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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CTP Everywhere] 숨을 오래 참으려면 / 20.4 크로스로드

최종 수정일: 2020년 4월 22일


 

 새벽 4시 55분 수영장, 첫 수업 5분 전. 100m 레인 8개와 다이빙장은 아무 소리 없이 고요하다. 한겨울이라 탈의실과 수영장을 사이에도 살얼음 같은 바람뿐이다. 막 샤워를 마쳐 물기 남은 피부로 찬 공기가 몰아닥친다.

   탈의실에서 새 나온 희끄무레한 빛뿐인 넓은 공간에, 5분 뒤 탕 탕 탕 탕 끝에서부터 불이 차오른다. 맑은 물 속으로 하루 중 가장 맑고 투명한 무대가 펼쳐졌다. 흰 그림자가 일렁이는 풀에 뛰어들어 한 손 가득, 한 팔 가득 묵직한 수압을 맞서 나아갔다. 나는 수영을 하면서, 내가 직면해 겁이 나지 않을 것은 평생 물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태이론 물리센터에서 주관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스쿨이 열린 것도, 겨울 칼바람이 잦아들지 않은 2월이었다. 바다 근처 청회색 항구도시는 내륙에 살던 나에게 너무 낯선 모습이었다. 터미널에서 포스텍 입구를 지나쳐 무은재관까지 겨울방학이라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포항이라는 도시의 첫 인상은 참 삭막했다.

   하지만 캠프 일정을 하루하루 넘기면서, 포항의 이미지는 경험과 추억으로 알록달록해져갔다. 회색 항구도시일 뿐이었던 포항의 색채를 드라마틱하게 변화시킨 것은, 오롯이 2박 3일의 캠프였다. 바뀌기 어렵다는 첫인상의 색을 덧칠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것을 했지만 그 내용은 다른 친구의 후기가 아주 아주 잘 보여줄 것이다. 그러니 그 글도 꼭 읽어보길 바라며, 나는 이 캠프를 참가한 학생들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글을 풀어나가려 한다.

   본 캠프의 프로그램은 크게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 2가지로 나눠진다. 각각의 프로그램은 이번이 19번째 캠프인 만큼, 강연자님들의 강연 주제뿐 아니라 수업 내용까지 많은 수강생의 피드백이 누적되어 알찼다. 먼저 참가자로 선발되면 글쓰기 수업의 경우, 주제로 제시된 책을 기반으로 1쪽의 짧은 자유글을 제출하라는 메일을 받는다. 제출한 글은 포항에 가기 전에 1차 첨삭이 완료되어 돌아온다. 받은 글은 캠프에서 수업을 듣고 배운 내용을 참고해 마지막으로 2차 첨삭을 받을 수 있다. 캠프가 끝나고 나면 나는 총 2번 첨삭 받은 나만의 글 한 편을 얻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과생이 자신의 글을 쓸 기회가 적다는 것은 모든 자연, 공과 대학생이 공감할 것이다. 우리가 글을 쓰면서 느끼는 것은 교양 레포트에서 질로는 문과 학생들에게 치일 수 밖에 없으니, 물량으로 밀어 붙이면 B+ 정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뿐이다. 심지어 써 낸 레포트들은 정말 학생에게 무궁한 관심을 갖고 계신 교수님이, 시간과 체력의 여유가 있지 않으면 제대로 된 피드백을 받을 기회조차 없다. 실력 개선의 여지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과학 커뮤니케이션 스쿨의 글쓰기 프로그램은 주제가 과학이고, 다른 친구들도 비슷한 학과에서 왔으므로 많은 미사여구와 글재주가 필요하지 않다. 주제가 뜬구름 잡는 공상을 포함하지 않아 이과생의 정서에도 부합한다. 이런 점이 본 프로그램을, 글쓰기가 서툰 이공계 학생들에게 기본 소양을 쌓기 적합한 기회로 만들어 준다. 또, 한 글을 여러 번보고 고치는 경험을, 특히 논리적인 내용이 중요시 되는 과학 글쓰기로 한다는 것은 집필 실력을 빠르게 향상시키는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단점이 있다면, 과학적으로 한참 부족한 글을 교수님께 보이며 느끼는 수치심이 있다는 것 정도일까. 그분들이라면 우리가 정자로 먹을 갈아 쓴 글이나 물구나무를 서서 쓴 글이나 비슷하게 보일 것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글쓰기를 하면서 개인플레이의 수렁에 빠졌다면, 프레젠테이션 수업은 3인 1조 팀플레이의 험난함에 부닥치게 될 것이다. 사공이 1명이라도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겠는데, 3명이 되면 한 치 앞 보이지 않는 안갯길 속에 취향이라는 방향 변수가 생기게 된다. 주제를 고르기 위해 대화를 나누면서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 아웃풋의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꼈다.

   예를 들어 우리 팀은 개의 인위적 변위와 돌연변이 등에 대해 윤리적 문제를 다뤘는데, 다른 조는 비둘기의 자연선택과 조류독감을 주제로 프레젠테이션 했다. 어떤 조는 자살의 유전적 원인을 미디어와 결합해 주제로 했었고, 내 친구의 조는 가상의 행성을 만들어, 그곳에서 진화한 생물체가 어떤 모습을 띄고 있을까 발표했다.

   몇 시간동안 상의하고 토론해서, 조마다 각양각색의 결론을 간신히 내리고 나면 이제 시간에 쫒길 타이밍이다. 2차 개인 과제물을 제출하면 저녁 6시. 6시부터 밥을 먹고 뭐하다가 주제를 결정하면 빨라도 10시. 12시간만에 15페이지짜리 과학 관련 PPT를 만들어 내야 한다. 자료 찾기, PPT 만들기, 대본 쓰기, 발표연습까지 반나절 만에 끝낼 수 있을까 처음에는 정말 무리일 것만 같았다. 심지어 의견 조정도 PPT를 만드는 와중에 계속 진행해 나가야 했고, 대본을 쓰는 순간까지 서로의 견해나 생각의 간격을 줄이기 위래 생산적인 토의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만큼 프레젠테이션이 끝났을 때 짜릿함과 성취감은 컸다. 내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의 한계를 넓혔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또 한 책을 읽고 그것을 가공해 2차 생산을 해 내려면 생각보다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 ‘종의 기원’이라는 생물학의 성경과 같은 책을 한번 제대로 읽었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많은 자부심을 주었다.

   당시에는 물리적으로 죽을 것 같았지만, 되돌아보니 대중적 과학인이 되고 싶은 나의 역량과 능력을 높이는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나는 평소에 남 앞에 서는 것이 정말 무서웠다. 발표대에 나선 경험도 손에 꼽았다. 내 친구들이 공감해 줄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상당히 심약해서 말싸움을 할 때는 눈물부터 나고, 발표를 하려면 목소리가 천 갈래로 갈라진다. 첨삭 받으려면 부정적 평가가 두려워 제대로 제출하기를 꺼렸다. 사람과 직접 대면하는 것이 항상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 스쿨이 끝나고 나니, 내가 고개를 들고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많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영을 잘 하려면 숨을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수영장에서 숨을 오래 참아 더 멀리가려면, 물 속에서 물을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과학인으로서, 또 사회인으로서 이번 캠프를 통해 느낀 것은, 소통의 기술을 익히는 것이 수영이라는 스포츠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을 먹든 눈물을 먹든 무언가에 숙달 되려면 시도해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뭍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 새 한 팔 더 멀리 뻗어 나온 내가 보인다.


원본 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Board=n9998&id=1543&s_para4=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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