 지리산을 안전하게 만든다. 다시 사람의 명령에 따르게 개조한다. 생산 유닛을 개조하여 범용 자동공장으로 만든다. 이곳의 수많은 설계도들로 옛 문명의 산물들을 재현한다….
지호는 틀리지 않았다. 여수의 조민하도, 재희도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수영은 이제, 자신 또한 틀렸던 것이 아님을 알았다. 단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
수영은 터미널에서 유령전차의 명령 및 일정 메뉴에 들어갔다. 아까의 로그인과 패스워드를 다시 입력하자, 사무실 창밖이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주차장에 자리를 잡은 전차가 다시 OS 재기동을 하고 있었다. 정비 일정과 순찰 경로, 색적 조건 등의 상세 정보 옆에,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책으로 읽어서 잘 알고 있는 표준 AI 쿼리 인터페이스가 표시되었다.
수영은 ‘3호 전차’의 수리를 바로 시작하라는 우선 명령을 입력했다. 멈춰 있던 기계팔들이 낮은 진동음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망가진 장갑판의 교체품을 지하 창고에서 출고 중이라는 알림이 표시되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설계도처럼 펼쳐졌다. 서울에 갈 마음도, 제주에 돌아갈 마음도 눈 녹듯 사라져 갔다. 정말 오랜만에, 수영은 마음 깊은 곳이 따뜻하게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출처 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Board=n9998&id=1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